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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5_0207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02:00pm~07:00pm / 월,화요일 휴관
갤러리인 HQ GALLERY IN HQ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 97 (연희동 719-10번지) 1층, B1 Tel. +82.(0)10.9017.2016 @_innsinn_
지옥의 사랑, 사랑의 지옥 - 왕선정의 작업과 세계에 대하여 "세계의 비참과 지옥을 모르는 이가 어떻게 세계의 아름다움과 사랑을 그리겠는가?" 왕선정, 아름다운 색깔 ● 당신 앞에 걸린 왕선정의 그림을 보라.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왕선정이 사용하는 색깔이다. 왕선정의 그림은 그 자체로 색의 축제, 색의 향연이다. 당신이 '색'(色)이란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왕선정의 그림을 보라. 이 세상의 모든 보이는 것은, 여하튼, 색을 갖는다. 색과 물체는 분리 불가능하다. 로크가 믿었듯, 1차 성질과 2차 성질을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색은 물체 그 자체이며, 유채색(有彩色)/무채색(無彩色)이라는 구분은, 자연적 구분이 아닌, 인위적 구분, 학습된 구분이다. 모든 화가가 잘 알고 있듯, 검은색과 흰색도 모두 유채색이다. 왕선정은 유채색과 무채색, 검정과 하양, 노랑, 파랑, 빨강,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히 녹색을 마음껏 사용한다(당신이 '녹색'을 볼 때 당신에게 떠오르는 모든 것은 자연적 연상이 아닌, 학습된 문화적 조건화의 결과이다. 거꾸로 말하면, 당신이 녹색을 볼 때 당신에게 떠오르는 모든 것은 당신이 조건화된 특정 조건화 체계가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그리고 왕선정의 모든 색은 - 왕선정 스스로가 믿고 있고, 왕선정을 보는 거의 모든 이들이 믿거나 믿지 않게 되었듯 - 왕선정이 펼쳐내는 이야기, 서사, 내러티브에 의해 가려진다. 간단히 말해, 왕선정이 캔버스 위에 펼쳐내는 모든 색은 왕선정의 이야기에 종속된다(나 개인적으로는 못내 아쉽다. 나는 무엇보다 훌륭한 화가인 왕선정이, 같은 말이지만, 이야기와 형태로부터 벗어난 추상, 그러니까, 색깔 자체의 조합을, 이렇게 저렇게, 어떻게든, 붓 가는 대로, 바늘 가는 대로, 펼쳐 보았으면 한다). 왕선정은 가히 화려한 색의 향연을 펼쳐내지만, 왕선정이 진짜 그리는 것은 보이는 색이 아니다. 왕선정이 정말 그리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 관념과 신화의 세계, 그러니까 공(空)의 세계이다. 왕선정은 보이는 색의 세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공한 세계를 그린다. 그러나 실은 왕선정은, 우리 모두와 똑같이, 자신의 공한 세계, 텅 빈 내면의 세계를 실제로는 보고 있으므로, 이 공한 세계의 색을 그리고 있다. 반야(般若, prajñā)의 지혜가 말하듯, 참으로 보이지 않는 공의 세계와 보이는 색의 세계는 둘이 아니다(不二), 실은 같다(色卽是空空卽是色). 왕선정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있으므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처럼 그리고 있다. 왕선정이 보는 이 공한 세계, 내면 세계는, 우리가 작가의 글과 그림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지옥이다.
