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첩된 삶 Layered Life

정직성展 / JEONGZIKSEONG / 正直性 / mixed media   2024_0821 ▶ 2024_0922 / 9월 17일 휴관

정직성_수월관음보살도 Water-moon Avalakiteshvara 202427_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93.9×130.3cm_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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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성 인스타그램_@jeongzs

초대일시 / 2024_0821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00pm / 9월 17일 휴관

갤러리밈 GALLERY MEME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3 Tel. +82.(0)2.733.8877 www.gallerymeme.com

환기喚起에서 상기想起로 - 정직성의 삶이 우리에게 환유하는 것 ● 영단어 'honesty'를 우리말로 하면 무언지 생각해 보자. 빌리 조엘의 「Honesty」를 개사하고 직접 부르기까지 한 박이소의 「Honesty, 정직성」은 일반적으로 '정직' 혹은 '솔직함'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를 그야말로 가장 정직하게 바꿔 쓴 말이 '정직성'임을 환기하게 한다. 특히 "정직성. 정말 외로운 그 말 더러운 세상에서 너무 듣기 힘든 말"이라는 대목에서는 이 곡에서 영감을 받아 예명으로 차용한 정직성 작가의 작품에서 종종 느껴지는 비장미tragic beauty, 悲壯美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흔히 문학에서 "이루어져야 할 이상理想이 현실의 상황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슬픔, 고통, 절망 등의 감정과 함께 일어나는 아름다움"으로 가르치는 비장미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는 작가가 숭고미sublime beauty, 崇高美, 그러니까 "작품이 현실을 기반으로 하되 이상을 지향하면서 현실과 이상이 조화를 이루는 양상"이 굳건히 지탱하고 있기에 나오는 묘한 앙상블일 수 있겠다.

정직성_수월관음보살도 Water-moon Avalakiteshvara 202426_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93.9×130.3cm_2024

그러면서 정직성이라는 이름이 가진 일종의 언어적 속성을 넘어, 작업을 통해 나오는 그만의 정체성이 가히 '초월적인' 영역을 넘나드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환상성을 갖게 하는 것은 작가로서도 유리한 지점일 것이다. 또한 그런 호기심과 지속적인 관심을 형성하게 하는 대중적이면서도 학술적인 아우라를 작가도 모를 리 없기에 부담도 되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치열하기에 이번 전시에서도 매력적인 제목 「중첩된 삶」은 그 자체로의 호소력은 물론 이곳 갤러리밈의 3층에서 6층까지의 네 층을 모두 활용함으로써 얻게 되는 구조적인 설득력을 갖추게 되었다.

정직성_수월관음보살도 Water-moon Avalakiteshvara 202428_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93.9×130.3cm_2024

"미술사에서 의미 있는 형식들을 가져와서 현재적인 의미를 띠도록 하는 작업들을 한다"고 종종 밝혀온 작가를 수식할 수 있는 말들 역시 다양한 형식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이러한 글에 의지하지 않고 감상자가 직관적으로 부여해도 된다. 다만 안내할 수 있는 재밌는 사실은 우리가 보통 회고전이 아니면 이러한 스펙트럼의 개인전을 보기 어렵고, 작가 역시 그만큼 준비된 상황이거나 이러한 컨셉을 수락하기 힘든 경우가 많지만, 정직성으로서는 벌써 세 번째 이와 같이 대규모적인 개인전을 치르는 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국의 감상자들이 느끼는 갈증, 혹은 자신도 모르게 허락하지 않고 있어 이중적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가령 고흐의 인생이 그의 그림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 거의 주입식으로 학습을 받고, 또 여러 매체를 통해 관심을 가지면서 '지금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현역 한국 작가 중엔 누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 별로 없다는 그 지점이다. 이에 대해 우리의 미술계가 그만큼 작품들이 매력적이지 않고 정보가 척박해서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그러한 형식의 전시가 별로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점에서 이 전시는 정직성이라는 작가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일 것이다.

정직성_정물 Still Life 202404_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53×45.5cm_2024

