구르는 풀 Tumbleweed

유정현展 / YOOJUNGHYUN / 劉正賢 / painting.printing   2025_0301 ▶ 2025_0321 / 월요일 휴관

유정현_Discontinuous_250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2.6cm_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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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기획 / 갤러리 진선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진선 GALLERY JINSUN 서울 종로구 삼청로 59 2층 Tel. +82.(0)2.723.3340 www.galleryjinsun.com @galleryjinsun

구르는 풀 _ 경계를 가로지르는 주체1 회화에서 이미지가 지닌 매력, 시선을 끄는 힘이란 무엇일까. 이미지를 이루고 있는 형태와 색채, 구성과 같은 시각적인 요소들이 주는 힘을 뜻할 수 있다. 혹은 어떤 이미지로 인해 기존 인식에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 그 내재적인 힘을 일컬을 수도 있다. ● 유정현의 회화는 이 두 가지 힘의 요건을 모두 충족시킨다. 그의 작품 속 이미지는 모호하면서도 명백한 형상을 통해 시각적, 그리고 인식적 역설의 힘을 보여준다. 화면 위에 펼쳐진 물감 얼룩과 붓질의 흔적은 어느덧 사물(인간의 몸을 포함하여)과 사건이 되어 다가온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차가움과 뜨거움, 말끔함과 엉망진창, 비움과 채움, 묘하게 공존하고 넘나드는 경계와 진동의 순간. 반전의 묘미란 이런 것이리라. ● 유정현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판화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 예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후 2002년에 현지에서 작가로 데뷔해 활동했다. 그가 귀국해 2005년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개인전을 통해 선보인 작업을 되짚어 보면, 초기에는 인간의 몸을 주된 모티프로 하여 그것의 내부 또는 외부를 장식(?)하고 있는 식물의 형상이 주를 이뤘다. 이후로 이 식물 형상은 점점 더 커지고 주요해지면서 화면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9년 무렵부터는 여기에 때때로 선명한 색상의 원형 색띠와 입체적인 곡선과 같은 매우 이질적인 형태들이 추가되었다. ● 앞서 식물이라 칭하긴 했으나 엄밀히 말해 그것은 그저 작가가 캔버스 위의 물감 얼룩을 닦아내고, 덮고, 다시 지우기를 반복하는, 그에 따르면 "질료의 우연적인 유동성을 수렴해 대상의 잠재적인 힘에 더 주목"함으로써 마침내 발견한 '형상'이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유정현_Discontinuous_250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2.6cm_2025
유정현_Discontinuous_38_깊은 숲,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10×100cm_2025

캔버스 위에 반복해서 그리고 다시 지우는 행위는 무수한 물감과 손의 흔적들을 만들고 그 안에서 마치 강박적인 수사관처럼 주요한 이미지의 단서들을 발견해간다. 형상을 지워내며 새로운 형상을 발견해가는 선택의 과정에서 우연은 다시 필연적인 구조로 작동된다. (유정현, 「작가노트」) ● 따라서 화면에 나타나 있는 형태는 식물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두고 그것과의 닮음을 추구해 그려진 것이 아니다. 물감의 얼룩과 부지런히 움직인 작가의 손의 흔적, 때로는 긴장 속에서 폭발하듯 속도감 있게 휘두른 붓질의 흔적 등이 우리의 감각과 만나 우연히 떠오른 형태,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이를 '형상(Figure)'이라고 불렀다.