지옥, 그것만이 내 세상 ● 특히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왕선정의 작업을 볼 때, 내게 떠오르는 화가는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이다. 천국과 지옥을 모두 그린, 그러나 지옥에 대한 묘사가 훨씬 더 탁월한, 15~16세기를 살았던 네덜란드 화가. 그런데 보스는, 정확히야 알 수 없지만, 행복한 화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자신 매우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보스는 무지한 중생의 '계도'를 위해 지옥도를 그렸다. 너, 잘못하면 이렇게 지옥 간다. 그런데, 보스가 후에 '전복적'(convulsive) 아름다움을 추구한 초현실주의에 의해 높이 평가된 사실에서 볼 수 있듯, 천국은 재미가 없다(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고, 악마만이 예술이다. 이제 우리는 사실, 천사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고 말해야 한다). 톨스토이가 말한 대로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한 이유로 행복한 반면, 불행한 가정은 제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불행과 지옥이 행복과 천국의 비밀이다. 모든 행복과 천국은 불행과 지옥을 자기 바깥으로 밀어낸다.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고, 안과 밖을 나눈다. 자기와 세계의 분열이 정체성이 형성의 비밀이다. 지옥과 사탄이 없는 그리스도교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세계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의 말대로, 우리가 사는 모든 세계는 이런 분리할 수 없는 세계를 임의로 나눈 초석(礎石)적 폭력(violence fondatrice)의 결과이다. 세계를 진실과 거짓,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저렇게 나눌 수 있었던 보스는 행복했고, 끔찍했다. 괴물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괴물을 자신에 바깥에 두는 자, 자신만은 괴물이 아니라고 부르는 자'일 것이다. 나는 괴이한(怪) 존재(物)가 아니다. 나는 정상이다. 실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보스가 괴물이었다. 보스-되기가 불가능해진 오늘, 따라서, 바타유가 말하듯, 문학과 예술의 '사명'은 저주받은 부분(la part maudite), 그러니까, 괴물 또는 미노타우로스(minotaure)를 다루는 것, 악(惡)과 불행의 편에 서는 것이다. 악이란 선의 '바깥'(不善) 곧 '여집합'이자,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惡)이다. 따라서, 지옥과 악, 불행만이 재미있다. 그러나 나눌 수 없는 세계를 천국과 지옥, 산과 악으로 나누고, 지옥과 악을 추구하는 자는 여전히 천국과 선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도는 자이다. 가령, 안티-그리스도를 표방하는 자는 더할 나위 없는 그리스도교인이다. 그러나, 전체집합만을 갖는 스피노자의 멋진 신세계가 윤리적으로도 심미적으로도 재미가 없듯, 바깥이 없다면, 인식이, 예술이, 재미가 없다. 어떤 경우이든, 왕선정의 지옥은 왕선정이 아는 유일한 땅(terra congnita)이고, 그런 의미에서 왕선정의 왕국이다. 왕선정의 지옥은 왕선정의 왕국이다. 왕선정은 물론 자기 왕국의 왕이다. 그리고, 이 왕국은 슬프고 끔찍한 만큼이나 아름답다. 이제, 돌아가자.
지옥, 나의 사적 신화 ● 내게 우리시대의 보스처럼 보이는 왕선정은 계몽을 위한 작업 따위는 하지 않는다. 왕선정은 (실은 아마도 보스도 그러했을 것처럼) 실제로 자신이 그리는 세계 속에서 산다. 그리고 (우리 누구나 그러하듯이) 이 무의식의 세계는 신화의 세계이다. 융이 지적하듯, 이 신화의 세계는 - 더 이상 예전처럼 제도화된 남들의 종교, 남들의 세계가 아닌 - 나의 세계, 그러니까, 나의 개인적 신화 세계(my own private mythical world)이다. 같은 교회, 같은 절을 다니는 사람들조차, 실은 스스로가 모를 뿐 자신만의 개인적 예수(personal jesus), 개인적 부처의 상을 믿고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는 인간의 수만큼의 종교와 신화가, 인간이 펼치는 상념의 숫자만큼의 종교와 신화가 있다. 실은 모든 인간이, 모든 예술가가 그러하듯, 왕선정은 자신이 실제로 살고 있는, 이 내면의 개인적인 신화 세계에 살며, 그 세계를 그릴 뿐이다. 왕선정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은 그가 이 사실을 의식적으로 명확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이 사실이 왕선정을 구할 것이다). 이 내면 세계는 실제 세계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다(this inner world is even more real than the real world). 모든 신화학자들이 말하는 신화의 기능이란 다름 아닌 세계에 의미를 주는 일이고, 신화에 의해 개인은 삶(그리고 죽음)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의미를 찾으면 어떻게 되는가? 삶(그리고 죽음)이 살 만한(죽을 만한)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왕선정의 지옥은 이제 '그릴 만한' 것이 된다. 왕선정은, 자신의 지옥을 그리기 때문에, 살(죽을) 수 있게 된다. 왕선정에게 삶과 죽음은 분리불가능한 것이다. 왕선정은 자신의 예술 속에서 영원히 살고 죽는다(forever live and die). 그것은 영혼의 죽음(la mort dans l'âme), 단말마(斷末摩)의 고통이다. 그것은 살아 있으나 죽은 삶이고, 죽어 있으나 여전히 살아 있는 삶이다. 나는 차라리 왕선정을 보스보다는 다른 이름으로, 그러니까, 모든 현대의 화가들처럼, 종교 없는 '이콘'(像, eikon) 화가라고 부르겠다(특히 왕선정의 자수(刺繡) 작업들이 그렇게 보인다. 이콘화에서는, 마치 푸카나 트로트 또는 메탈처럼, 지켜야 하는 장르의 규칙(codes)이 있기 때문에 작가의 개인적 역량 차이가 훨씬 더 두드러진다).
