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231024f | 선무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24_0920_금요일_05:00pm
후원 / 남북통합문화센터_남북하나재단_평화예술교류협회_네오룩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포지션 민 제주 Position Min Jeju 제주도 제주시 관덕로6길 17 (삼도이동 108-16번지) 2층 @pominje
스며들기보다 드러내기 ● 선무의 작품은 소위 '선전화풍'이 주를 이룬다. 남한에서는 북한의 선전화란 예술의 순수성(?)을 벗어난 최고 존엄을 위한 우상화와 정치적 목적을 담은 불순한 예술이라고 평가된다. 비예술의 가치 평가이자 또 다른 낙인이기도 하다. 작가는 탈북 이후 남한에 정착하면서 H대에서 학사,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런 만큼 그는 적어도 남한에서 통용되고 있는 예술의 형식과 사조는 이미 꿰뚫고 있다는 말이며, 소위 발전한 자본주의 예술의 세계를 웬만큼은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는 이미 탈북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대표적인 직관 선동의 선전화풍을 자기 작품의 형식으로 가져가고 있다. 어쩌면 자기 손에 가장 익은 스타일이기에 손쉽게 이 방법을 택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작가가 이 선전화풍을 의식적으로 차용하는 것은 남한 사회에서의 자신의 정체성 확보와 관련이 깊다고 생각된다. 그 정체성은 남한 사회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끊임없는 질문과 연동되어 있다. 그것은 '섞이기보다는 섞일 필요가 없는 상태'를 꿈꾸는 작가의 존재의식이기도 한 것이다. 남북이 대치한 상황에서는 남한 사회도 이 세상의 온전한 답은 아닌 것이다. 탈피, 탈색을 통한 착한 탈북 주민으로 남한 사회의 안정된 정착 또는 상업 화단의 성공한 예술가로 살기보다는 '선'을 지우는 적극적인 작업을 통해 남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상향-통일된 나라를 꿈꾸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남한 사회에서는 이미 쓸모없어진, 인민의 정서적 고양 수단이었던 북의 선전화의 양식을 차용해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행위는 자신의 태생지에서 배태한 조형 양식을 차용해 남한 사회에서는 이질적인 브레히트의 '소격효과(疏隔效果)-낯설게 하기' 같은 것을 노린 예술적 전략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스며들기보다는 드러내기 전략을 택한 것이다. ● 북한 체제를 버리고 남한을 택한 그였기에, 탈출하고 싶었던 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대중 선전매체였던, 어쩌면 신물 나게 그려댔을 그 선전화를 택했다는 것은 일면 자기모순적인 선택으로 보일 수 있다. 자신이 버리고 온 사회의 낡은 미디어를, 그것도 적극적으로 차용해 자신의 목소리를 담는다니? 남한 화단에서 비예술적이고 불순한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평가가 끝난, 낡고 낯선 미디어를 기반으로 작업하겠다는 의지는 그가 자신의 이명을 '선무'로 작명하는 순간 세워졌으리라. 그 의지는 비루하게 남한 사회에 스며들어 성공을 꿈꾸기보다는 탈북, 탈 체제할 수밖에 남북 분단의 현실을 바꾸는데 일조하고자 하는, 자신만의 예술의 길을 가겠다는 자기 선언인 것이다.
그는 선전화풍을 차용했지만, 그의 선전화(?)는 통일과 평화를 선전한다. 선을 지우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일이 바로 평화와 통일이기 때문이다. 총칼로 지우고자 했던 선은 결국 더 깊고 깊은 선을 민족의 강토에 새겼다. 결국 다른 방식의 '선무 프로젝트'가 필요한 것이다. 작가 선무는 평화와 통일을 그려냄으로 해서 이 완강한 선을 지우고자 한다. 그의 붓질은 그 선이 지배하는 고착화된 질서에 대한 저항이다. 그의 선전화는 이제 더 이상 최고 존엄이나 생업 현장의 생산력을 고취하기 위한 체제 선전에 유용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 북한 울타리 밖에서는 낯설기만 한 그의 선전화풍 그림들은 오히려 웃프거나 슬픈, 남북 분단 현실을 비틀거나, 비판하거나 또는 평화의 염원을 그려내는 미디어로서 새로운 기능과 가치를 부여받는다. 선북(線北)의 미디어가 선남(線南)의 또는 그 둘 다 아닌 선 밖의 미디어로 거듭난 셈이다.