정직성의 세계는 무척 다양하다. 바라보는 상황부터 장르, 그리고 전시를 주도해 나가는 기획력까지 한 사람이 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보이는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다행히 말과 글에 있어서도 자신에 대한 설명을 조리 있게 하고 수줍어하는 듯하면서도 굉장히 적극적이고 충실하게 임해 그러한 인터뷰 영상이 유튜브에도 여러 시기, 여러 채널에 걸쳐 올라와 있고 스스로 쓴 기획의 글이나 서문도 다수 존재한다. 가령 2020년 11월에 홍성에서 있었던 전시 「나 자신의 말My Own Words」에서 정직성은 전시 서문을 통해 "오랫동안 나 자신의 말을 하지 못했다. 무의식조차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자끄 라깡의 말처럼 표현하지 못한 나의 고통과 슬픔조차 이미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일까, 그림과 말로 끄집어내려고 할 때 항상 그것과 너무 동떨어진 신파로 드러나 다시 보는 것이 더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응노의 집에서 지내면서 가까이에서 접한 이응노 선생님의 생명력 넘치는 문자추상은, 문자는 그저 마음을 담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는 듯했다. 그릇은 그저 마음을 담기 위해 빚어 구워내면 된다는 듯 여유롭고 자유로운 문자가 마음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러한 글은 그 당시의 전시에 대한 이해를 돕고 레지던시 생활 등이 작가에게 미치는 행복한 영향에 대해 대리만족감처럼 다가오는 예술가적, 정서적 측면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어쩌면 전체 활동 중에서는 매우 일부라 할 수 있는 활동에서도 이러한 고민과 공간적, 시간적 맥락을 보여줌으로써 작가의 전체적 맥락을 파악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되는 효율적 측면마저 있다.

정직성_정물 Still Life 202405_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53×45.5cm_2024

따라서 이 전시가 연대기적 나열은 아니므로 동선 편의상 6층부터 내려가며 감상하는 순서가 일반적이라고 할 때 처음 만나게 될 그 작업을 통해 관람자들은 정직성이 추구하는 다양함 가운데 흔들리지 않고 드러나는, 그러니까 애매하지 않은 자기표현의 수위와 맥락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너무 전위적이려고 하다가 중심을 잃어 자기 자신은 별로 보이지 않는 역설적인 주체성 실종으로 가거나, 너무 하나의 색깔만 보여주려고 해서 작업이 아무리 좋더라도 지루해지는 쪽이 아니라 은연중에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하면서도 민족주의적이지 않고, 여러 장르에 걸쳐 있으면서도 그 완성도가 다 높다는 점에서 소위 '팬심'을 갖게 하는 요소들의 힘이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추상과 구상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작가의 표현으로는 "냄새, 기억들이 함축되어 있는 상징들"까지도 드러낼 수 있는 '현장성'이 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역시 작가가 말하는 "보편성을 띠면서 다른 사람들과 공명할 수 있다는 것에 관한 확신"이 실제로 화폭과 여러 조형에 재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른바 '전형성'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선사하며 일반적으로 어떤 예술의 덕목으로 통하던 '환기'의 기능을 좀 더 '상기'의 영역으로 예리하게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정직성_바람 Wind 202415_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90×90cm_2024

특정 평론가의 글을 끌어오는 것보다 지금 살아 있는 일반인이면서도 예술 향유자가 쓴 서술이 있어 활용하고자 하는 화제의 책을 잠시 빌리고자 한다. 10년 간의 실제 경험담을 일목요연하고도 현장성과 깊이 있는 서술로 담아낸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All the Beauty in the World」에서 저자 패트릭 브링리Patrick Bringley는, 베르나르도 다디Bernardo Daddi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The Crucifixion」를 "메트에 소장된 작품들 중 가장 슬픈 그림"으로 지목하면서, "다디에게 그림은 고통스럽지만 꼭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생각을 돕는 도구였을 것"이라고 써 내려갔다. 그리고 "다디는 고통 그 자체를 그렸다. 위대한 예술품은 뻔한 사실을 우리에게 되새기게 하려는 듯하다. '이것이 현실이다'라고 말하는 게 전부다. 나도 지금 이 순간에는 고통이 주는 실제적 두려움을 다디의 위대한 작품만큼이나 뚜렷하게 이해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내 그 사실을 잊고 만다. 점점 그 명확함을 잃어가는 것이다. 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보듯 우리는 그 현실을 다시 직면해야 한다."며 글쓴이로서의 가치관을 드러냈다. 통찰력이 있는 멋진 구간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글을 읽으며 또한 드는 생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거리감 혹은 피상성을 느낀다는 것이다.

정직성_빗속의 버드나무 Willow In The Rain 202333_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200×80cm_2023

