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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인천광역시_(재)인천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인천아트플랫폼 Incheon Art Platform 인천 중구 제물량로218번길 3 E1 전시장2 Tel. +82.(0)32.760.1000 www.inartplatform.kr
레퀴엠 포 노바디 Requiem for Nobody - 희미하고 은밀하게 서서히 조여오는 힘 ● 김동옥은 오늘날 우리 삶에 얽힌 방대한 힘들을 문제 삼고, 그것의 은밀하고 모호한 폭력의 결과로 발생한 재난, 재앙을 시각 이미지로 폭로해왔다. 뿌리가 뽑힌 채 링거 주사에 의존하여 생명을 연장하는 나무, 어지럽게 서로 뒤엉켜있는 멀티탭들과 그 사이 사이에 꽂혀있는 시든 장미, 플라스틱 물병이 가득 쌓인 쓰레기통 속에 스크린으로 희미하게 존재하는 나비, 물고기, 꿀벌 등의 이미지를 통해, 작가는 독성 물질의 축적, 늘어가는 온실가스 그리고 서식지 파괴로 인한 종 손실의 가속화와 같은 기후 재난과 재앙을 가시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이러한 기후 재난 문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더 심화되고 있지만, 그 피해와 영향력이 극적이지도 즉각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폭력으로 인식하기가 모호하다. 더디게 진행되는 데다 수 세대에 걸쳐 이루어지는 기후 재난은 재난의 특정 가해자와 피해자를 지목하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사건이라 여기기가 힘든(uneventful) 폭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 지점을 더욱 파고든다. 중요하지만 시급하지는 않은 것, 유야무야 되기 십상인 것, 기억에 남지 않거나 간과하는 것, 희미하고 은밀하게 서서히 조여오는 것들에 이 세계의 문제의 본질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전면으로 끌어내고자 한다.
인류세와 파국적 재현 ● 작가의 이러한 문제 의식은 폴 크루첸과 유진 스토머가 제안한 '인류세(Anthropocene)'라는 개념을 경유하고 있다. 폴과 유진은 2000년에 IGBP(International Geosphere Biosphere Programme)의 뉴스레터에 실린 짧은 기고문에서 이렇게 쓴다. "인간 행위가 지구와 대기에 미친 중요하고 점증하는 영향을 고려해보건대 (...) 지질학과 환경학에서 인류의 중심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참으로 적절하게 보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현재의 지질학적 시대를 '인류세'라 부를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 인류는 수천년 동안, 어쩌면 다가올 몇 백 만년 동안 주요한 지질학적 힘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인간 활동이 지구시스템을 변화시킬 정도로 강력한 '지질학적 힘'이 되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지질학적 전환 또는 역사적 체제(regime)의 교체가 아니라, 매우 심원하고 근본적인 변화로 우리의 일상적 지각의 차원을 넘어서는 시스템 수준의 변화다. 김동옥은 더 나아가 인류세를 부추긴 잠재적 공범들까지도 추적한다. 1990년대에 가속화된 터보자본주의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달이 큰 두 가지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생태 환경적 측면 뿐만 아니라, 긴축 조치, 구조 조정, 만연한 탈규제, 대규모 기업 합병, 빈부 격차의 심화 등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하고 황폐화하는 근본적 원인이 된다. 따라서 작가에게 인류세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환경의식이라거나 단순한 보존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인류 전체와 다수 생명체의 생태-존재론적 위급을 나타내는 파국적 사회환경주의 관점에 가깝다. 그리고 작가는 이번 개인전 『멸망 이후의 세상에서 평안을』에서 질문을 던진다. 파국의 상황에서 미술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세 개의 신작 「섬(The Island)」, 「불멍 물멍(Staring into the Fire, into the Water)」, 「폐허 속에서(What Bloom in the Ruin)」는 플라스틱 생수병, 3ds 애니메이션 영상, 전선으로 만들어진 꽃, 멀티탭, 콘크리트 벽돌 등을 활용한 설치 작업들이다. 플라스틱, 전기, 콘크리트 등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물성을 거칠게 그대로 노출한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생기가 없는 황량함을 자아내며, 파국적 풍경을 그려낸다. 작가에게 파국은 파국 그 자체여야 한다. 파국적 상황을 그 어떤 미적, 시각적 수사나 스펙터클로서 재현하는 일은 파국의 또 다른 조력이 될 뿐이다.