지옥의 사랑, 종교화가 ● 왕선정은 지옥의 종교화가, 보다 구체적으로는 자기 마음 속 내면의 지옥을 그리는 이콘화가이다(그러나 자신만의 신화-의미 체계를 갖지 않는 인간이란 없으므로, 왕선정은 그저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인간, 다만 탁월한 미적 감각을 갖춘 좋은 화가일 뿐이다). 왕선정은 자신이 사는 지옥을 사랑한다. 물론 이 말은 어불성설이나, 모든 인간은 자신의 조건화 체계, 자신을 조건화시킨 체계의 의해 글자 그대로 조건화되므로, 이 조건화는 그 자신이 되므로,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의 지옥도 사랑한다. 왕선정은 지옥에 살며, 자신이 사는 지옥을 그린다. 지옥에 조건화된, 달리 말해 지옥 말고는 어떤 것도 참으로 경험해보지 못한 왕선정은 자신의 거주지, 이 지옥을 사랑한다. 그러나 더 나아가, 왕선정은 지옥에 사는 자신과 (각자 자신의 지옥에 사는) 다른 모든 인간, 이 비극적 세계의 다른 모든 거주민들을 사랑한다. 왕선정은, 모두 결국은 자신의 분신(分身)에 다름 아닌, 등장 인물들의 무용하고도 쓸모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행동을 수행하는, 이 비극적이고도 불쌍한 존재들을 사랑하며 연민한다, 가련하고 불쌍히 여긴다. 왕선정에게 사랑은 연민(憐愍, compassion)이다. 이런 자기와 타인에 대한 연민은 글자 그대로 '함께 고통받는(cum + passio)' 이들 사이의 연대(連帶 solidarity)이다. 왕선정은 자신의 그림에 나타나는 이들을 사랑한다, 연민한다, 가련하고 불쌍하게 여긴다. 왕선정은 자신의 지옥에, 그러니까 자신의 그림 속에 살며, 자신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같이 산다. 왕선정은 그들을 사랑하고 가련히, 불쌍히 여긴다. 이 지옥이 왕선정을 살게 한다.
사랑의 지옥 ● 왕선정의 지옥이 참으로 지옥이 되는 것은 왕선정이 지옥의 동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왕선정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여, 자신을 괴롭히는 지옥의 동료들을 무자비하고 냉정하게 쳐내지 못하는, 쳐내지 않는, 왕선정은 자신의 사랑 때문에 고통받는다. 왕선정은 가해자들 역시, 한때 그리고 지금도 일정 부분, 희생자들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시인 함은실의 말대로, 가장 불쌍한 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람이다). 그리고 이때 왕선정은, 마치 한강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사실 거의 예수처럼 보인다. 왕선정은 지옥에 중생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한 결코 해탈하지 않겠다는 원(願)을 세운 유마힐 또는 지장보살처럼 보인다. 그리고 니체가 말하듯, 때로 "사람들은 사랑이 사태를 개선할 것이라고 믿지만, 사실 사랑은 사태를 악화시킨다." 당연히, 그럴 때도 있다. 이런 일에 일반론은 무의미하다. 사랑은 왕선정을 살리고, 왕선정을 죽인다. 사랑은 사랑 아닌 것이 없다면 무의미한 말이다. 사랑과 사랑 아닌 것, 가령 무관심이나 증오는 쌍둥이들이다. 사랑과 사랑 아닌 것들은 왕선정의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원소들이다. 어느 하나로 세계를 환원하기에 세계는 너무 다양하고 다채롭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하나의 관점 안에 세계를 모두 담으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모든 신경증자,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자신의 신경증을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신경증으로부터 낫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니, 신경증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한다. 신경증자에게는 신경증적 세계가 자신이 아는 세계의 전부이고, 나아가 그러한 신경증으로부터 일정한 이익을 얻고 있기 때문에, 신경증자는 신경증으로부터 닛지 않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한다. 그리고, 이런 말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자신이 조건화된 관성의 체계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매우 힘든일이다.
