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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철 홈페이지_www.euncheol-choi.com 인스타그램_@kuenstler_euncheol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강릉시 주최,주관 / 대추무파인아트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대추무파인아트 Daechumoo Fine Art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소목길 18-21 Tel. +82.(0)33.642.6708 www.daechumoo.com @daechumoo
최은철의 거짓 유물과 불멸의 터, 회절하는 시간 ● 여러모로 최은철은 참 바지런한 이다. 한결같은 바지런함이, 지나친 분주함으로 흩어지지 않고 산뜻하다는 점, 그 산뜻함이 인류의 물질문화와 정신사에 대한 호기심으로부터 건져 올린 것들을 적절히 증류하고 연마하여 얻어낸 무게라는 점이 특별하다. 문화사적 상징이 풍부한 재료의 선택과 정성스러운 만듦새, 환경에 조응하는 설치방식의 유연함은 최은철의 작업을 설명할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이다. 작가 연구로부터 출발한 작업들은 시간의 경과 속에서 탈각 시켜야 할 것들과 남겨야 할 것들을 분별하고 벼리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 한편, 여전히 작업에 관한 자기 표명과 비평적 서술에 있어 더욱 또렷한 관점과 입체적 해제가 요구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최은철의 작업이 오늘날 시각 예술가가 역사적 주제를 연구하고 예술적인 방식으로 변용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기 마련인 미적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예제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술 작업에 기대하는 바가 진실을 촉구하거나 관람객을 계몽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은 작업의 자유도를 한껏 높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술적 연구의 특이성을 입증해야 할 과제를 주기도 한다.
최은철의 작업 또한 예외는 아니다. 오래전 사라진 것들과 머지않아 사라질 것들을 동시 감각하는 작가의 비선형적 시간성과 문명 비판적 사유는 지금까지의 작업을 견인해 온 일관된 태도였다. 그러나 전시가 지나간 자리에 다양한 질문과 새로운 해결 과제가 남는다. 실존했던 사물을 가공의 유물로 재현하려는 작가적 노력이 오래전 망실된 것들의 흔적을 더듬으며 가상의 원본에 다가가려는 고고학적 입장과 다를 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설명되고 방어되어야 하는 것일까? 작가에게 허용되는 문학적 상상력이 관객들에게 되돌아오는 반향점은 어떤 것일까? 필경 쉽지 않은 질문거리고, 단편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 존재의 생성과 소멸에 관여하는 온갖 연구와 실행의 영역에서 역사적 상상력과 윤리 의식의 총량이 같을 수 없겠지만, 시각 예술가라고 해서 특별한 면죄부를 받거나 더 높은 평가를 받을 근거가 될 수는 없으니 말이다. ● 이러한 예민함 속에서 작업을 이어가는 일은 가장 그 다운 발화 방식과 조형 양식을 정립해 나가는 고단한 여정이다. 그런 점에서, 올해의 전시 《.다않는 지오 는래고》는 '유물' (통칭하여 말하자면) 연작의 절정을 지나고 있는 동시에, 이전의 작업과는 거리를 두며 또 다른 방향으로 우회하고자 하는 작가의 욕망이 새 나오는 것 같다. 암호 살피듯 의도를 가늠해야 하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제목으로부터 관람객은 각자의 시선을 좌우로 역전시키며 전시 앞에 선다. 좌우, 상하로 뒤집힌 것들에 대한 추적은 물리적 잔존을 거슬러 가는 역-상상인데, 최은철의 전시에서 이항대립적 요소의 물리적 대비는 풍부한 해석과 반어적 이해를 유도하는 장치이다. 뒤집힌 제목, '고래는 오지 않는다.' 로부터 다양한 반전과 역설을 예비해야 하는 까닭이다.
