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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4_0417_수요일_04: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다도화랑 DADO ART GALLERY 서울 강남구 논현로159길 24 Tel. +82.(0)2.542.0755 www.dadoart.com
추경의 추상, 증가하지 않는 엔트로피의 사건으로서의 화면에 대하여 ● 여성에 대한 요구와 기대. 일찍이 린다 노클린은 1971년 글 「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없었는가?」에서 이 부분을 주목하였다. 미술계의 시스템 이외에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여성조차 위대한 여성 예술가가 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보편적인' 가치를 기반으로 한 요구와 기대에 대한 부응의 노력 때문이었다. 잘 살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의 욕망이나 정체성과 멀어진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은 여성 미술가가 더 이상 여성의 범주에서 판단되지 않는 상황에서조차 지속되는 것 같다. 이른바 여성적인 조형언어는 전복을 꿈꾸는 전략인 동시에 여성적인 것에 함몰되게 하는 올가미이기도 한 때문이다. ● 미술사에서 여성미술가의 수가 적은 것도, 현대미술사에서 여성 추상화가의 수가 적은 것도 미술계의 시스템과 조금은 문학적 표현인 여성에 대한 요구와 기대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바느질, 뜨개질, 부드러운 것, 피의 것들.... 가장 여성적이고 가장 자신의 모습이지만 이 또한 범주화되는 오류(誤謬) 속에서 탈출할 방법은 무한히 제자리로 되돌아오게 하는 가장 자기다움의 것들에 대한 질문들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자기다움을 사회에서 규정하는 틀에서 벗어나는 방식은 무엇일까.
추상화가 추경의 세계는 바로 그 규정의 틀을 벗어난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의 사유는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감각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다만 조형의 법칙에 따라 영역을 찾아나선다. 성공적으로 명상에 들면 이 세상 모든 것의 감각이 사라지기 전에 만나는 세상의 모든 요소들을 알아채게 된다고 한다. 코끝을 지나는 바람, 나뭇가지 사이로 돌아나가는 바람,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 나뭇잎이 구르는 소리, 찬탄과 함께 저 깊은 곳에서 나오는 뜨거운 숨과 같은 것들이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감각하게 된다고 한다. 차가운 바람과 뜨거운 호흡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님을 그 순간 알아차릴 것이다. ●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는 절제하고, 집중할 줄 아는 작가이다. 무른 듯 단단한 마음, 거친 듯 부드러운 화면은 명상의 결과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의 지난 시리즈는 바람 시리즈였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화면에 잡아내는 방법은 오로지 다른 방식의 사유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화면에서는 일렁임을 느끼게 되는데 윤슬처럼 이야말로 바람의 속성이지 싶다. 켜켜이 쌓이고 쌓여 질감이 되고 부피가 되는 물감, 종이의 층들은 화면 위에 '얹힌' 존재성을 드러낸다. 붓질 하나, 낙엽을 닮은 한지 부스러기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개별적이며 시차를 두고 그곳에 모인 것임을 보여준다. 형언할 수 없는 부정형의 형태들은 화면 안에서 시간을 느끼게 하는데 흔히 겹이 만들어 내는 깊이에 의한 시간성과는 매우 다른 시간을 경험하게 한다. 즉자적인 시간성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그 이상한 시간의 경험은 그의 화면에 존재하는 형태들이 선형적 구조의 질서로 구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불규칙하고 크기도 제각각인 형태들은 결코 인과적 시간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의 화면 속 형태들은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생기는 인과적 흐름과 지각에 따라 변화하는 분출적 흐름의 어느 한 질서에 경도되지 않고 혼재함으로써 가시화한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라는 질서의 흐름으로 구성되지 않은 그것들은 동시에 생겨나기도 하고, 생겼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그의 화면에서 감각하는 동시성의 경험은 모든 바람이 멈춘 순간, 숨을 들이마시고 잠시 멈춘 사이, 눈도 깜박이지 않은 그 사이의 모든 것의 정지된 상황을 상상케 한다. 어떻게 이러한 상황이 가능할까.
