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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 인천광역시_인천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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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숲에서 주체는 어긋날 것이다 ● '숲은 이상하다.' 이는 상태에 관한 명제일까. 의식에 관한 명제일까. 이상하다는 건 물론 이상하지 않음을 전제한다. 또는 이상하지 않았음을 전제한다. 이상하지 않은 숲이 이상하다는 것. 또는 이상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이상함을 전제하거나 이상할 것 없는 것이 이상하게 감각됨을 전제한다. 눈을 감고 숲에 한번 들어서 보자. 숲은 우리를 감쌀 것이다. 온갖 풍요로운 새소리와 향긋한 풀냄새, 선선한 바람과 초록색 물결이 펼쳐질 것이다. 이것은 숲에 관한 일반적인 이미지이자 그 경험의 이미지적 산출이다. 반면, 숲의 이미지를 재고하며 숲으로 나아가 보는 것 역시 가능할 것이다. 숲의 성스러운 타자성이 기괴하고 불쾌한 타자성의 감각으로 전이되었음을 상상해 보자. 바로 '이상한 숲'으로서 광경을. ● 인류세는 지구와 인류의 새로운 관계를 인지하는 개념이다. 인간-자연의 관계가 인간에게 되먹임되는 상황에서, 자연에 관한 인간의 영향을 재고해야 하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또는 인공물로 구성한 인간의 세계가 독립적이지 않으며, 자연과의 완전한 분리의 경계를 만들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김동옥 작가의 「이상한 숲」(2023)은 숲의 이미지를 해체한다. 나무의 뿌리를 흙에서 띄워 놓고, 초록색 잎의 자리 역시 나무의 줄기로부터 분리시킨다. 이는 나무의 단면을 해부해서 자연의 밀착된 상호 얽힘의 관계를 부정한다. 거기에는 인공적인 분류의 도식이 실제의 산출로 연장되는 힘이 자리한다. 그 힘은 무엇일까. 곧 자연이 찢겨 나오는 사태를 발생시키는.
「긴 선잠 The Long Nap」(2023)의 흐릿하거나 불투명한 대기 역시 의문을 남긴다. 어떤 것도 잡히거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 포착되는 것이 사물과의 불가능한 거리일 뿐이라는 것. 그 대기가 신체를 '감쌀 때' 의외로 아니 당연하게도 촉각적인 전이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이러한 체험이 일어나는 장소를 '이상한 숲'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보이지 않는 그곳에는 어떤 사물들이 자리할 것인가. 플라스틱 페트병―「그들의 자리」(2023)―은 견고하고도 투명한 양태를 가진다. 공산품은 그렇게 영원한 시간에서 회귀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를 벗어난다. '무시간성'의 차원에서, 때때로 '발견'된다. 또는 '발견'될 것이다. 쓰러진 쓰레기통은 꽤 직관적이다. 곁에 놓인 영상 속의 물고기와 벌, 나비는 그것과 동거한다. 자연이라는 영원함 속에 쓰레기는 순환하지 않는 고철의 틀에서 연장된다. 분해와 감축의 서사를 위반하며 자연으로 위장한다. ● 멀티탭들은 그 위장의 기술을 노출한다. 덩굴 식물이나 나무의 뿌리의 질긴 생명력에 비교적 정교하게 안착한다. 자연을 모방하면서 특유의 견고한 구조를 드러낸다. 고철과 플라스틱의 합리적이고 유기적인 조합이 전기 문명에 대한 접속의 열쇠라면, 어떤 복잡한 뒤섞임의 구성은 예측 불가능한 형식에 따른 표면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정리되지 않은 모습이다. 이는 의도적인 심미성이 아닌―적어도 그것은 시뮬레이션한 이미지와 지금의 고정된 이미지가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무한한 시간의 연속 아래의 어떤 법칙의 실현이다. ● 그것이 자연(의 법칙)과 자연적인 것―자연이라는 시뮬라크르―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배경으로서 곧 마치 하나의 피규어로서가 아닌 채 전면을 이룬다는 점에서, 그것은 실재의 이미지를 점유한다. 반면, 플러그에 꽂힌 시든 장미와 나뭇가지-전선―전선들을 꼬아 케이블 타이로 고정하고 가장 위쪽의 피복이 벗겨진 채 구리선을 노출한 구조―의 대비는 생각보다 크다. 곧 자연은 완연하게 죽음에 다가서지만, 죽어 있음의 사물은 완고한 생명력을 지닌다는 것.