이번 전시에 앞서, 중요한 참조점이라 할 수 있는 《황야의 도주》(2023)를 잠시 떠올려본다. 최은철은 근작에서 현대 물질문명 속에 잔존하는 과거 유물로부터 현대인의 정서적 황폐와 발전의 공허를 역설적으로 반추하고, '오늘날'이라는 시공이 얼마나 허약한 개념인지를 소격화 된 유물의 연출로써 드러낸 바 있다. 직접 언급된 적은 없지만, 1927년에 발표된 헤세의 소설 『황야의 이리』 속 주인공처럼 물질문명과 불화하는 인간 풍경을 사람이 소거된 전시 풍경으로부터 떠올린 바 있다. 도시건설을 위해 수 천 년간 인류가 시도해왔던 것이 "황야로부터의(from) 도주"였다면, "황야를 향한(toward) 도주"가 의미하는 바는 반-문명으로의 도주 (불)가능성에 대한 자조적 진단인 동시에 그럼에도 脫역사적 시선으로, 혹은 반 문명인의 감각으로 세계의 질주를 감속시킬 당위에 대한 검토일 것으로 이해해 본다. ● '도주'의 태도는 때로 인간중심의 역사개념에 대한 배격으로, 반 행성적 사고가 몰고 온 인류세에 대한 경고로, 정신성이 실종된 사회에 대한 두려움으로 표출된다. ● 2024년 가을. 또 한 번의 도주다. 어느 때보다 드넓은 시간차를 거스르며 새로운 이야기가 재개된 곳은 강릉이다. 서울에서 꼬박 세 시간을 차로 달려, 강원도 강릉시 남항진의 바닷가에 이르면 한송사'지', 즉 절터로만 남은 폐사지가 있다. 창간과 폐사 연도가 정확하지 않은 가운데, 설화처럼 떠도는 옛 이야기와, 조선시대 이곡이 지은 동유기(東遊記)라는 책에 잠깐 언급된 기록만이 짧게 있을 뿐이다. 신라시대에 융성했다던 절은 고려와 조선을 지나 일제강점과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유물의 소실과 재회를 거듭하며 한 줌 이야기로 남게 되었다. 사람도, 건축도 모두 스러진 자리에 끝내 살아남은 단 두 점의 문화재1)만이 그것이 진실임을 입증할 강력한 알리바이가 되었다. 어찌하여 사라진 절 이야기가 최은철에게 당도했고, 무엇이 그의 주의를 붙들었으며, 어떻게 사라진 기억과 기록이 그의 손을 타고 한날한시 전시라는 시공 안으로 소환되었는지 알 것도 같다. 그 또한 언젠가 기억 속에서 각색되고 사라져, 한 줌 에피소드로 남겠지만, 작가의 의도 안에 전시로써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한 것, 또렷하게 기억할 수 없는 것, 영영 알 수 없는 것들을 파헤쳐 명료하게 재현할 뜻이 있는 것은 아닐 거라 짐작된다. 불변하는 자리 위에서 한송사가 이름 뿐인 터가 된 것처럼, 전시 역시 불변하는 터 위에서 일어난 물리적 망실과 기억의 공백, 그 사이를 매개하는 시간의 회절(回折)2)을 좇는 또 하나의 '터'인 셈이다.
시간과 공간, 기억이 정교하게 짜맞출 도리가 없으므로 전시는 더욱 엉뚱하게 흐르고, 자유롭게 증언할 심산인 듯하다. 그러니, 전시라는 이름의 임의적 공간을 들여다보며 각각의 작업을 명명한 작가의 의도와 전시의 수사를 되짚어 보아야 할 것 같다. ● 최은철이 한송사지 이야기를 접하면서 강력하게 공명한 지점은 앞서 언급한 바처럼 터의 끈질긴 생명력과 존재의 회복성일 것으로 짐작된다. 디테일이 부족한 이야기의 허점은 상상력이 투입되고 빠져나올 수 있는 기공을 마련하고, 그 틈으로 새로운 것들을 축조하고 살을 붙여볼 만한 여지를 남긴다. 전시가 촉발된 지점이라 할 수 있는 작업 「역사적이지 않은 유물」 한송사지 좌우협시보살좌상의 쌍을 이루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조각적으로 재현한 작업이다. 사라지고 흩어졌다 귀환하는 유물의 역동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레플리카(replica)를 제작해 냈고 이로써 원본과 가본의 틈새를 명확하게 하였다. '역사적이지 않은' 유물이라 명명한 것은 겸허함의 표현인 것일까? 아마 그보다는 '역사' 개념의 불투명을 드러내는 방식이자, 자기방어의 일환일 수도 있다. 도처에 역사적이지 않은 것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협의의 '역사'란 후속세대들이 부여한 제도적 위계와 선별법일 것이다.
