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다고 말한다.

Tell them you loved them

장욱희展 / JANGUKHEE / 張旭希 / installation   2023_1228 ▶ 2024_0105 / 일,월요일 휴관

장욱희_사랑했다고 말한다_식물, 오브제_가변설치_2023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211206c | 장욱희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갤러리 가비 GALLERY GABI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52길 37 Tel. +82.(0)2.735.1036 www.gallerygabi.com @gallerygabi

작가 장욱희가 이번 개인전에서 내세운 주제는 "사랑했다고 말한다"이다. 여기서, 두 동사의 주어는 피상적으로 장욱희로 추정되지만, 텍스트에서 주어와 목적어를 의도적으로 생략함으로써 관객의 열린 해석을 이끄는 계기를 마련한다. 특히 이번 전시의 출품작이 '살아있는 식물들'이라는 점에서, 사랑하기와 말하기라는 행위의 주체와 상대방이 누구인지 가늠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작가 아니면 식물(들)이기 때문이다. ● 작가 장욱희는 '화분 식물들'과 어떠한 사랑의 말을 나누고 교감했을까? 살아 있는 오브제에 가한 그녀의 미술적 행위는 어떠한 것이며,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가? 그녀의 작업이 함유한 미학과 그것이 관객에게 전하는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장욱희_사랑했다고 말한다_식물, 오브제_가변설치_2023

Ⅰ. 화분 식물 혹은 반려 식물: 이식된 자연의 재배치와 전유의 미학 ● 장욱희가 전시장으로 가져온 식물은 '화분 식물'이다. 그것은 삶의 인공적 환경 속에 인간의 원고향인 자연을 가까이 두고자 한 인간의 소소한 욕망이 낳은 산물이다. 실내의 공간 안으로 들어온 자연, 즉 화분 식물이라는 '이식된 자연' 또는 '인공 자연'은 자연 그 자체는 아니지만, 자연의 정수를 함유한 무엇으로 받아들여져 도시민에게 심리적 안정을 제공한다. 가히 '반려 식물'이라고 할 만하다. 미세 먼지로부터의 불안을 잠재우는데 효과적인 산세비에리아나 틸란드시아와 같은 공기 정화 식물도 그렇지만, 전자파 차단에 효과가 있다는 선인장 또한 반려 식물로서의 위상을 제고하게 만든다. 번식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금전운을 몰고 온다는 금전수는 또 어떠한가? ● 그렇다. 화분 식물은 인간이 떠나온 자연이라는 원시향을 일정 부분 다시 대면하는 '반려 식물'로서 힐링의 효과를 제공한다. 그래서일까? 도시민은 희귀한 열대 식물들로 작은 정원을 만들고자 하는 홈가드닝(home gardening)의 욕망이나 방울 토마토와 같은 작물을 취하고자 하는 홈파밍(home farming)의 욕망을 '화분 식물'을 통해서 소소하게 실현한다. '반려 식물'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에게 원초적 사랑의 대상인 자연을 다시 정복하고 구속하려는 욕망이 작동하는 셈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화분 식물'은 어쩌면 문명이 발아하면서 시작되었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과 구속의 욕망이 현대에 이르러 팬시(fancy)의 방식으로 '재배치된 자연'이자 '재구성된 자연'이라고 칭할 만하다.