그렇다면, 인공 사물의 세계는 인간이 없는 세계에서 자연을 대체할 수 있는가. 반면, 「긴 선잠」에서 자유의 여신상은 물에 잠겨 있다. 자연은 세계를 잠식했다. 그것은 미래인가. 작가는 "환경의 변화는 (인간의) 자유의 대가"라고 말한다. 자유는 무엇인가. 자연은 그 스스로 자유를 갖는가. 모든 생명력은 자유를 정신에 속한 하나의 축으로 구성하는가. 반면, 인간의 의식은 복합적이며 타자(성)의 개입에 의해 변화하게 마련이다. 반성의 의식, 지양을 통한 갱신은 자연에 관한 새로운 의식을 산출한다. 그러한 의식은 덜거덕거리며, 비약하거나 도약한다. ● 세계가 사라진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인간의 문명은, 나아가 인간의 본래적인 특성이 자연을 지배하려는 과정을 산출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문명의 확장은 자연의 이미지를 쉬이 잠식함으로써 자연을 영구히 은폐할 수 있는가―'아마 잠긴 자유의 여신상은 지구라는 행성 바깥 인류의 시점이기도 할 것이다.'. 그 대안으로서 자연의 영묘한 생명력, 이상한 것의 다른 의미를 현재의 시점에서 재업로드할 수 있는가. 여전히 숲의 경험이 잔존한다. 그래서 예술이 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잔존하는 경험에 재접지하기 또는 기이한 경험의 경로를 재발굴하는 것? 그렇다면 예술가는 미래의 목격자인가. 과거를 반성하는 이인가. 생명의 경이로움을 상찬하는 자인가. 폐허의 도시에서 낙관하는 자인가. ● 인공물은 매끈하게 물에 잠긴다. 인간이라는 기호가 소거된 현실에서, 자연의 자리를 차지하는 건 자연과 뒤섞이는 인공물이다. 자연은 실재인가. 그것은 파악 불가능한 사태인가. 그것의 힘과 인지의 영역은 다르다. 전자가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면 곧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라면, 후자는 자연과의 관계에서의 어떤 끈을, 어렴풋한 조건을 감각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힘과 인지, 둘은 다르지만, 실재는 최종 사태의 이미지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또는 그러한 이미지로 비약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틈을 단지 공백으로 두어서는 안 된다.
결국, 마지막 지구의 이미지는 불투명한 대기와 인공-자연의 세계의 앞에 있는가. 혹은 그 뒤에 있는가. SF의 서사는 다양하지만 어떤 공통된 흐름을 확보할 수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 공통적인 것은 다른 삶의 조건이 아니라, 결국 그 삶이 주는 우리의 달라진 의식을 향할 것이다, 다른 삶의 조건이 그 의식을 초과하거나 감추고 있을지라도. 곧 SF에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분기되는 건 현재를 읽어내는 한 방식에서 연유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디스토피아를 통해 현재의 인류가 가진 죄의식을 해소하고자 한다. 그것은 '갈등'을 가진 서사의 조건을 충족시킨다. 아마도 그러한 서사 속에서는, 더 간단해지지는 않는 과학 기술과 그로 인해 더 간편해지는 삶의 조건이 역설적으로 재난의 지구 서사와 겨우 평형을 맞추고 있는 중이다. ● 김동옥은 어떤 미래를 드러낸다, 뒤섞임으로부터 안정을―멀티탭이 이룬 질서―, 죽음으로부터 삶의 기억―죽은 장미와 전선-나무의 생명력―을, 불투명함으로부터 뚜렷함―대기와 생명체―을 제시하며. 곧 양태와 의식, 감각은 각각 대비 속에서 평형을 찾는다. 그것은 예술이라는 전제, 곧 심미적인 선택의 일환이지만, 작가는 설치를 통해 삶의 조건을 가변적으로 추출한다는 점에서 조금 더 미묘한 선택을 하고 있다고 하겠다. 곧 작가는 하나의 환경을 구성하거나 그 환경을 이미지화한다. 그것은 변화에 대한 인지적 조건을 위한 선택이다. ● 현실을 기반으로 두되 현실의 구멍을 조금 더 찢어내는 것. 상상할 수 있는 것이란 그런 것 아닐까. 상상을 통해 무한한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곧 안전한 삶의 영토를 확보하며 균열 없는 지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만이 빚을 수 있는 현실의 균열을 제시하는 역량을 지닌 상상. 예컨대 상상을 통해서 얻는 효과가 아니라 상상이 가진 곤궁함을 격파하려는 상상이 있지 않을까. 나아가 상상을 통하지 않고서 인지할 수 없는 것이 있지 않을까. 상상 불가능성으로서의 상상. 아포리아의 형상을 지닌 상상. 어쩌면 그러한 서사를 구성하는 것이 미래의 다른 버전을 이야기할 것이다. 아니 우리의 의식을 발견한, 그 미래의 의식 속에 위치시킬 것이다.