이것은 신앙심 유무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동양인으로서 느끼는 서양 작품에 대한 괴리감도 아니다. 이는 그 작업이 개인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의 거리 자체에 관한 이야기다. 그럴 때, 보통 글을 쓰는 입장에서도 거의 구분 없이 섞어 쓰고 있지만 사실은 본질적 차이가 있는 두 단어, '환기喚起'와 '상기想起'에 대해 말해볼 필요가 있다. 사전적으로, '환기'는 "주의나 여론, 생각 따위를 불러일으킴"으로 짧게 정의되어 있다. 반면 '상기'는 "한 번 경험하고 난 사물을 나중에 다시 재생하는 일. 플라톤의 용어로, 인간의 혼이 참된 지식인 이데아를 얻는 과정. 인간의 혼은 태어나기 전에 보아 온 이데아를 되돌아봄으로써 참된 인식에 도달한다고 한다."고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쉽게 말해 '환기'는 좀 더 느슨하고 추상적이며, 별로 '개인적'이지 않다. 반면 '상기'는 상당히 구체적인 경험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공유되고 있는 상황일 뿐만 아니라 철학적 목표도 분명하다. 이렇게 볼 때 앞서 소개한 '메트로폴리탄의 경비원'은 우리에게 다디의 작품을 빌어 '환기'하는 바는 있으나 '상기'하는 바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적어도 그 '고통 그 자체'라는 부분이 주는 레토릭의 효과가 예술 일반의 속성과 기능에 대해 다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정직성_용 Dragon 202301, 용 Dragon 202302_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30.3×193.9cm×2_2023
정직성_용 Dragon 202315, 용 Dragon 202316_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30×30cm×2_2023

반면 이 전시에서 정직성의 여러 작업을 보면서 경험하게 될 '상기'의 효과는 훨씬 개인적이고 피부에 닿는듯한 감각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작업 면면이 자신의 여러 상황에서 마주한 고통과 번뇌, 즐거운 감정과 실행의 움직임이 갖는 에너지와 극복 의지 등으로 단단하게 엮여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시기에 나온 작업들이라 하더라도 층별로 어떤 어울림을 고려해 그 맥락을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상자들은 설령 작가가 분명히 '타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개인이 중층적 삶의 상황과 모티브를 통해 포착하고 재현하며 드러내고자 했던 장면scene을 마치 같은 입장이 된 것처럼 만나게 될 여지가 크다고 할 수 있으며, 적어도 말을 돌리고 돌려서 작업의 가치를 드러내게 하는 현학적 태도가 아니면서도 깊이 있는 감상을 가능하게 한다는 장점이 있다고 하겠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미술은 철학의 눈이다」라는 책에 소개된 '하이데거의 미술론'은 반 고흐의 「구두」에 대해 "사물과 지성의 일치에 근거한 전통 진리 개념을 거부하고 '자기를 열어 밝히는 세계'와 '자기 폐쇄적 대지'와의 투쟁에 의해 구성되는 진리의 개념, 일상 세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도구의 본질이 이중적인 차원에서 제시됨으로써 개별적인 촌 아낙네 구두 회화가 도구의 비목적론적인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앞서서 미래로 기획투사되는 가능성을 의미한다"는 등의 어려운 철학사적 의미로까지 쓰인 현대예술의 도구적 속성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 일조한다.

정직성_202011_자개, 나무에 삼베, 옻칠 마감_120.5×160cm_2020
정직성_202019_자개, 나무에 삼베, 옻칠 마감_120.3×160cm_2020

즉, 정직성의 세계는 얼마 전 공개된 유튜브 채널인 오유경TV에서의 타이틀인 "현실을 직시했고, 형식을 거부했다."이라든지, "현실의 장소 특정적 감각을 추상표현주의적 필법이나 기하학적 추상, 모노크롬 형식 등을 차용하여 표현하는 알레고리적 메타회화 작업" 정도로 충분히 수준 있는 예술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앞의 책처럼 과도한 평론적 시도로 인해 작가의 삶에 대한 관심을 가질 틈도 주지 않는 상황이 아닌, 우리 각 개인이 작가가 환유하는 것을 하나씩 만나가며 작가가 종종 "기존의 의미가 있는 대상들을 가져와서"라고 설명을 시작하는 지점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곱씹어 보는 감상자로서의 지위와 가치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6층의 위트 있으면서도 강렬한 자기소개와 같은 작업들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문자 추상 작업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옮기는 과정에서 서예 선생님이 지도해 준 부분까지 그대로 가져온 사연이나, 어떻게 쓰면 차이가 있고 비장미를 드러내기에 좋은가에 대한 고민, 깨진 해주백자를 붙이고 주전자 작업, 테라코타 작업들, 머리에 대한 그림들과 어우러지게 설치한 작가의 전시에 대한 탐구와 애정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직성_202029 정직성, 202030 정직성_ 한지에 먹_200×70cm×2_2020
정직성_202033 용, 202034 용_순지에 먹_140×70cm×2_2020

그리고 5층에서는 그간 정직성을 잘 알려온 역동적이면서도 도시적인 상황의 경험을 만나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주요 작품을 모두 보여주기보다는 그것을 구상하는 단계에서 그린 드로잉 등을 더 '친절하게' 공개함으로써 작가 개인의 '상기'적 측면을 더 드러냄과 동시에 관람자들에게도 그러한 정서를 돕는 리듬감과 이질적 감정을 공유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나아가 4층에서는 작가가 시각예술가적인 실험을 해나가는 태도를 더 심층적이고 적극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여기에는 특히 정직성의 '실험'이 앞서 지적한 누군가들의 '전위'에 대한 집착보다는 2013년 현재의 나, 그러니까 금전적 제약 속에서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그 공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으며, 어떻게 자신과 작업 환경을 넣어야 하느냐를 고민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온 드로잉부터 추상과 구상이 치열하게 부딪치면서 여러 가지 색과 모양으로 시뮬레이션되었던 '기록'으로서의 측면도 강해 보인다.