양가적 감각 ●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 파국의 황량함은 산사태, 쓰나미, 화산 분화와 같이 무엇인가 파괴되고 멸망하는 강렬한 재난의 이미지 보다는, 오히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고요하고 평온한 이미지가 불러오는 양가적 감각의 간극으로부터 발생한다. 「섬(The Island)」 은 고도의 인간 과밀화를 시사하는 초고층의 빌딩들이 잔잔한 물의 표면에 반사된 영상 이미지를 보여준다. 평온히 일렁이는 물의 표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평온함이 기이한 두려움의 감각으로 전이된다. 초고층의 빌딩은 물에 비친 것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물 속에 잠긴 것처럼 모호하고 불길하게 보인다. 또 더 긍정적인 미래를 약속하며, 열띤 생산과 효율의 성전인 초고층 빌딩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함과 적막함 때문에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장소, 버려진 곳, 혹은 완전히 빈 곳(void)과 같은 황량한 장소로 보이기도 한다. 모니터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플라스틱 생수병들은 일회용 플라스틱이 갖고있는 존재의 일시성, 근본적 취약성 등의 물성으로 평온함과 대조되며 불안한 불화와 간극을 고조시킨다. ● 작가는 「불멍 물멍(Staring into the Fire, into the Water)」에서 황량함과 평온함 사이의 발생하는 양가적 감각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영상은 물에 서서히 잠기며 쓰러져가는 메갈로폴리스의 이미지와 불에 서서히 타는 숲의 이미지 두 가지 파트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다. 물에 잠긴 고층 빌딩과 멈출 기세가 없는 비, 어떤 생명도 존재하지 않을 같은 숲과 그런 숲 마저 태워버리는 화재 등 영상의 이미지가 전달하는 시각적 정동은 상실감, 불안함과 황폐함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미지와 사운드의 무한 루프, 반복, 피드백은 보는 이로 하여금 황량함의 정동을 강조하기 보다는, 오히려 정반대로 일종의 정동적 마비 상태, 즉 시쳇말로 '멍'한 상태에 이르게 한다. 작가는 이 '멍'한 상태를 상실과 환멸 마저 상실된 파국의 이미지로 역설한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는 파국은 단순한 비관이나 우울에서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파국을 통해 파국을 넘어서려는 의지와 역량을 조직하는 정동을 작품을 통해 요청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폐허 속에서(What Bloom in the Ruin)」를 보자. 작가는 작품의 일부인 콘크리트 벽돌 위에 쿠션을 설치하여, 작품 안에 보는 이를 위치하도록 유도한다. 보는 이는 콘크리트 벽돌 잔해 사이에 뒤얽힌 수많은 멀티탭 위에 피어난 전선 꽃들과 뿌연 안개 속을 팔랑거리는 나비 영상 이미지와 나란히 파국의 행위자인 동시에 파국적 행위의 결과 일부가 된다. 「폐허 속에서(What Bloom in the Ruin)」 안에서 특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상은 파괴되고, 단지 한 지구적 존재, 즉 '생명'이라는 공통 기반이 드러난다. 따라서 김동옥 개인전 『멸망 이후의 세상에서 평안을』은 비가시적으로 은밀하게 작동하는 힘과 그로 인한 파국적 결과를 파국적 이미지로 맞대응하며, 복수의 생존은 상호 얽혀있고 의존되어 있다는 인식을 보편화하기를 희망한다. ■ 이채원
Vol.20241023c | 김동옥展 / KIMDONGOK / 金同玉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