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

심수옥展 / SIMSUOAK / 沈守玉 / painting   2023_1022 ▶ 2023_1117 / 목~토요일 휴관

심수옥_그들_패널에 종이, 연필, 아크릴채색, 바니쉬_60×60cm_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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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7:00pm / 목~토요일 휴관

플랫폼 팜파 Platform Pampa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11마길 39 1층 platformpampa.com @platform_pampa

질서의 호위를 벗어난 길, 그 길에서 만나다 ● 회화는 그리는 행위 이전에 예비 작업을 가진다.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침묵적인 예비 작업, 베이컨은 이를 '돌발 표시'라 부른다. 이는 다른 세계의 돌발적 솟아남이라 할 수 있는 표시들로 무의미의 흔적이고, 우연의 얼룩이다. 그에 따르면 돌발 표시는 흔적들과 얼룩들이 작동하는 윤곽의 총체이나 그림 전체를 갉아먹지 말아야 한다. 공간과 시간 속에서 제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돌발 표시는 사실의 가능성이지 사실 그 자체는 아니기에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려서는 안된다. 그가 추상 회화를 경계하는 것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심수옥_언니_패널_종이, 연필, 아크릴채색, 바니쉬_29.5×21cm_2022

돌발 표시는 감각의 생성이다. 감각은 대상을 떠나 빛과 색의 유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 속에 있다. 이때 신체는 동식물의 신체, 집과 문 그리고 계단의 신체여도 상관없다. 회화는 하나의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는 감각의 사태일 뿐이다. 그림 속에 있는 것은 신체이고 그려지는 것은 감각이다. 오직 감각으로 환원되는 형상의 표현이지 모방한 것으로 간주되는 형태의 재현이 아닌 것이다. 결국 앞서 언급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는 감각을 어떻게 사실적으로 드러낼 것인가라는 문제이고 이것이 그림의 특이성을 결정짓는다. 이처럼 돌발적으로 출현하는 감각의 생성으로 그려진 그림은 감상자의 신체와도 공명한다. 베이컨의 인터뷰 내용 - "훌륭한 그림을 볼 때 그 그림은 나를 흥분시킨다기보다 내 안의 모든 감각 밸브를 열어 줌으로써 나로 하여금 보다 격렬하게 삶으로 되돌아가게 만듭니다" - 이 말해주듯 회화의 잠재성은 그림 바깥에서 보다 격렬히 들끓고 있는지 모른다.

심수옥_파란 쪽문_종이에 연필, 아크릴채색, 바니쉬_110×79cm_2023

심수옥의 전시, 『집으로 가는 길』은 전시 공간의 장소성이 부여하는 리얼리티에 의해 감상의 방식이 다양해진다. 전시장 '플랫폼 팜파'는 작가가 현재 거주하는 집이자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이다. 또한 그림 속 집과 문, 계단 등이 집으로 가는 오르막길에서 본 대상을 모델로 했다는 작가의 말이 재차 실제성을 보장한다. 이를 바탕으로 감상자인 우리는 작가의 집으로 가는 그 길도 전시 공간으로 확장시켜 볼 수 있다. 다소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커다란 설치 작품 속을 거닌다는 착각도 가능하고, 그림 속 형상을 오르막길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번지수가 제목으로 표기된 그림도 있으니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 형상들은 일상에서 인식되는 형태와 달리 배경에서 솟아오른 감각의 대상을 절단과 채집이라는 방식을 통해 그려졌기 때문이다.

심수옥_회색 타일의 3층 집_패널에 연필, 아크릴채색, 바니쉬_117×90cm_2023

작가는 실상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았다. 둥글게 만 종이를 통해서 본 듯한 집(회색 타일의 3층 집), 그 집은 그림 속에서 유일하다. 심지어 두 개의 캔버스를 이어서 보여주는 그림 속 집(21번지)은 축대를 그린 아래쪽 캔버스가 더 커서 제단화 느낌마저 주는데 현실의 집은 평지에 있는 신축 건물이다. 찰캉. 찰캉. 주름진 문(파란 쪽문), 버짐처럼 번진 맨드라미(그 집 마당의 맨드라미), 끝없이 쏟아지는 분홍빛 계단(계단 위 집), 이들은 모두 그림 속에서만 어른거린다.