디스토피아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기, 또는 자연스러운 광경으로 현재화하기. 각각 「긴 선잠」과 「The Grass」(2023)는 그러한 양식 속에 양립한다. 그 사이에는 현재를 추출하는 「그들의 자리」가 자리한다. 거기에 놓인 플라스틱 쓰레기통과 생수 물병은 레디메이드로서, 「The Grass」가 이룬 인공-자연 또는 자연으로서의 인공이 되기 전의 모습이다. 「The City of Plenty」(2023)와 「The Grass」는 유사하지만, 「The City of Plenty」는 자연 방사된 멀티탭들과 함께 그 멀티탭이 실제 식물과 뒤엉킨 모습으로 표현된다. 여기에 똑같은 네 개의 영상 설치가 이뤄지는데, 영상 속의 돌아가는 장미는 심지어 크기도 같고 시차도 없이 제시된다. 가상의 생명체는 동일률에 기반을 둔 셈이다. 자연을 향하는 인공과 자연을 프로토타입으로 남기는 인공은 엄밀히 다르다. 전자가 현실의 토양을 만든다면, 후자는 존재할 수 없는 현실의 이상을 나타낸다. 자연은 동일률을 전복한다는 점에서, 같은 장미는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자연에 대한 유령적 아카이브일 것이다. ● 「이상한 숲」은 자연 방사된 멀티탭들처럼 자연을 대체하는 대신, 진공 안에 자연의 입체적 해부로서 자리한다. 「이상한 숲」은 엄밀하게는 자연이 더 이상 자연에 자리하지 않는 어떤 시기를 대입하게 한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흙과 나무뿌리, 마치 멀티탭들의 상호 얽힘으로도 재현되는 자연스러움의 한 법칙은 분리의 레이어들로 흩어진다. 「이상한 숲」은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분할된 생명의 영토를 재현하는데―곧 분할된 생명을 다시 종합하는 게 인류의 숙제가 될 것이다.―, 이는 「The City of Plenty」가 드러내는 동일률적 자연의 재현이 가진 미래의 시점에 상응한다. 그리고 이상한 숲의 진공은 「The City of Plenty」의 영상 속 텅 빈 배경으로서의 진공에 상응한다.
자연의 총체성을 인공-자연으로 대체함으로써, 그리고 자연을 분할, 해체 또는 박제함으로써 발생하는 건 자연과 유사하면서 그것으로부터/그것에서 갈라지는 다름이다. 곧 언캐니한 골짜기―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가 '이상한 숲'을 구성한다. 물에 잠긴 문명 역시 매우 매끄럽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것은 절망의 인류를 보여주기보다 자연으로 환원되는 지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차라리 그것과 거리를 발생하는 인류라는 차원에서 또 다른 행성 위에서의 인류의 삶을 상상하게 한다. SF 서사의 차원에서 등장하지 않는 인류는 사물―멀티탭―과 시뮬라크르―장미―와 시뮬레이션―물에 잠긴 자유의 여신상―을 통해 반영되고 또 예측되며 흐릿해진다. 결국, 존재가 없는 '이상한 숲'이 남는다. 그러니 이는 순순히 보는 이를 맞는다. 그 주체의 몫을 교란시키며 혼란스럽게 하는 가운데. ■ 김민관
Vol.20230913i | 김동옥展 / KIMDONGOK / 金同玉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