제주 체류 그리고 작업 ● 그는 20여 년 전 압록강을 헤엄쳐 북극성을 보면서 걷고 걸어 소위 '탈북'을 감행했다. 그리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남한 사회에 들어와 대학 생활을 마친 후 화가의 길을 걷고 있는 대한민국의 예술가이자 소위 '탈북' 꼬리표가 늘 붙는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 그가 국토 최남단 제주도에 잠시 머물렀다. 그가 태어났던 황해도 산골에선 구경 한번 못해 본 바다. 그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 섬. 서부지역 중산간 마을 산양리에 있는 '예술곶 산양' 레지던시 작가로 1년 남짓을 체류하면서 작업에 매달렸다. 그에게 제주는 생경한 곳일 수밖에 없다. 하늘·땅·바다·바람·공기 어느 것 하나 그가 나고 자란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곳에서 맘껏 바다에 발을 담그고 산을 올라보고 4·3 유적지도 다니고 한라산 소주도 마시면서 작업에 매달린 것이다. 그에게 제주에서의 작업은 어떤 의미일까? 그가 제주 생활을 통해 그려낸 작품들은 어떤 것들일까?
그가 제주에서 그려 낸 작품들은 대충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그간의 작업에서도 단골로 등장하던 선전 포스터화로 담배를 물고 있는 북한의 교복 입은 청소년을 그린 「너도 해봐」로 금기를 넘어선 도발을 말한다. 문화충격의 경험을, 최루탄을 맞은 이한열 열사의 이미지를 차용해 남북의 문제로 확장, 재해석한 「온 사회에」, '분단'이라는 텍스트 앞으로 주먹을 불끈 쥔 북한의 여학생을 그린 「이거나 먹어라」를 통해 분단이라는 체제에 빅 엿을 먹인다. 닫힌 세계를 상징하는 어항 속에 이데올로기의 빨간 액체가 생명수일 수밖에 없는 튤립을 그린 「먹어야 산다」, 한라산 소주와 백두산주를 섞어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자는 위트 섞인 「한 잔 하자」 등으로 중의적인 비틀기의 텍스트와 이미지가 결합된 작품들로 체제 비판적인 시각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 두 번째 갈래는 제주의 장소성을 살린 회화성 높은 작품들로 한림여중생들과 수학여행 온 북한의 여중생들이 협재 해수욕장에서 깔깔거리며 뛰어노는 모습을 그린 「수학려행」, 예술곶 산양의 운동장가에 가득 핀 소국을 보고 그렸다는 남과 북의 아이들이 뛰어노는 「좋아」, 4·3 당시 전투 중 사망한 채 버려진 무장대 전사들의 이름 모를 묘역인 '송령이골' 답사 당시의 느낌을 그린 「리념사냥(제주도)」은 북한만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제주 섬에서도 이념의 비극에 공감을 표한 작품이다. 멀리 성산 일출봉이 보이는 표선 백사장 풍경인 「성산일출봉」(그림 하단부의 검정현무암은 해골의 형상을 하고 있다.)은 예술곶 산양 동네 아줌마의 4·3 당시 이야기를 듣고 그렸다고 한다. 「려명(제주도)」은 송악산, 산방산, 한라산의 풍경이 한 화면에 포착된 모슬포 풍경을 담은 것으로, 슬픈 4·3의 역사를 딛고 새로운 시대를 염원하는 작품이다. 「동백」 역시 4·3의 상징꽃인 동백이 뒤틀리고 상처받으면서도 끝내는 꽃을 피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세 번째 갈래는 DMZ를 방문했을 때의 느낌을 그린 「고향 가는 길」, 어린 시절 '조선소년단'에 입단하기 위해 충성 선언을 하던 자화상인 「입단선서」, 빗속에 빨간 우산을 들고 밝은 표정을 짓는 북한의 어린 소녀를 그린 「빨간 우산」, 달이 뜬 밤하늘 아래 풋풋한 사춘기 소년소녀가 살갑게 손을 잡고 걸어가던 추억을 담은 「달밤」, 살구꽃이 눈송이처럼 화면 가득 날리는 유모차를 끄는 엄마와 아이의 모습을 그린 「봄바람」, 폭풍우를 뚫고 꿋꿋하게 걸어가는 자신의 뒷모습을 그린 「찢어진 우산」은 미래를 향한 다짐과 자신에게 주는 격려가 담겨 있듯, 주로 작가 자신의 개인적 서사를 담고 있는 작품들이다. ● 첫 갈래는 선전화풍의 포스터 형식을 빌린 것으로, 주로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대비를 통한 현실 비틀기가 주로 이루어진다. 