지옥, 관념의 구성물 ● 천국이, 어디 먼 데 있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겪는 매일매일의 상태이듯, 지옥 역시 실재가 아니다. 지옥은 오늘 일상을 사는 내 마음의 상태이다. 결국, 왕선정의 지옥은 왕선정이 만든 지옥이다. 그러나, 이것을 왕선정의 책임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은 왕선정이 왕선정이 된 것은 그 자신의 책임만큼이나 동시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왕선정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다양한 조건화 기제가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런 묘사가 누구에겐들 타당하지 않겠는가?). 왕선정이 타인을 향해 던지는 연민은 왕선정을 향해서도 던져져야 한다. 왕선정의 연민이 때로 왕선정을 죽였듯, 이 동일한 연민은 때로 왕선정을 살릴 것이다. 나는 인간을 지칭하는 대표 단수로서의 왕선정이 자신의 지옥을 만들었다고 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지옥 속에서만 산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만든, 실은 만들지 않은, 지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정확한 자기 인식이 자기 소외를, 그러니까 치유를 가져온다. 따라서, 왕선정은 자신의 지옥도를 더 많이, 더 자주, 더 잘 그려야 한다.
왕선정, 관념의 구성물 ● 왕선정의 그림을 보고 내게 드는 생각이, 왕선정만큼이나, 실은 훨씬 더 나를 잘 보여주듯, 왕선정의 그림을 보고 당신에게 든 생각이 왕선정보다는 당신을 훨씬 더 잘 보여주듯, 왕선정이보는 세계는 세계보다는 왕선정을 훨씬 더 잘 보여준다. 나는 왕선정의 색과 그림이 왕선정의 신화와 형태에 갇혀 있기도 하다고 말했다. 왕선정 역시 자신의 작업에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이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이미 스스로 고민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면, 나는 다만, 우리 모두이며 나 자신이기도 한, 작가 왕선정이 자신의 길을 조금 더 가보기를 권해본다. 노자가 말하듯, 그릴 만큼 그리면, 결국 벗어나게 되어 있다. 거꾸로, 그릴 만큼 못 그렸으면, 계속 그리게 된다. 에너지가 소진된 후에 에너지를 계속 쓸 수 있는 방법이 없듯, 에너지가 소진되기 전에 남아 있는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방법이란 없기 때문이다(we've gotta get in to get out). 하여, 나는 왕선정이 종종은 서사와 형태로부터 벗어나기를 권하지만,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물론 하나의 수단, 방법론으로서, 서사와 형태로 더 깊이 몰입해 보기를, 자신의 세계를 더 많이 묘사해 보기를 권한다. 내가 없애고 싶은 것을 내가 나의 의지에 반하여 계속 하고 있다면, 남들은 이를 '과하다'고 말하겠지만, 실은 - 칸딘스키가 말하듯, 자신의 내적 필연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 오히려 '부족'해서, '덜 해서' 그렇기 때문이다. 나는 왕선정이 자신의 세계를 더 잘 묘사해 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잘? 더 정직하게가 아니라, 더 정확하게 말이다. 스무살 초반의 젊은 카뮈가 말했듯, "빛을 향해서도 어둠을 향해서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둘 모두를 직시해야 한다." 나는 작가 왕선정이 지옥과 천국을 모두 그리는 화가, 어떤 경우에도 자기만의 천국과 지옥을 그리는 화가가 되기를 바라본다. ■ 허경
Vol.20250207c | 왕선정展 / WANGSEONJEONG / 王鮮靜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