심수옥_언니_패널에 종이, 연필, 아크릴채색, 바니쉬_50×60cm_2023
심수옥_언니_패널에 종이, 연필, 아크릴채색, 바니쉬_60×50cm_2022

작가는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아니 내게 그렇게 전달된다. 서사를 통해 우회하는 지루함을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 발레리는 이를 감각이라 했다. 작가와 마주친 대상들의 신체는 유일한 형상으로 질서의 호위를 벗어난 길에 있고, 우리는 그 길에서 아슬아슬하게 그들과 만난다.

심수옥_그 집 마당의 맨드라미_패널에 종이 ,연필, 아크릴채색, 바니쉬_91×116cm_2023
심수옥_21번지_종이 ,연필, 아크릴채색, 바니쉬_150×196cm_2023

다시 전시장으로 돌아와 그림 속 분홍빛 계단 위 집이 작가의 집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실제 작가의 집은 가파른 계단 위에 있고 전시장 역시 좁은 계단을 중심으로 두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러한 구조가 상상력을 한 번 더 끌어올린다. 집 속에 집이 있는, 계단 위 집 속에 계단 위 공간, 즉 집이 있는 셈이다. 이는 미장아빔(Mise en abyme) 상황을 연출해 우리를 결정 불가능한 장소, 심연에 둔다. 집으로 가는 길은 무엇인가. 집은 무엇인가. 삶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정해진 답이 없는 물음에 놓인다. 그 물음을 쥐고 계단을 오르면서 우리는 벽면에 붙여진 수많은 그림들과 마주하게 된다. 작가의 지난 두 전시, 『없습니다』, 『드로잉 중이다』를 기억한다면 낯설지 않을 형상이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그림들(언니들, 그들)은 혼란의 이미지로 반복된다. 마치 시간의 주름 속에서 펼쳐지고 사라지는 얼룩과 흔적처럼 우글거린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말해졌던 적이 없는 그들은 스스로를 존재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심수옥_언니_캔버스, 패널에 아크릴채색, 종이, 연필_가변설치_2023
심수옥_언니_패널_종이, 연필, 아크릴채색, 바니쉬_29.5×21cm_2023

이제 계단을 지나 우리는 평소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로 사용한다는 반지하 공간에 도착한다. 상상대로라면 이곳은 "집"이다. 거기에는 가정용 프린터로 이미지를 만들고, 이를 실로 꿰맨 투박한 책자들이 전시되어 있다. 지난 전시에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책자는 작가가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스스로 묻고 답한 반복의 과정이 직조된 작업이다. 읽은 책에서 가져온 글쓰기이든, 자신의 글쓰기이든, 책자 속 텍스트들은 또 다른 얼룩과 흔적의 주름이다. 특히 집 주소와 동일한 『437-29』 책자는 집 속에 집을 다시 연출하고, 이러한 반복은 우리로 하여금 어슴프레 작가의 감정을 읽게 한다. 그건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거두어들이지 않는 사물의 정념이다. 경계 없이 흘러 다니다 엎질러진 마음이다. 단단한 길 위에 버려졌던 개와 고양이(작가와 동거하는 살구와 모레), 돌보지 않아도 흐드러지게 피는 꽃, 말해지지 않아도 수없이 반복하는 소녀들, 들락날락 숨 쉬는 집과 문 그리고 계단, 이 신체들과 하나 되었던 손때 묻은 미래의 시간이다. 그렇다면 분홍 계단 위 집은 어떤 집일지 그려 볼 수 있겠다. 집으로 오는 길이 아닌, 집으로 가는 길에서의 집은 수없이 갔지만 아직 가 보지 않은 곳으로 남겨두는 집이다. 끈적이는 붉음이 분홍빛으로 쏟아지기까지 애써 가 보고 또 가 보아야 하는 집. 그 "집"에 유일하게 걸려 있는 그림 속 소녀도 흐릿하게 움직이는 뒷모습만 우리에게 비춘다. 다행히 집으로 가는 길이 멀지 않아 보인다. 애쓰지 않아도 완성되는.

심수옥_계단 위 집_패널에 종이, 연필, 아크릴채색, 바니쉬_207×117cm_2023

전시장을 나오면서 혼잣말을 하였다. "수없이 갔지만 아직 가보지 않은 곳으로 남겨두는 집, 그 집이 내게도 있을까?" ■ 이혜진

Vol.20231022a | 심수옥展 / SIMSUOAK / 沈守玉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