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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4_0725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G컨템포러리 G contemporary 서울 용산구 회나무로 66 가야랑빌딩 3층 Tel. +82.(0)2.6324.2139
조형의 기원을 넘어 존재의 관계를 향하여 ; 최정윤의 Origin과 The Flesh of Passage가 의미하는 세계 ● 쏟아지는 햇살 사이사이 곧게 솓아오른 흰 소금 기둥들이 가지런하게 자리한다. 사람의 드고 나는 움직임 하나에도 살가운 미동을 아끼지 않는 소금 기둥들은 고즈넉한 수직의 자세를 고집하는가 하면 흰벽을 향해 빛그림자를 만들곤 한다. 흔들거리는 빛멍울이 대기 속에 부유하는 동안, 빛을 관통한 수천수만의 색선들이 뭉쳤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존재와 무(無)' 의 찰나생찰나멸을 증거하는 것만 같다. ● 물성과 형상의 긴장된 이완을 전하는 최정윤의 작업은 최근 소금과 실이라는 특별한 질료를 선택하고 있다. 2미터를 넘나드는 소금 기둥이나 평평한 밑동부터 가늘게 좁아진 윗부분까지 팽팽히 감긴 색선 기둥의 규모는 질료가 갖는 본연의 의미를 초월한 사유를 불러 일으킨다. 수직의 형상성은 인간 그 자체로, 소금과 실의 형사(形寫)는 실험과 도전의 시간을 제시하며 물성의 인류학적 풍경을 만들고 있다. ● 그렇게 최정윤의 소금과 색선 기둥은 물질적인 오브제로서의 강렬함으로부터 영혼 깊숙히 파고드는 예리함의 형상으로 다가온다. 물질이 갖는 지시적이고 상징적 세계를 넘어 존재와 시간을 보게 하는 그의 작업은 수년간 형상적(形象的) 사유와 형사적(型思的) 감각이 축적된 여정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즉, 이들 작업에서 기인한 강한 형상성이나 견고한 감각은 시간과 물성의 농축된 경험세계가 그 기저에 토대한 것이리라. ● 1999년부터 2017년 현재까지 그의 작업의 명제는 Origin 과 The Flesh of Passage 두가지이다. 대체로 작품의 제목은 그 내용을 함축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정윤의 두 명제는 작품 해석의 단서라기 보다는 일종의 지향점과 같다. 단적으로 의미를 헤아리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2013년을 기점으로 Origin 으로부터 The Flesh of Passage로 이행한 지난 20여년의 변화를 관찰하지 않은채 그의 지금, 여기의 작업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작금의 그의 소금과 색선으로 올려진 기둥들이 한결같이The Flesh of Passage라는 명제를 통해 전하는 바는 무엇인지, 이같은 사유는 어디서 발원하였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연스레 지평융합이 되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형태연습, 조형의 기원Origin을 찾아서 ● 최정윤의 작업은 1983년 회화로부터 시작하였지만1990년대 중후반 이내 도자라는 질료로 확장된다. 그는 이 변화의 청년기를 '조형훈련'의 시간이라 말한다. 회화에서 도자로 질료를 전이하면서 그는 평면과 입체라는 차원의 문제를 넘어 실제의 형상과 이미지의 형사적 융합이라는 실험을 이어갔다. 그런 맥락에서1999년 발표된 「Origin」 은 그의 독창적 조형훈련으로서 '형태연습'의 첫 귀결이다. Origin이라는 제목에서나 청동제기(靑銅製器) 형상에서나 그의 형태연습은 질료와 형식의 고정성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출발한다. 청동제기의 단단한 형태적 안정감을 도자라는 질료로 구현하지만, 얼핏보면 이들 오브제는 청동과 유사한 색채와 질감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왜 오래된 청동제기의 형상을 환기시키는 것일까, 왜 이를 흙으로 형상화한 것인가. ● 그의 초기 「Origin」은 견고하면서도 윤기가 흐르는 표면이 청동의 느낌 그대로다. 형태의 생김에서는 삼족기(三足器)를 연상시키거나 제기로 쓰일 것 같은 기형(器型)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실제 유물들과 유사한 크기의 이 작업은 용도를 지시하는 형태적 특성을 갖거나 상징을 극대화하는 기능으로 인해 시간적, 장르적 경계를 넘나드는 사유를 요청한다. 그는 청동제기의 형상성과 기능성을 추출하여 새로운 형태를 제안함으로써, 오늘로 이어진 질료의 역사성과 형태의 원형성을 탐색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제시한 작업들이 청동제기를 완벽히 고증하거나, 세부 재현을 엄격히 시도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직관적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역사적 사물로서의 음영을 상기하게 되는 것은 바로 형태의 원형 때문이다. 