장욱희_사랑했다고 말한다_식물, 오브제_가변설치_2023

장욱희는 '화분에 이식된 자연'인 화분 식물을 통해서 '재배치된 자연', '재구성된 자연'이라는 위상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작업을 실행한다. 그녀가 전시장으로 가져온 화분 식물은 자연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한 채 일상의 환경에 공존하는 반려 식물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재구성되고 재배치된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장욱희는 화분 식물을 기르는 데 필요한 여러 장치와 작물 방법을 원예의 방식을 취하면서도 이번 전시를 위해서 특별히 현대 미술의 방식을 덧붙인다. 즉, 일조량과 통풍을 관리하고 주기적으로 물 주기를 실천할 뿐만 아니라, 곁순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새순을 잘라내거나, 식물의 성장과 수형 관리를 위해서 잔가지를 솎아주는 등 다양한 원예의 방식을 취하면서도 그것을 배반하는 엉뚱한 현대 미술의 작법을 병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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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몇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직립할 수 없는 식물의 줄기를 지탱해 주는 지지대와 같은 오브제를 식물 옆에 세울뿐만 아니라 식물의 몸체를 관통하도록 연결함으로써 마치 보철 삽입과 같은 인간이나 동물의 수술 방식을 취하는 것, 2) 병충해를 입거나 관리 문제로 인해 찢어진 청페페 잎을 색실로 꿰매는 방식으로 살아있는 식물을 마치 섬유 직물처럼 사물화하는 것, 3) 수채화고무나무잎 하나를 스테인리스 스틸봉으로 꽂아서 금전수 몸체에 잇거나 조화 카네이션이나 한 덩어리의 비단 이끼를 마치 다른 식물의 꽃처럼 보이도록 꽂아두는 등, 접목(接木)의 원예학을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나 아상블라주(assemblage)와 같은 미술의 언어로 치환하는 것. ● 이처럼 장욱희는 '화분 식물'을 동물화, 사물화, 미술화와 같은 방식으로 원예의 작법을 뒤트는 다양한 전략을 거쳐 자신의 조형 작업으로 전치한다. 즉 자연이 이식된 화분 식물을 비(非)원예의 방식으로 재구성, 재배치함으로써 현대 미술로 견인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녀의 작업을, '어떤 것을 취하고 그것을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원래의 개념과 기능을 전복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전유(專有, appropriation)의 미학'을 실천하는 생태예술이라고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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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동거 식물: 사랑했다는 행위와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 ● 장욱희의 이번 개인전에는 이종 혼성의 잡종을 만드는 생태적 데페이즈망으로부터 확장하는 전유의 미학뿐만 아니라 비생물인 사물과 생물, 그리고 인간과 식물의 소통을 상상하게 만드는 아포리즘(aphorism)으로 가득하다. 즉 자연과 인간은 서로 사랑했던 연인이었으나 '변심한 인간'이 일방적으로 이별을 선언하면서 떠났고,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비로소 인간이 '한없이 사랑을 주기만 했던 순연(純然)한 자연'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내용을 함유하는 아포리즘으로서 말이다. 달리 말해, 이 아포리즘은 '(야만적이고도 사악한) 인간은 (야생) 자연의 일부이자 곧 자연'이라고 하는 자연주의 미학을 함축한다. 마치, 주인공의 유전자를 물려준 과학 생물학적인 가족사를 사회 환경의 영향과 같은 사회학적 접근을 통해 서술했던 졸라(Emile Zola)의 자연주의 소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 작가 장욱희는 이번 개인전에서 "사랑했다고 말한다"를 되뇐다. 자연을 박차고 떠났다가 뻔뻔하게도 뒤늦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자연으로 되돌아오는 인간의 변덕스럽고도 사악한 본성을 그녀 혼자서 대신 모두 뒤집어쓴 셈이다. 왜 그랬을까? 자연에 대해 잘못한 인류의 모든 과오에 대한 처절한 반성을 되새기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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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반성적 성찰을 위해서 장욱희는 역설적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오래된 야만'을 지금, 여기에 소환한다. 장욱희는, 화분 식물로 대별되는 자연을 전시장으로 가져와 그것을 찌르고, 상처내고 괴롭히면서, 자연 구속에 관한 인류의 오래된 욕망을 자신의 전시장으로 소환한다. 마치 원시인이 들짐승을 잡아 가축으로 만들고 매끈한 땅에 홈을 파서 씨를 뿌리고 작물을 재배하면서 자연을 정복, 구속, 통제하고 나섰던 것처럼 말이다. 인간에게 유용한 식량을 만들기 위해서 유전자 변이를 통해 품종 개량한 씨 없는 바나나로 씨 있는 바나나의 씨를 말려버린 인류! 육종 식물의 끝 간데없는 변이를 몰아세웠던 인류의 야만! 장욱희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야만적 욕망을 '돌보기와 상처 내기'라는 다른 방식으로 소환하고 실현하면서 반성적 성찰을 거듭한다. ● 작품을 보자. 갈라진 청페페 잎을 색실로 바느질한 것은 아픈 식물에 감정 이입해 수술의 방식으로 치유하는 행위였다. 또한 화분 밖으로 삐져나온 몬스테라 보르시지아나의 뿌리를 보듬어 테이크아웃한 일회용 컵 안에 녹차를 담아 거두어들인 것은 식물에게 영양을 주어 돌보아 주는 행위였다. 몬스테라 델리오사 화분에 말라비틀어진 떡갈나무고무잎 하나를 스테인리스 스틸봉에 끼워 접목한 것은 죽어가는 이파리 하나를 튼실한 이종 모체로 구원하려는 긴급 구호의 행위였다.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자태의 떡갈잎고무나무 주위에 스테인리스봉으로 지지대를 만들면서도 식물의 몸체를 관통시킨 것은 마치 인간의 몸에 이식한 보철처럼 수술을 통해 식물을 돌보려는 행위였다. 