설탕을 재료로 사용한 「흘러내리는 유물들」은 어떠한가? 세월의 질곡을 정면으로 맞은 듯한 조각의 질료와 파편적 형상, 물리적 컨디션은 여지없이 풍부한 상징과 역설적 함의를 갖는다. 밀폐된 보존실에 영구 봉인될 것이 아니라면 어떤 유물도 산화와 부식을 피할 수 없다. 그 어떤 재료와 방법을 쓴다 해도 전시 이전의 제작 시간, 전시 이후의 이동 경로 안에서도 끊임없이 변패하며, 기어이 소멸된다. 그러나 흘러내리는 것이 어디 그뿐이랴. 일상의 비루함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자리 위에 인류의 보물과 역사 속 유물을 정성스레 올려놓는다고 한들, 그것이 변치 않을 도리는 없을 것이다. ● 그럼에도, 최은철의 생각과 움직임이 마지막으로 당도한 그곳이 양자 물리학의 불가해한 진실도, 세상 만물의 상대적 공리를 전하는 동양철학의 깨우침도,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을 추념하는 예술가의 노스탤지어도 아닐 것임을 믿는다. 오히려 도래하지 않을 어떤 존재에 투영하는 실낱같은 즐거움과 미련한 희망에 가까움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고래"는 세계의 허상을 의심하면서도 이 세계의 물질로서 현존하는 대상을 만들어 나가는 작가의 실천 방식과 급변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도시인으로서 최은철이 허무를 양가적으로 투영하는 실존적 수사이다. 따라서 전시 소개 글에서 고래를 "아직 도래하지 않은 부처를 기다리는 희망"의 상징으로 서술한 구절은 그 자체로는 모순을 피했지만, 《.다않는 지오 는래고》로 명명된 전시의 표제로부터 결국 희망이 오지 않는다로 등치되는 순간, 또 한 번 혼선을 준다. 그러나 기실 고래는 그 무엇으로도 치환됨 직하다. 부처이자, 예수이자, 시간이자 물질이다. 또한 과거의 미래이자, 미래의 미래다. 결국, 고래의 의미와 고래가 오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어떻게 이해할지는 보는 이의 관심사와 현실 상황에 달려 있다. 마치, "다는않 지오 는래고"로 쓰여 있어야만 순차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거울 너머의 별다른 존재가 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누군가는 최은철의 문장을 순정한 의미로 받아들일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주어진 바를 거꾸로 뒤집어 희망의 메시지로 수신할 것이다.
역전의 구조는 작업의 면면에서도 드러난다. 한송사 사찰의 일주문을 재해석한 「난류문」는 거대한 해일 속에서 뒤집힌 절의 지붕과 이를 감싼 지층을 보여준다. 자연사적인 상식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지층의 융기와 역전 현상을 문명의 상징인 종교 건축의 예시로써 만나게 되는 일은 불편하지만, 가능 세계의 진실이다. 해일 속에서 사라진 절의 역사를 떠올리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이번 전시와 동명의 제목을 붙인 영상 작업 「고래는 오지 않는다」는 유동하는 물의 이미지와 순환 구조를 담고 있다. 7분 30초가량의 영상은, 한송사가 바닷물 속에서 사라지고 다시 떠오르는 순차적 흐름을 담고 있지만, 영상의 루프 속에서 시작과 끝을 연결하여 감상하도록 되어 있다. 한순간 일렁이는 물결 위에서 반짝이며 드러난 절의 이미지는 물질세계의 유한함을 더욱 처연하게 상기시키지만, 그로써 세계가 절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어지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바이기도 하다. ● 전시장 상층부에서 최은철은 다시금 보편 세계의 현실로 돌아오며 작품의 경계를 넓힌다. 「신유적캐슬」과 「황야의 Wanted」는 기존 작의 연작선상에서 현대 사회의 파괴적 풍경에 대한 직설적 묘사와 은유를 교차하며 펼쳐낸 작업들이다. 작품이 증거하는 것처럼 우리는 오래된 역사를 간직한 도시에서 빈번하게 발굴되는 과거의 사물들과 문화재로 승격화된 제도적 유물, 시각적 진귀함과 인테리어로 소비되는 앤틱과 빈티지, 그리고 쓰레기처럼 폐기되는 유사 유물이 혼재된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모든 것을 시차 없이 뒤섞어버리고, 가치의 위계를 전복시키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의 논리이며, 소유와 소비에 대한 사람들의 학습된 욕구일 것이다. 최은철에 의해 재구성된 유물들은 역사성을 상실하고 장식적 상품으로 전락한 과거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역사라는 이름을 걸친 모조적 풍경을 발굴하고 기록하는 일로부터 가공의 역사를 상상하고 서사를 채워 넣는 작업 사이의 거리를, 최은철의 일상으로부터 다시 재단해 본다.