누가 보든 그것은 청동제기라는 원형성을 간직한 것이라는 데 동의할 수 밖이다. ● 역사적 텍스트이자 유물인 청동제기는 기원적 상징이자 기능적 사물이다. 중국의 경우, 청동제기를 대개 '이기(彛器)'라 칭한다. 본래 선조의 영혼을 강림시키기 위한 그릇으로 높이 받들어지다가 곧 제기로 사용되었던 '이기'는 이후 왕조의 권위를 대변한 존귀한 물건이 되었다. 형태상 다리 세 개를 받치는 정(鼎)은 중국 신석기 시대(BC 3000~1500년경)에 만들어졌다. 이와 같은 삼족기는 용산문화(龍山文化)의 토기에서 기원하였는데, 유해한 것을 막고 불 없이 음식을 익힐 수 있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는 것이라 믿어져 왔다. 그가 청동제기를 작업에서 다시 소환한 것은 이같은 역사적 여정과 무관하지 않다. 첫째 청동제기로 더 널리 알려진 정과 같은 형태는 오래전에 이미 토기로도 만들어졌으며, 둘째 당대의 형태 기원은 기능과 상징의 융합으로 이루어졌음을, 셋째 그 안에는 영혼과 권위에 대한 존중이, 심지어 불가사의한 믿음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했었음직하다. 말하자면, 그는 청동제기의 원형을 질료로서, 형상으로서, 상징으로서 인간 조형의 기원으로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연스레 지평융합이 되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수직(垂直)의 발견, 검(劍)의 형상 ● 2001년 그의 작업은 견고한 청동의 형상성으로부터 다른 질료와 형태로 나아간다. 물론 그에겐 여전히 '조형훈련'이라는 시간으로 지칭되지만, 이 시기부터는 이전 보다 간결하고 압축된 형상으로서의 상징이 부상한다. 기형(器型)의 흔적은 거의 소거되고 대칭과 균형의 볼륨있는 오브제가 등장한 것이다. Origin이라는 명제 아래 그의 삼족기 형상은 세 군데의 무게 중심으로 수직적이거나 수평적으로 형태가 단순화된다. 균형과 볼륨의 조화를 탐색하는 이 작업은 곡선과 직선, 면과 면이 형태를 이루는 토대적인 조형훈련의 면면들이 빛을 발한다. ● 거의2009년까지 그의 작업에서는 청동제 유물의 흔적이 사라진 오브제들의 형태, 색채, 질료의 조형적 실험이 왕성하게 일어난다. 이는 매체로서 질료의 선택에서나 표현언어의 확장성을 의도한 것임에 틀림 없다. 도자, 돌, 스테인레스 스틸, 나무, 테라코타에 이르는 다양한 질료의 형상 실험 속에서 그는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일구어내고자 하였다. 즉, 청동제기의 형태로부터 단순화되고 볼륨이 커진 일련의 형상 속에서 '수직(垂直)'을 곧추세운 것이다. 수직은 속성상 직립한 인간으로, 평화와 안정 대신 불안과 긴장을 대리하는 조형성을 지닌다.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실존적 인간 형상을 상기시키는 수직은 검(劍)이라는 구체적 대상으로 압축되면서 작업을 또다른 국면에 이르게 한다. ● 검의 형상은 돌이라는 질료로 인해 역사의 하중을 올곧이 받치는 듯 보인다. 화석처럼 양각으로 돌출된 검의 구현 방식은 그에게 기술적으로도 의미있는 숙련의 시간을 갖게 하였다. 그의 조형 훈련이 형태로부터 상징을 압축한 질료로 깊게 파고들었기 때문이리라. 수직의 긴장과 무게를 대변하는 검은 원래 길고 큰 칼을 일컫는데, 전쟁용 무기이자 의례용으로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명검에 이름을 붙이고 보물로 소중히 다루었고, 일본에서는 악령을 쫒는 영험한 것으로 귀히 여겼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 정신적 고통,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는 영적 대리물로 간주되기도 한다. 무기라 하여도 검은 일반 병사가 소지할 수 없고 왕이나 귀한 존재들을 대신하는 소중한 상징으로서 보검(寶劍), 영검(靈劍)으로 자리해왔다. ● 이처럼 객관적으로 검이 지닌 여러 의미들의 중첩 위에 작가는 질료와 형태의 역사성을 더하여 유물 이상의 형상으로 존립케한다. 수많은 존재로, 말씀으로, 진리의 숭고함을 대리해온 그것과도 같이 수직의 엄격한 생명성을 담보한 그의 검은 자신의 조형적 기조를 지키는 수호물이기도 하다. 2010년경 그의 검은 150 센티미터 내외의 흰색, 검은색의 도자로 완성되어 독자적 조형 언어로 귀착된다. 검은색과 흰색의 도자 검은 금속의 그것과 견줄만큼 견고한 예리함을 간직하면서, 정의를 향한 사도들의 신념과 의지를 대신하는 그것들처럼 굳건히 조형의 엄정성을 지켜내는 것만 같다. 자연스레 지평융합이 되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빛의 응축, 소금 기둥의 발현 ● 흙에서 기인할 수 있는 견고함과 검의 상징이 또다른 변화의 길로 들어섰음은 질료의 전환을 통해 명료해진다. 