호접란 꽃을 재단된 나무 위에 올려두거나, 철선으로 표고버섯을 떡갈잎고무나무에, 모란꽃잎을 몬스테라 보르시지아나에 연결한 것은 돌보기를 실천하는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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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라! 그러나 장욱희의 이러한 행위는 화분 식물의 입장에서 보면 아픔과 상처를 심화하는 가학적 폭력일 따름이다. 식물은 생성소멸의 자연의 순환 법칙에 그저 몸을 맡길 따름이었는데 장욱희가 인공호흡과 응급 수술을 시도해서 식물의 생명을 연장하려고 애를 쓰면서 오히려 폭력과 가해를 남용한 셈이다. 식물의 입장에서는 공포스러운 돌보기라고 할 만하다. 작가는 왜 그랬을까? "너는 그것을 폭력으로 보지만 나는 그것이 사랑의 표현이었다"고 말하는 인간의 자연 정복의 욕망과 야만적 행위를, 전시의 형식으로 '지금, 여기'에 소환, 실천하면서, 가슴 저리게 반성하고 성찰하고자 한 까닭이다. ● 이 글은 앞서 장욱희의 작업을 '전유의 생태예술'이라고 평한 바 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폭력적 언어를 취해서 역으로 그것을 해체하고 전복하기 위한 목적을 가시화하는 그녀의 작업은 전유의 미학을 실천한다. 들뢰즈가 분석했듯이, 마치 '프라하 지역 독일어'로 독일의 언어를 해체했던 카프카(Franz Kafka)의 위대한 문학처럼 피식민자들이 식민 종주국의 언어를 취해 그것을 비틀고 탈식민주의의 전유를 실천했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장욱희의 작업은 식물에 감정 이입해서 식물의 입장에서 식민지화의 폭력을 경험하고 그것을 종국에는 산산이 해체하려는 조형 실험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장욱희의 작업에 나타난 이러한 전유의 태도는 이식된 자연의 정체성으로 우리의 삶에 동거하려고 들어온 반려 식물, 즉 동거 식물을 대면하는 현대인의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을 성찰을 견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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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공생 식물: 사랑을 전하는 말 ● 장욱희는 '돌보기와 상처 내기'라는 양가적 행위가 맞물린 전유의 방식을 통해 특유한 입장의 생태예술을 실천한다. 1980년대 한국에서 등장한 '야투(野投, YATOO)의 자연미술이 지향했던 '최소한의 예술적 개입을 통해서 자연의 본성을 성찰하는 생태예술'과는 달리, 반대편에서 '과도한 인공의 예술적 개입을 통해서 자연의 본성을 역설하는 생태예술'을 실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원래 인위를 허락하지 않는 그대로의 상태인 피지스(physis)의 자연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예술적 인위를 그것도 폭력의 방식으로 과도하게 개입시킨 장욱희의 생태예술은 하나의 역설이다. 그것은 일견 계곡을 깎아 인공의 터널을 만든 하이저(Michael Heizer)의 작품이나 벌판 위에 거대한 커텐 장벽을 만든 크리스토(Javacheff Christo)의 대지미술처럼 반(反)환경적인 인위의 특성을 계승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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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들과 다르다면, 장욱희의 작업은 규모의 차원도 있지만, 무엇보다 '상처 내기와 돌보기'라는 상반된 행위가 지닌 이중 함의를 작업 속에 투여해서 생태예술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자연이 맞닥뜨린 구속과 대재난의 상황을 되돌아보게 만든 연출을 통해서 치유의 생태미학을 오히려 강화하는 이런 방식은 남성으로부터 억압받아왔던 여성의 신체 분비물을 적극적으로 작업으로 가져온 페미니즘 아티스트 키키 스미스(Kiki Smith)의 에브젝트 아트(Abject Art)를 떠올리게 만든다. 남성으로부터 받아온 피학의 상황과 여성성을 날것으로 드러냄으로써 그것이 오히려 건강한 여성성임을 강조하는 이런 방식은, 장욱희의 작업에서 인간의 폭력으로부터 무방비로 노출된 자연의 피학적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고 고발함으로써 자연의 본질을 드러내는 생태미학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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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희의 작업은 억압되어 변형된 자연의 본질적 의미와 인간과의 관계를 생태예술로 실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오늘날의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의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특히 사랑의 담론을 자신의 생태예술에 투여하는 까닭에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뿐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혼성된 작업으로 인식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그녀가 제시하는 주제, "사랑했다고 말한다"는 구속과 억압과 관련된 남녀의 관계를 유추하게 만들뿐 아니라, 종(species)의 억압 문제로 확대되어 이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입장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자연'의 입장 또한 반영한다. 즉 생물권, 동물권, 나아가 식물권에 이르는 이러한 자연의 입장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사랑했다고 말한다"의 발화 주체는 작가 장욱희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에 대한 인간' 그리고 '인간에 대한 자연'으로 전이된다. ● 그렇다. "함께 잘 살자"고 공생을 제안하는 주체는 인간만이 아니라 식물일 수 있다. 우리는 작가 장욱희가 전시장에 흩뿌리듯이 설치한 화분 식물들이 이룬 작은 정원과 같은 풍경 속에서 그녀와 식물들이 주고받는 '나지막이 속삭이는 말'을 듣는다. ● "사랑했어. 그리고 지금도 사랑해." (2024.3.13) ■ 김성호

Vol.20231228d | 장욱희展 / JANGUKHEE / 張旭希 / installation

@ 제주비엔날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