우주의 엔트로피가 극한에 달한다면 모든 시간은 멈춘다는데, 깊고 깊은 명상에서 만나는 세상은 코 끝에 걸린 호흡 하나도 인지하지 못하게 되는 고요함의 절정이라고 한다. 그것은 온 우주에 혼자 있는 극한의 고독 상황일 것이며 시공간이 사라진 무한대의 어떤 장소일 것이다. 추경의 작품이 주는 이상하게 반짝이고 형언할 수 없는 그 형태들이 때로는 꽃잎으로, 또 어떤 때는 나뭇잎이나 와글대며 물속에서 유영하는 올챙이 같기도 한 것은 바로 그곳이 장소가 된 때문이다. 붓질이나 물감의 자욱 혹은 종이나 다른 매체를 이용한 붙이기 기법 등이 동원된 회화는 추상화의 기본인 전면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층위를 갖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층의 개수만큼 우리는 감동의 진폭을 열어놓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러 층으로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추경의 화면은 깊이보다는 표면을 '감각하게' 만든다. 형태가 있지만 움직임이 사라진 화면은 시간성의 상실 내지는 멈춤의 결과이다. ● 그의 화면은 어떻게 증가하기 마련이고 확산하기만 하는 엔트로피를 조정한 것일까. 무조건 확장되거나 확산되거나 증가하지 않는 결과는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멈춘 곳에서 가능하다. 그곳을 우리는 블랙홀이나 우주의 어떤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알고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며 인간이 만들어 낸 물질로 상상을 실현하는 작가의 작품은 결코 미지의 세계인 우주의 어떤 것은 아니다. 지구상의 물질로 만들어 낸 작품은 작가의 사유와 상상이라는 공간을 지나왔을 뿐이다. 추경의 작품은 바로 작가를 통과하는 그 과정에서 시간의 흐름이라는 법칙을 잠시 놓아버린 것이다. 명상이라는 틀을 통해 무한대로 상승한 작가의 사유는 자발적이며 반복적인 손의 기술로 화면을 창조해 낸다. ● 추경이 사용하는 물질들은 지구가 품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위대하지만 하찮은 것들이다. 그 연약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어지는 나무판이나 한지, 솜과 같은 것들은 여성적인 것의 범주로 각인시킬 수 있는 위험성도 있지만, 그것의 생명성은 모든 생명의 근원인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 5대를 대변하기도 한다. 그의 '바람 시리즈'는 그래서 단순히 동녘에서 부는 바람과 같은 것일 수도, 생명에 대한 성찰일 수도 그리고 어떤 에너지의 상태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동시에 화면에 던져진 듯한 형태는 명징하게 존재성을 드러낸다. 형태 하나하나는 자신의 색채 또한 상실하지 않아서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이라고 작품을 지칭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하여 균질한 색채의 면이 된 추경의 화면은 일견 단색의 미니멀한 모노크롬 회화를 상기시킨다. ● 그는 한지를 두들기고 만져서 형태를 구축한다. 그것은 작가의 창조적 행위이지만 결과는 형태만이 있을 뿐이다. 작가는 거기에 불을 지름으로써 생명의 열기를 불어넣는다. 따듯한 숨과 같은 것, 에너지 말이다. 완성된 평면 위에 한지를 얹고 불에 태우기. 이 간단한 방식의 시작이 바로 추경의 화면에서 시간을 소거하고 모든 에너지가 멈춰서 순간의 빅뱅을 보는 듯한 긴장감을 만든다. 불에 태우는 것은 정화(淨化)의 의식과 연관되어 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림으로써 이전의 오류들을 제자리로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불길은 모든 것을 있게 하는 따듯하고 깊은 호흡과 상통한다. 그 열기는 모든 것을 있게 하고 생명을 살게 한다. 그래서 다된 화면에 불을 질러 완성한 '불 시리즈'는 그동안 작가가 해오던 '바람 시리즈'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생명을 불어넣는 바람, 따듯한 바람, 그것이 바로 불인 때문이다.