물론 그에게 물성의 변화는 조형언어의 확장에 다름아니다. 2013년 일련의 작업들이 새로운 형태와 의미로 이행하고 있음은 10여년간 지속해온 명제 Origin으로부터The Flesh of Passage로의 전환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The Flesh of Passage시대를 개막하면서 그는 물성의 프레임으로부터 시간과 존재의 심연을 향한다. 분명 작가는 공간에서의 조형뿐 아니라 시간에서의 그것으로 몰입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한 이유로 그의 명제는 물성이나 형태에 관한 정념에서 존재와 시간의 본성으로 확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작업의 주된 질료였던 도자 흙에서 소금으로의 전환은 뜻밖의 변화일 수도 있다. 흙이 형상을 구현하는 가능태로서의 질료였다면, 소금은 그 같은 조소적인 기능 수행에서 흙보다 난해한 속성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실에서 눕혀있는 소금 기둥을 보면서 작가를 향해 "어떻게 녹아 흘러내리는 소금입자들이 서로 결합하고 지지될 수 있는가?"를 질문할 수 밖에 없었다. 작가는 수많은 연구와 실험을 통해 소금 결정체들이 녹아내리는 순간들을 결합시키는 연금술적 노하우를 갖게된 것일수도 있다. 수용적 질료로서 해빙적 속성이 강한 이 질료를 고착하여 수직으로 세우기까지 작가는 그렇게 시간과 수없이 대척해왔을터이다. ● 그렇다면, 이러한 속성의 소금을 통해 시간적 조건을 견지하며 드러내고자했던 것은 무엇일까. 소금은 인간에게 필요한 생명의 물질이다. 인간을 지키는 무기질 중의 하나로 기원전 6000년경부터 인류에게 가치있는 물질로 자리해왔다. 뿐만 아니라 고대 국가의 종교의식의 귀한 제물로 이용되거나, 국가간 교역의 대상물로, 생활필수품이자 화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로마에서 군인이나 관리에게 소금으로 봉급을 주었는데, 이를 뜻하는 라틴어 salarum(병사에게 주는 소금)에서 salary라는 말이 유래한 것을 보면 그 중요성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작가가 소금을 작업의 주된 물성으로 선택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의미의 역사를 환기했었을 줄 안다. 물질의 생명성이나 화폐를 대체할만한 경쟁력의 소금은 작가에게 이전에 제작했던 검의 상징을 대리할만한 혹은 그보다 더 큰 가치의 충족적 대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 아마도 그는 이 상징적 가치뿐 아니라 소금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보다 강한 생명성을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와의 대화 가운데, 염전(鹽田)에서의 작업 구현에 대한 소망을 비춘적이 있다. 이는 소금이라는 물성 자체가 신성(神性)에 가까운 자연의 순환적 질서의 결과인 바, 그 생성의 현장을 구체화 하고 싶었던 것으로 독해된다. 바닷물을 이용하여 소금을 만드는 과정은 매우 흥미로운 여정이 아닐 수 없다. 자연이 준 선물로 태양과 바람을 이용하여 수분을 증발케하여 소금을 만들어내는 이 방법은 물질과 존재의 순환을 무엇보다 간단히 알려준다. 바닷물과 햇볕 그리고 풍력으로 소금의 결정을 만들고 이것은 다시 인간에게 녹아들어 또다른 생명을 잇게 한다. 그의 소금 기둥은 그러한 바람과 햇볕을 가득 안고 응축된 시간의 응어리가 발현한 것이다. 즉, 자연에서 생성되는 소금 결정체를 다시 용해시키고 이를 응고시켜 질료가 가진 속성뿐 아니라 그것의 유동하는 에너지 순환의 순간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전의 검이 가진 선명한 형태감과 대조적으로 소금 기둥은 흐르는 듯한 곧 녹아 형태가 사라질 듯한 비정형의 순간이 표출된다. 응축과 용해의 복합적 상태의 소금 기둥은 그렇게 인간이, 자연이 가진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의 순간을 마주하게 하고 있다. 자연스레 지평융합이 되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빛과 색, 스펙트럼 너머 존재의 관계를 향하여 ● 그의 작업은 소금 기둥 이후 완전히 대조적인 형태와 색채의 오브제로 이동한다. 그렇다고 소금 작업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닌 진행형에 있으면서 레진과 실로 강렬한 색 오브제들을 함께 선보이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반투명의 소금빛깔의 모호함과 단적으로 비교되는 선명한 색채 기둥은 과연 이전의 작업과 무관한 것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 소금 기둥은 색으로 응축된 오브제와 함께 선보인다. 