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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대화 / 2024_1006_일요일_04:00pm
주최 / 엠오지 (MOG) 주관 / 서울시 전문예술단체 엠오지(MOG) 협찬 / 한국제지
관람료 / 성인 10,000원 / 학생 8,000원 20인 이상 단체 2,000원 할인 7세 이하 무료(보호자 동반)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입장마감 / 4~12일_06:00pm / 13일_02:00pm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Hangaram Art Museum, Seoul Arts Center 서울 서초구 남부순환로 2406 (서초동 700번지) 3층 제5,6전시실 Tel. +82.(0)2.580.1300 www.sac.or.kr
홍명진 작가 당신의 비밀을 접하고 생각이 났던 사람은 J씨이다. ● J씨는 평생을 농부로 살다가 지금은 70세가 훌쩍 넘어서 할머니가 되어있다. J씨는 젊은 날 남편의 실수로 인해 시골로 들어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생존의 그늘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중1 아들과 초등학생 아들 둘에 딸 하나, 4남매 그들의 생존까지도 책임져야 하는 어미였기 때문이다. J씨와 그의 남편 K씨는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본인 처지의 엄청난 투자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주변 사람의 핵심에는 다름 아닌 남편인 K씨의 형이었다. 그의 형은 월남전을 거쳐 사우디로 그리고 아메리칸드림을 위해 미국에서 노동자로 열심히 살고 있어 기회가 된다면 동생을 불러들여서 동생이 더 나은 삶을 영위하도록 조언하였을 것이다. 시대는 1986년 대한민국은 88년 올림픽을 앞두고 대대적인 정비를 준비하는 국가 존치의 강압적 개혁이 시작되던 시기였던 것 같다. 하지만 남쪽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은 시간의 변화가 매우 더딘 곳이었다. 국가의 위상이 없던 시대에 미국으로 가는 건 많은 편법과 여러 방법이 필요했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J씨는 남편을 미국으로 보내기 위해 가지고 있던 돈과 주변인들을 설득하여 무리하게 돈을 빌려 브로커를 통해 비자를 만들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남편인 K씨를 미국으로 출국시켰다. 이러한 방법은 모두 미국에 있는 K씨의 형이 알려주어 진행하였다. 그러나 남편인 K씨가 불법 체류자로 공항에서 바로 체포되어 1년 가까이 유치장과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모든 것을 걸었던 J씨는 혼란으로 가득했을 것이고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남편을 한국으로 다시 데려와야 하는 상황이 절실했다. 수소문 끝에 보석금을 주고 다시 한국으로 추방하는 방법을 찾았으나, 당장 바로 해결할 수가 없었다. 가진 돈이 없었고 방법이라고는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 K씨가 보석금을 해결하면 그나마 나올 수가 있는 상황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시골에 모시는 노부모는 가난했고 의지할 곳이 없어 J씨는 미국에 있는 그의 형에게 사정하여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부탁은 그의 가족의 반대로 거절당했고 남편인 K씨는 꼬박 1년 가까이 불법 체류자로 잡혀있었다.
그 이후에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J씨의 남편이 잘못되었다는 소식이 주변인들에게 알려져 빌려주었던 돈을 당장 돌려달라는 거였다. 빚 독촉이 시작되었고 주변인들의 멸시와 협박으로 J씨는 더 고립되고 패배감으로 엄청난 외로움을 견디어 내야 했을 것이다. J씨에게 당장에 주어진 환경은 자식 4명의 생존과 어쩔 수 없이 시골로 들어와 모시게 된 2명의 노부모의 생존까지 그리고 미국에 잡혀있는 남편의 문제, 주변인들의 빚을 갚아야 하는 상황, J씨는 암흑에 갇힌 마음 이상이었을 것이다. 미국으로 오라고 했던 남편의 형제에게 배신당하는 기분이었을 것이고 가족에 대한 믿음 또한 큰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누구나 삶에 희로애락이 없지는 않겠지만 문제가 터졌을 땐 해결 능력은 각자 다를 것이다. 심신이 약하거나 갑작스러운 스트레스로 인해 삶이 망가지는 경우도 종종 일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다행히도 J씨는 강인함을 선택하였고 그로 인해 그의 모습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J씨와 K씨는 연애결혼을 하였다. 1970년대 그래도 꽤 낭만적인 만남인 듯하다. 둘은 많이 사랑했고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1년이 다 되어서야 남편은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그의 모습은 산에서 10년을 지낸 사람처럼 다 헤진 옷차림과 머리와 수염은 정리하지 않아 노숙자 같았다. 붙잡혀 있던 시간을 그의 행색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J씨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고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였다. 이전 문제에 더불어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고 또 다른 문제가 터졌다.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매일 같이 술에 취해 있었고 없는 살림에 도박과 다툼, J씨는 이 상황에 어떠한 생각과 마음이었을까? 차마 물어보지는 못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그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삶을 놔버린 듯이 한 남편과 6명 가족의 생존을 책임져야 했던 J씨의 삶.