그런데 물이나 불 모두 에너지가 지나간 흔적이 남고 냄새가 남는다. 물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는 상태임에도 물가에서 우리는 비린내를 맡는다. 구역질을 일으키기도 하는 비린내는 부패(腐敗)의 상징이다. 부패는 죽은 것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을 품은 물이 비린내를 풍기는 것과 달리, 살아있는 모든 것을 태워버린 불은 소멸(消滅)을 상징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죽어야 새로이 시작되는 법. 불은 생명의 향기을 담고 있다. 특유의 불향은 코를 쏘지만 더 잘 맡아보려 코끝을 실룩이게 하는 향기의 일종이다. 물질을 소거함으로써 나타나는 세상의 기운으로서 냄새, 바람의 다른 현상으로서 냄새인 것이다. 이제 그의 작품 세계는 시각화한 바람에서 후각화한 냄새의 세계가 넓게 펼쳐진 듯하다. 물은 길이 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인 때문이다. 헌데 불의 길은 예견하기 어렵다. 그것은 훌쩍 뛰어넘고 사방팔방으로 길을 내기도 한다. 예기치 못함, 그것이 불의 속성이다. 추경의 화면이 일직선의 시간이 아닌 결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바로 물과 불의 조합 결과이기 때문이다. 물을 기반으로 한 물감의 사용 그리고 나무의 분신인 종이를 태우는 불로 그의 화면은 구성되어 있다. 방향이나 높이의 법칙이 사라진 불의 운용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없으며, 현재가 과거의 것들을 바꾸어 거슬러 올라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딱히 언어로 잡아낼 수 없는 그 표면의 감각은 에너지의 증감이 멈춘 그 지점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이해해도 좋은 것이다. ● 최근 그의 작품에는 반복되고 촘촘한 수직 혹은 수평선이 강하게 드러난다. 멀리서 보면 촘촘한 직선으로 구성되어 보이는 탓에 어느 작가의 단색화를 연상시키지만 가까이 다가갔을 때, 우리는 이전에 만나지 못한 새로운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혹자는 일견 구축적이고 우연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물질에서 에너지의 소거라는 점에서 여타의 작품들과 대별된다. 움직임이 멈춘 지점, 더 이상 에너지가 관여하지 않은 그 상태의 화면은 선형의 시간이 지나간 사건이자 엔트로피가 멈춘 장이 된다. ● 추경은 자연 안에서 거주하며 지독히 고독하게 작업하는 작가이다. 정지되고 뿌려진 시간의 흔적, 시간을 거슬러버리는 에너지의 가시화가 그의 작품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은 그 철저한 고독 덕이다.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방식은 색모래로 채워넣은 모래 만다라를 단번에 사라지게 하는 티벳 수행자의 손짓과 같다. 수많은 시간을 공들여 모래를 쌓아올려 그려낸 만다라는 일순에 사라지고 그 현장에는 다시 모래만이 남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것을 진행시키고 다시 되돌리는 것, 엔트로피를 조절하는 이 훈련이 수행자를 명상 안에서 우주 저 멀리까지 가게 한다. 추경의 화면에서 이루어지는 그리기와 종이로 덮기, 칠하기와 불태우기라는 이 상반된 행위는 일직선의 시간을 멈추게 한다. 작가가 붙잡아준 소멸된 시간의 그 순간 덕에 우리를 자유로 이끄는 무한한 공간을 사유하게 된다. 생성하는 자연의 힘, 참으로 위대하다 아니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2024, 2, 29) ■ 조은정
추경Flame-Embracing Nature ● 내 작품의 주제는 세상을 이루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에서 기원한다. 흙과 물, 불과 바람으로 인해 대자연이 이루어지고 생명체의 존재가 가능하다. 이번 작품에서는 지난 20 여년 동안 내작품의 주제인 바람(風)을 뒤로하고 불(火)을 모티브로 삼아 자연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생동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불, 불꽃을 통해 이른바 생명체가 발산하는 호흡, 혼과 같은 것을 시각화하여 탄생된 작품이다. ● 캔버스에 돌가루를 엷게 바른 후 아크릴 물감으로 밑 작업을 한다. 밑 작업은 나의 어떤 심연, 무의식 세계의 이미지로 만들어진다. 완성된 밑그림 위에 한지를 구겨서 전체를 덮는다. 그 위에물 붓으로자유로운 선을 그으면, 한지의 질긴 특성으로 인하여물그림 드로잉은 밑그림과 합쳐진다. 한지를 완전희 건조시킨후불로 태워나간다. 불꽃은 나의 드로잉을 따라캔버스 전체를 너울너울 흘러 다니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불꽃 작업은 경이로웠다. 그것은 스스로 소멸 되어지고 생성되어가는 세계, 이른바 자연처럼, 생명체처럼 스스로 완성되어가는 세계이다. 캔버스는 불꽃 사이로 문득 문득 새로운 풍경이 다가오고 사라진다. 그것은 땅, 하늘, 물, 구름의 자취이기도 하다. 캔버스는 우주 삼라만상의 형상들로 나타나 스스로 존재한다. ● 거대한 불꽃의 흐름은 나의 의도를 초월하여 스스로 타들어 가면서 캔버스의 표면을태우고 미지의 세계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나의 캔버스는 제2의 자연이 되어 보이지 않는 나의 심연에 내재되어 있는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이 불의 매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무릉도원 또는 유토피아 이다. (2022, 작가노트) ■ 추경
Vol.20240417c | 추경展 / CHOOKYUNG / 秋京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