시간의 감각을 몇 년 단위에서 다시 몇 백, 몇 천 단위로 늘려가다 보면 단순한 깨달음이 온다. 모든 것이 매 순간 존재하지만 동시에 매 순간 소멸하고, 문명의 단위를 구분 짓는, 찬란한 유물과 세속의 잡스러운 것 사이의 차이 또한 무의미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건축적 입면을 구성하거나, 가마 속에서 한순간에 녹아들며 흐물텅한 점액이 되었다가, 이내 차가운 공기와 만나 경화된 도자가 된 최은철의 설탕 작업을 떠올릴 때면, "원자는 원자이고, 원자이고, 원자이다"라는 파인만((Richard P. Feynman, 1918~1988)의 물리학 명제가 떠오른다. 시간의 에돌이 속에서 영구히 존재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주어진 조건에 따라 파동이 달라질 뿐이다. 최은철이 그토록 열심히 만들어 낸 거짓 유물은 시간의 파동 속에서 휩쓸려 나간 것들을 잠시 잠깐 주워 담고, 튕겨져 나간 것들을 붙잡는 과정에서 손에 남은 것들로 펼쳐낸 연막이거나 무의미한 소품일지도 모르겠다. 한송사도 고래도 삼존불의 부처상도, 결국 사라진 것들에 대한 허명 같은 것 아닐까. 존재가 휩쓸고 간 자리를 유심히 바라보며 신기루가 된 시간을 추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 눈앞에 존재하는 것을 온전히 바라보기 위함일 테고, 좌우상하를 제멋대로 뒤집어도 고요하게 남아있을 어떤 가치를 붙잡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고래는 오지 않는다고 했지만, 최은철의 반어법을 떠올린다면 이미 내 곁에 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았다 라고 함께 믿고 기다리는 편이 좋을 것도 같다. 내내 의심하고, 긴장하고, 헷갈리고, 신념을 바꿔 나가는 속에서 새로운 생각이 솟아날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 조주리
* 각주 1) 보물 제81호로 오죽헌 내 강릉 향토사료관에 보관되어 있는 한송사터 석불상과 국보 제124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송사터 석조보살좌상이 그것이다. 보살상은 서로 짝을 이루는데, 지금은 다른 전시관에 떨어져 전시되어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두 보살상을 삼존불의 좌우 협시불(挾侍佛)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가운데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석조보살좌상은 1912년 일본인 화전웅치가 일본으로 밀반출한 것을 1965년 6월 한일협정에 따라 이듬해 5월 돌려 받은 문화재다.대리석으로 조각된 석조보살좌상은 온화한 기품을 보여주는 고려시대의 대표적 불상으로 평가된다. 출처: 현대불교(www.hyunbulnews.com) 2) 회절(Diffraction)은 물리학 일반의 용어로, 파동의 전파가 장애물 때문에 일부가 차단되었을 때 장애물의 그림자 부분에까지도 파동이 전파하는 현상을 지칭한다. 예를 들어 굴절하는 빛 파동 또는, 음파 임피던스, 음향 파동 등 이러한 것들은 회절 현상과 관련 되어 있다. 본문에서 시간의 회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일종의 문학적 비유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시간과 공식 기록이라는 것도 수백, 수천년을 거치면서 인식의 장애와 방해 요소, 즉 기록의 부재와 이로 인한 인식의 변화와 수정으로 인해 다양한 문화사적 파동과 전파 결과를 낳는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Vol.20240919f | 최은철展 / CHOIEUNCHEOL / 崔殷喆 / painting.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