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갖춰진 집 house

박용화展 / PARKYONGHWA / 朴龍和 / painting   2024_1112 ▶ 2024_1124

박용화_갇힌 공간 열린 문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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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화 홈페이지_parkyonghwa.co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공주시_공주시의회 주최,주관 / 공주문화관광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공주문화예술촌 GONGJU CULTURE ART VILLAGE 충남 공주시 봉황로 134 Tel. 070.4415.9123 www.madeingongjuartproject.com/공주문화예술촌 @gongju_creative_residency

그의 눈길은 스치는 창살에 지쳐 이젠 아무것도 붙잡을 수가 없다. 그에겐 마치 수천의 창살만이 있고 그 뒤엔 아무런 세계도 없는 듯하다. - 릴케, 「표범 – 파리 식물원에서」(김재혁 역) 中 ● 릴케의 「표범- 파리 식물원에서」(이하 '「표범」')는 릴케 중기 시학의 중심 키워드인 '사물시'(Dinggedicht)의 대표적인 사례다. 사물시란 화자의 주관적인 관념을 읊는 대신 일상적인 사물에 대한 치열한 관찰과 해석에 주력하는 유형의 시로, 「표범」은 일상적인 사물 중에서도 파리 식물원 내에 조성된 동물원의 창살 속에 갇혀 무력해진 표범의 모습에 주목한다. 이때 표범은 세계를 파악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상징한다.

박용화_차가운 집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24
박용화_차가운 도구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24
박용화_노출된 안식처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24
박용화_절벽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24

박용화의 동물원 연작은 「표범」과 마찬가지로 '동물원'이라는 공간의 본질과 그것이 인간 존재에 대해 갖는 시사점을 탐구한다. 이러한 유사성은 우리로 하여금 박용화의 동물원 연작을 회화의 형식을 취한 사물시 모음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릴케가 창살 속에 갇힌 동물의 무력감에 천착한다면, 박용화는 그러한 무력감에서 출발해 무력감을 야기하는 삶의 조건 자체로 우리의 초점을 이동시킨다. 무력감에 침잠하는 대신, 무력감의 본줄기를 차분히 되짚어 올라가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박용화는 동물원의 동물들이 거주하고 전시되는 공간의 가장 핵심적인 특성들을 절제하여 묘사하는 방식으로 삶의 공간적 조건으로서의 집에 관해 묻는다. 동물들이 삶을 영위하는 공간을 다룬다는 점에서, 박용화의 동물원 연작은 동물들의 '나름 갖춰진 집'과 그러한 집에 부속된 각종 도구들에 관한 연작이기도 하다.

박용화_죽어서도 틀에 박힌_캔버스에 유채_100×80.3cm_2024
박용화_놓여진 인공공_캔버스에 유채_45.5×45.5cm_2024
박용화_매달린 도구_캔버스에 유채_45.5×45.5cm_2024
박용화_자연과 인공의 교차_캔버스에 유채_45.5×45.5cm_2024

작품 속 '집'들은 한 쪽 이상의 면이 창살로 되어 있는 구조다. 창살은 역설적인 경계인데, 자유롭게 반대편으로 갈 수 없다는 점에서는 막혀 있지만, 한쪽의 시선이 끊임없이 다른 한쪽으로 침투한다는 점에서는 뚫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집의 이미지에는 끊임없이 외부의 시선에 노출되어야만 했던 작가 본인의 유목민적 생애가 투영되어 있다. 박용화는 과거 반지하에 거주하던 시기 창살 너머의 행인들에게 '관람당하는' 경험을 한 것을 계기로 동물원을 찾기 시작했고, 거주 공간이자 전시 공간인 동물들의 집으로부터 불안한 현대인의 초상을 추출해냈다. 캔버스를 가득 채우는 2차원의 창살, 관람객의 동선을 제한하는 3차원의 창살은, 우리 또한 이미 창살로 된 집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진실을 직감하게 한다. 창살의 안팎을 가늠하며 어느 하나에 정착하지 못한 채 전시함(displaying), 전시됨(displayed), 전시를 봄(seeing display) 사이를 오가는 동안, 편안하고 안정된 공간으로서의 집이라는 인식은 전복되고 낯설어진다.

박용화_필요한 도구1_캔버스에 유채_35×35cm_2024
박용화_필요한 도구2_캔버스에 유채_35×35cm_2024
박용화_필요한 도구3_캔버스에 유채_35×35cm_2024

창살 너머에 있는 '집'의 외부가 허락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라면, '집'의 내부는 외부에 "아무런 세계도 없는" 것처럼 느끼게 하기 위한 도구들로 꾸며진 가짜 세계다. 박용화는 자연을 모방한 인공 구조물, 야생성을 길들이기 위한 놀이 기구, 아늑한 공간에 대한 열망을 일시적으로 충족시켜주는 간이집 등을 창살 안쪽에 위치시키고, 그러한 도구들이 허황된 가상에 복무하고 있음을 고발한다. 이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보다 임시 변통의 미봉책, 개혁적인 변화보다 상태 유지가 선호되는 우리 사회의 관성과 맞물려 보편적인 공감을 자아낸다. 불안한 현대인을 위로하는 것은 대개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함, 지켜질 수 없는 약속, 한낮의 꿈과 같은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지나친 비관일까? 지나친 비관이건 아니건, 그러한 생각은 자연히 자라나 우리를 불안에 대한 불안, 즉 우리에게 주어진 불안이 앞으로도 해결되지 못한 상태로 지속되리라는 메타-불안에 빠뜨린다.

불안은 박용화의 작품들을 지배하는 정서다. 그것을 마주하는 것은 때때로 고통스럽고, 우리를 안절부절하지 못하게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박용화의 작품을 끝까지 마주해야 하는 이유는, 그러한 불편함을 직시해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심원한 통찰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박용화의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편안하고 안정된 공간으로서의 집이 결여되어 있음을, 그 부재가 우리의 존재 기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미국의 미학자 스머츠(Smuts, A)가 "고통스러운 예술의 가치는 우리가 무엇을 결여하고 있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해주는 데 있다"고 주장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어쩌면 이러한 깨달음이야말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다. 릴케는 동물의 무력감으로부터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읽어냄으로써, 박용화는 동물들의 집으로부터 인간 존재의 불안정성을 읽어냄으로써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으로 나아간다. ■ 이원빈

Vol.20241112d | 박용화展 / PARKYONGHWA / 朴龍和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