유정현_No.0084_종이에 포토에칭_65×45cm_2025
유정현_No.0146_종이에 포토에칭_65×45cm_2025

2 최근 유정현의 캔버스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무성히 우거진 식물의 줄기와 잎의 형상이다. 화면 크기에 따라 정글처럼 울창한 숲 일부로 느껴지기도 하고, 이를 더 바짝 당겨 잘라낸(cropping) 화면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특이사항이라면 이 식물의 형상들 사이를 날카롭게 가로지르는 직선의 색띠다. 기존에 보인 색띠는 원형 또는 곡선의 형태로 마치 새로운, 혹은 변형된 줄기처럼 화면 속 식물 형상 사이를 이리저리 누비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직선의 색띠들은 형상을 거침없이 관통하며 뻗어 나간다. 게다가 캔버스 옆면까지 이어져 조만간 프레임 안에만 머물지 않고 전시장 벽면까지 확장될 기세다. ● 색띠의 등장은 의외의 효과를 낸다. 미술평론가 유진상은 "마치 곤충이나 외계의 식물들처럼 이것들이 조직의 틈과 공간들 속에서 모습을 감추거나 드러내는 사이 한때 식물이었던 묵색의 얼룩들은 불특정한 추상적 범위로 모습을 바꾸어간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유진상, 「불안과 매혹」, 『URBAN PLANTS』, 2011). 그의 말대로 기하학적 추상을 연상시키는 색띠의 출현은 식물처럼 보였던 형상을 어느 순간 서정 추상의 요소로 전환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색띠의 역할은 이질적인 시간과 공간의 접합에 있다. 기존에는 자연과 도시를, 이번에는 과거와 현재를 접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 이를테면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1940년대 일제강점 말기 송탄유(松炭油)를 얻기 위해 동원된 소나무들의 모습을 담은 포토에칭 작업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일제가 송진 채취를 위해 나무 껍질을 벗기고 여린 속살에 무수히 새긴 'V'자형 빗금의 상처는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작가는 몇 년 전 우연히 발견한 이 소나무들을 찾아다니며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이를 포토에칭으로 제작해 하얀 판화지 위에 검은색 잉크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 사실상 화면에 드러나 있는 것만으로는 그 배후에 어떠한 역사적 사건이 담겨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소나무에 새겨진 잔혹한 노동과 착취의 흔적은 언뜻 작가의 회화 작품 속 직선의 색띠와 시각적으로 닮았다. 유정현의 회화에서 식물의 형상 사이를 가로지르던 색띠는 공교롭게도 포토에칭의 빗금 상처와 오버랩되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 다만 관람자는 그것이 클로즈업된 나무의 상처 부위임을 모른 채,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초현실적이고 신비로운 자연의 한 장면으로 여길 수도 있다. 결국 포토에칭 작업 역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경계, 그 진동의 순간을 담고 있다.

유정현_&gather_250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5×31.5cm_2025
유정현_&gather_250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5×31.5cm_2025

3 이제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구르는 풀(tumbleweed)' 이야기로 마무리해야 할 듯하다. 구르는 풀, 즉 '회전초(回轉草)'는 사막처럼 건조한 지역에서 공처럼 뭉쳐져 굴러다니는 마른풀을 일컫는다. 그렇게 굴러다니면서 여러 종의 풀들이 섞이기도 하지만, 1년 살이 식물로 자라다가 가을이 되면 스스로 뿌리로부터 줄기를 분리해 자발적으로 회전초의 삶을 택한 풀도 있다. 이들은 바람을 타고 이동하며 씨앗을 퍼뜨려 번식한다. 그러다가 비가 오거나 물이 있는 곳에 가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어 번식하기도 한다. ● 기능적으로 분할된 기관-뿌리, 줄기, 잎-에서 벗어나 다른 종과 뒤섞이며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유동적인 변이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탈영토화된 유목적 존재, 그것이 회전초의 속성이다. 이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 A Thousand Plateaus』(1987)에서 제시한 '기관 없는 신체'(BwO, Body without Organs)를 떠올리게 한다. 나아가 들뢰즈의 '유목론'에 이론적 토대를 두고 이를 비판적으로 재사유하는 페미니스트 철학자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의 '유목적 주체(nomadic subject)' 개념과 상당히 맞닿아 있다.

유정현_&gather_250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5×31.5cm_2025
유정현_&gather_250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5×31.5cm_2025

나는 "유목적 주체"라는 개념의 상이한 면면을 우리 시대 주체성에 적합한 이론적 형상화로서 설명하려 한다. 형상화figuration라는 용어는 주체에 대한 남근중심적인 시각을 벗어나는 출구를 일깨워 주거나 표현하는 사유의 스타일을 이른다. 형상화란 대안적인 주체성을 정치에 입각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브라이도티, 『유목적 주체』) ● 여기서 남근중심적 관점은 곧 이성중심적, 유럽의 백인 남성으로 한정되는 인간중심적 사고의 틀을 가리킨다. 따라서 브라이도티의 '유목적 주체' 개념이 인간중심주의를 경계하며 인간을 포함한 사물, 즉 비인간 존재의 공생을 사유하는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의 주체 개념과 연동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다.

나는 비판적 포스트휴먼 주체를 다수의 소속을 허용하는 생태철학 안에서 다양체로 구성된 관계적 주체로 정의한다. 차이들을 가로질러 작업하고 또 내적으로 구별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현실에 근거를 두고 책임을 지는 주체로 정의한다. 포스트휴먼 주체성은 체현되고 환경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부분적인 그런 형태의 책임성을 표현하며, 집단성, 합리성, 공동체 건설에 대한 강력한 의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 작가 유정현은 보이지 않으나 보이게 될 가능성, 혹은 그 잠재력과 생성의 힘에 주목한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은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가능한 것"을 포착해 제시하는 '형상화'의 과정 그 자체이다. 이는 기존 관습과 관점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틀에서 새로운 이미지로, 새로운 사유 방식을 고민하는 대안적 주체성의 예시라 할 수 있다. 그 핵심은 무한한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 관계 맺으며 변화와 확장의 기회와 가능성을 날카롭게 인식하는 데 있다. ■ 이민수

Vol.20250302b | 유정현展 / YOOJUNGHYUN / 劉正賢 / painting.pr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