두 번째 갈래의 작품들은 주로 제주 체류의 경험을 담은 것으로 제주 섬의 풍경과 4·3과 관련된 작업들이 주를 이룬다. 그에게는 체류 기간 중 4·3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갈래는 자신의 과거로부터도착한 서신 같은, 또는 기억의 우물에서 건져낸 생의 편린으로 남은 경험과 당시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이번에 그가 제주의 화산석인 현무암을 다듬어 화병처럼 만든 조각이나, DMZ에서 주워 온 오래된 가시철조망에 동백과 진달래를 표현한 작품들은 제주에 체류했기에 얻은 작품들로 작가의 표현영역을 넓히는데 일조하고 있다. ● 여전히 선을 지우고자 하는 그의 작업은 이 섬에서라고 다를 바 없다. 선이 존재하는 한 그는 어디서나 부유하는 경계인이기 때문이다. 그의 화업에 있어서나, 일생에 있어서나 찾아올 평온은 아직도 끝 모를 험난한 여정을 남기고 있다. 찢어진 우산을 들고 폭풍우 속으로 맞바람을 맞아가며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현재 그의 모습일 것이다. 나는 그가 더 낯선 제주에서 자기보다 앞서 '선'을 지우려다, 치도곤을 당하고 여전히 그 후유증을 겪고 있는 제주 섬사람들. 그들이 죽음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제주의 역사와 그 역사가 스미어 슬프나 아름다운 섬을 온전히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 박경훈
이데올로기 ● 저 푸른 하늘 떠가는 흰구름을 바라보느라니 문득 그리움이 사무친다. 저기 북녘 나의 어머니는 안녕하신지 나의 형제들은 안녕하신지 알 수가 없다. 그저 하늘에 대고 두손 모아 빌고 빈다. ● 나에게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나 자신은 오직 장군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교육되어지고 그것은 당연한 세상의 리치라고 알고 자랐다. 그것은 나의 부모형제들보다도 더 위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두만강을 건너 바깥 세상과 부딪치며 세상을 알아가면서 느끼는 것, 그동안 내가 믿었던 그 믿음에 대한 허무함과 나의 존재에 대한 보잘것 없는 초라함이었다. 이데올로기는 총명하게 태여난 나를 바보 멍충이로 만들어 버렸다. ● 우리에게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국토분단이었고 동족끼리 죽음의 전쟁이었으며 이념 대결로 가슴 아픈 상처를 낳았고 수많은 생명들이 정치권력의 리익을 위해 희생양으로 억울하게 사라져갔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제 정신 아닌 허수아비로 만든다는 것이다. 자신이 그 어떤 리익 집단의 허수아비로 산다는 것을 모르고 세상 산다는 것은 인생에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데올로기는 분단 한 세기가 다가오도록 남북의 인민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고 지금도 안겨주고 있다.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고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고 발이 있어도 갈 수가 없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없게 하는 것이 이데올로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 결국 이데올로기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 없는 것이다. 나는 이제 그것 넘어서 화목하게 사는 남과 북의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작품으로 표현해 본다. ● 전시 『이데올로기』를 준비하면서 몇자 적어본다. ■ 선무_제주 산양에서 2024.8.15
Vol.20240920b | 선무展 / SUNMU / 線無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