도덕적 가치와 죄의식의 기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는 덕목이라고 생각하지만, 객관적 지표로 규정을 짓기에는 모든 이들의 삶이 너무도 다양하다. J씨는 가족의 생존과 빚을 갚기 위해 닥치는 대로 많은 일을 했다. 대표적인 일이 꿀을 판매하는 거였다. 80년대 중반에는 양봉 기술이 부족했던 시대라 벌꿀이 아주 많이 귀했다고 한다. 아주 넉넉한 사람들이나 먹던 고급스러운 음식 중의 하나였다고 J씨는 털어놓았다. 그 시절 판매되었던 꿀은 모두 가짜였다고 한다. 물엿이 70% 꿀이 30% 정도였다고 한다. 귀한 만큼 고액의 소득이었기에 양심과 도덕심은 생존 앞에 그저 무기력할 뿐이었다. 이러한 꿀을 팔아서 가족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고 서울에 잘 사는 곳만 찾아다니며 상술을 펼쳤고 문전박대를 당하고 노숙하기도 하였다고 그녀는 비밀스럽게 이야기하여놓았다.
J씨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자식들을 키우고 한 가정을 유지했으며 모시던 노부모도 다 떠나보냈다. 그녀 또한 이제는 나이가 들어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정기적인 검사를 위해 1년에 꼭 한번은 서울에 있는 삼성병원에 올라와야 했다. 그나마 자식 가운데 서울로 공부시켰던 자식이 있어 그녀는 정기 검진이 있을 때면 그 자식 집에서 자고 가곤 하였다. 병원에서 혹이 커지지 않으면 이제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J씨는 마지막 검사를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그의 자식은 노모가 된 어미를 모시고 병원 검사를 받고 집으로 와 어미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어미는 자신의 인생이 처량하였는지 그날은 자식이 잠들려고 해도 잠을 자지도 않고 동이 트도록 끊임없이 이야기를 내놓았다. 본인 칠십 평생 인생의 이야기를 자식이 들어 주길 간절히 바라듯이 말이다. 그렇게 본인이 제일 아팠던 인생 이야기를 서른 중반이 된 셋째 아들놈에 털어놓았다. J씨는 공부하는 셋째 아들놈 빼고 나머지 자식들은 일찍 결혼시켰다. 그에게는 8명의 손자와 손녀가 있다. 나름 겉으로 보기에는 대가족을 이룬 멋진 어머니의 상처럼 보인다. 어느 날 J씨는 장가보낸 큰 아들놈이 자식을 두고 있는데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장남이라 가슴이 더 아팠을 것이다. 큰 가정에 균형이 깨졌다. 어미는 또 다른 자식들을 위해 그 균형의 틀에 자신을 희생하여 최대한 메웠다. 자식에게 미안함과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탄식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평화로움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건 균형이 잘 유지되는 환경의 시점이 오기 전까지는 가치를 잊고 지내는 것 같다. J씨의 인생이 너무도 안쓰럽고 특별해 보이긴 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내놓지 않으면 아무도 몰랐을 그의 인생이 평범했던 어미의 모습이었다.
상처 입은 자들 '즉' 재난과 참사를 겪고 남은 자들이 슬픔 속에 갇혀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어찌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앞서 J씨의 이야기를 언급했듯이 부모들은 모든 행복을 가정에서 찾고자 한다. 그렇기에 내 가족을 위해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에도 본인을 희생하며 자식을 사랑했을 것이다. 재난을 겪은 가족들 또한 J씨의 삶과 다르지 않게 자식에 대한 사랑이 전부였을 것이다. J씨의 삶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재난을 겪은 가족들 또한 그런 삶을 살아가며 내 가정의 행복을 염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자식을 잃어야 했던 어미의 마음은 슬픔과 아픔으로는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 있었던 비극적 참사가 다른 사람의 편향된 시선과 조롱, 혐오로 인해 트라우마에 갇혀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생존자의 죄책감(survivor's guilt) 등 더 큰 상처를 입지 않고 아픔을 감춰야 하는 당신의 비밀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 김상현
Vol.20241004f | 김상현展 / KIMSANGHYUN / 金尙鉉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