정직성_202047 뚜껑열린 머리_테라코타_26×21×27cm_2020
정직성_202049 관세음보살 머리_테라코타_32×24×25cm_2020

이는 당시 작가의 치열한 고민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음은 물론, 미술사적으로 보았을 때도 마치 아서 단토Arthur C. Danto와 페르니올라Demetrio Paparoni가 '현재의 가시성visibility of the present'를 이야기한 기록이 수록된 「예술과 탈역사Art and Post-history」의 "아방가르드와 고전주의 사이에서 '삶이라는 친구들'과 '형식이라는 친구들' 사이의 갈등을 소환한다"는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그들의 대화가 20세기적 고민을 상기하게 한다면, 정직성의 고민은 그야말로 그때는 예상하지 못했을 21세기적 상황이며, 지금 현재 어떤 개인이 겪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단토가 예술의 종언을 고하고 역설적으로 개념 미술 위주의 부상을 부추긴 측면이 있음에도 그 '멋짐'보다 더 가치 있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심층 해석은 작가의 의도를 배제한다"며 미래의 예측 불가능성을 이야기했음에 있듯, 정직성의 작업 역시 한국의 미술 역사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동시에 현실 속에서의 개인 정직성은 어떤 작업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포부' 보다는 '실천' 자체가 그를 지금의 위치에 데려다주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한다.

정직성_202054_자기_35.6×25cm_2020
정직성_202055_자기_35.6×25cm_2020

가령 대화의 흐름 속에서 "초현실주의에 대한 분석도 일반적으로, 그러니까 세계적으로 프로이트나 융과 같은 정신분석학에 기대는 도식적 이해가 압도적인 주류이다 보니 한국 현대회화에 대해 잘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는데 오히려 자본주의의 도입이 주는 충격이 저변에 깔린 것이 아닐까, 그런 해석이 있었다면 더 소화하기 쉽거나 다양해졌을 것"이라는 작가의 의견이 나왔을 때 공감이 간 것이 새삼 '정직성답다'고 확인하게 한다. 수월관음도인 '관세음란보살'에 대한 설명 또한 유머러스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3층까지 다 내려오면,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세속적인 삶 속에서 이끌어 내는 영성"이라는, 작가가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환유의 레토릭에 대해 확실히 느끼게 됨은 물론, 3층이 다시 6층으로 연결되게 하는 묘한 순환 고리처럼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정직성_201105_캔버스에 유채_112×145.5cm_2011

그렇다면 왜 정직성은 이러한 환유의 레토릭을 중요시하는 것일까. 이는 아마도 지금의 시대가 '삶'이 주체를 환유하지 못하고 주객전도를 시키기 쉬운 속성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우리 각각의 개인은 '주체'로서 분명한 인지 능력과 의지를 가지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데, 불가항력적으로 보이는 환경의 여러 요소들에 압도당하는 인생을 살다 보면 '내가 본질적으로 어떤 삶에 위치하는가' 조차 파악할 수 없는 가운데 나이만 먹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이를 앞세우거나 갈수록 완숙해 간다는 등의 '성숙 신화'가 아닌, 초창기부터 직시하고 대응해 온 '삶의 고통'에 대해, 자연의 조건과 극복에 대해, 그리고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 가치에 대해 알고자 하는, 또는 알고 있는 이들과의 공명에 대해 일관된 진지함으로 대해오고 그려온 정직성의 세계를 이 정도 규모에서 한 번에 만나보는 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상기'의 기회가 될 것이다.

정직성_201107_캔버스에 유채_72.7×91cm_2011
정직성_201109_캔버스에 유채_91×72.7cm_2011

그리고 그것은 단토가 말하는 "목적론적 서사가 아닌 자유와 우연의 상호작용에 따른 결과인 탈역사적" 목적도, 하이데거가 말하는 "도구의 비목적론적 가능성"도 아닌, 지금의 상황이 가진 '고통 속에서 바라본 비장함과 숭고함'의 재현에 충실하면서, 우리 각 '개인'이 어떤 가상적 자아가 아닌 각자의 '삶'을 환유할 수 있는 '주체'로 느껴질 수 있도록 하는 시각예술가로서의 역할을 해나가는 '정직성'의 그 솔직함을 담은 이름값에 대한 기대감이기도 하다. ■ 배민영

Vol.20240820c | 정직성展 / JEONGZIKSEONG / 正直性 / mixed media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