소금과 색은 어떻게 그의 작업에서 연계되어 조화를 이루는 것인가. 양자가 단순히 조형적 강렬함을 위해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형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쉽게 알 수 있다. 다만 물질적, 화학적 작용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들 관계가 어떤 내연(內緣)을 갖는 것인지 탐색하게 된다. 예컨대, 소금의 염기성 결정이 적어도 염전에서는 해수(海水)와 햇볕 그리고 바람이라는 자연의 조건에 의해서라는 인과적 설명이 이들 관계에는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해명과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그의 소금과 색의 접점이 발견되기는 한다. 소금을 결정짓는 빛의 스펙트럼과 이를 관통한 무수한 색들은 염전에서와 같이 순환적 자연 현상의 한 장(場)을 이룬다는 지점에서 그러하다. 그는 빛의 스펙트럼으로부터 투사된 여러 색들을 한편으로는 색 덩어리로, 다른 한편으로는 색선으로 수직적 형상화를 감행한 것이다. ● 과학적 세계의 물질적 인과성과 거리가 있지만, 소금과 레진 그리고 실은 의미론적 상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금은 자연의 시간성과 순환성을 직시케 하는 범우주적 물질로서의 존재성을 담보한다면, 레진은 인공의 결합과 조형을 위한 물질로, 실은 빛과같이 모든 물질과 만나는 인연의 투사를 기표화한다. 실은 누에고치로부터 기인한 명주처럼 생명을 또다른 가치로 잇는 선이기도 하고, 도자의 물레가 돌아가는 스핀의 반복적 움직임을 시간과 횟수에 비례하여 가시화하는 단적 증거이기도 이다. 조형적으로 실은 선으로 시작되나 곧 면이며 다시 입체로 나아갈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상징적으로는 인연의 의미가 강하여 곧 다른 존재와의 연결을 함축하기도 한다. 소금이 존재의 심연을 보게 한다면, 실은 존재와 존재의 관계로 향한 것인지도 모른다. ● 대체로 1미터를 전후한 크기부터 2미터를 넘는 높이의 이들 색/색선 기둥은 조형적으로 작가 작업의 총체성을 담지한다는 점은 기억할만한 대목이다. 이미 그가 1990년대 후반부터 작업해온 청동제기의 몸체를 이루던 둥글거나 정방형이었던 형태가 바로 하단부의 기저를 형성하고 그 위로 가늘게 솟아오른 날카로운 선은 검의 형상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구조들이 작가의 새로운 발상이었다 할지라도, 하단부의 엉켜진 색실들이 뭉쳐진듯한 부분과도 같이 그의 작업 여정이 손끝, 사유 그리고 가슴에서 만났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며 자연스레 지평융합이 되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가는 더더욱 자신이 걸어온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힘들지 모른다. 예술가의 습(習)과 출(出)의 구조는 거미의 반복적 구축의 행로처럼 동일한듯 다른 구조를 만들어가는 것과 흡사하다. 그는 자신이 독해하는 시대와 가치를 조형적 물성으로 구조화하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의 작업은 스스로에게, 그리고 세계에게 조형이라는 특수한 영역이 지켜내야하는 신념과 의미의 지평은 무엇인지를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초기 조형 훈련의 손끝에서 발현하는 반복적 행위가 자연스레 형이 되는 도자적 지평에서 형태의 정직성을 발견하고 나아간 것으로부터, 검이라는 형태와 상징의 질료적 기표화로, 다시 자연의 지고지순한 순환의 진리를 존립시켜 보여주는 것으로, 마지막으로 빛의 스펙트럼을 관통한 무수한 색채들이 물질 없이 색을 발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관계안에 존재가 성립함을 깨닫게 하는 일련의 과정이 바로 그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물질과 조형, 자연과 인간의 수많은 관계망을 만들고 부수기를 반복하며 도달한 그의 작금의 작업은 소금과 색/색선 기둥으로 현재하나, 어쩌면 이미 그에게 '지나간 미래'의 예술로 자리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억하듯, '지나간 미래'는 오늘에 지속하기 마련이며, 다만 예고하지 않은 형상으로 '다가올 미래'를 예단할 뿐이다. 그의 작업은 이 예술의 순환적 진리 여정에서 결코 예외적 상황이 아님을 확신한다. ■ 박남희
Vol.20240725b | 최정윤展 / CHOIJEONGYOON / 崔丁允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