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200527a | 심수옥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수요일 휴관
플랫폼 팜파 Platform Pampa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11마길 39 1층 platformpampa.com @platform_pampa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거두어들이지 않기 ● 보르헤스의 단편 중 「기억의 천재, 푸네스」라는 소설이 있다. 푸네스는 19 세가 되던 해,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되어 실제의 삶을 살 수 없게 되었다. 말에서 떨어져 의식을 잃고 정신이 들었을 때 현재는 거의 견디기 힘들 정도로 너무 풍요롭고, 너무 예민하게 변해 있었다. 게다가 가장 오래되고, 가장 사소한 일들까지도 기억이 났다. 얼마 후 자신이 전신마비 상태란 것을 알게 되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 정도야 아주 작은 대가에 불과하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푸네스는 자신의 기억력을 쓰레기 하치장과 같다고 했다. 상처 나 이가 썩어가는 등의 쉴 새 없이 몸이 늙어가고 죽음이 다가오는 과정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의 곤두선 갈기들, 언덕 위의 가축떼들, 다른 모양으로 바뀌는 불길, 그리고 그것의 셀 수없이 많은 재들, 긴 임종의 밤 동안 수없이 바뀌는 망자의 얼굴들)을 매 순간 이미지로 기억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모든 걸 다 기억하는 푸네스는 청동상처럼 기념비적이고, 이집트보다 더 오래되고 예언과 피라미들보다 앞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연극을 보고 나서 수옥이 모든 생명에 '측은지심'을 느낀다고 했다. 난 그 마음이 동정심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서 수옥은 그때의 말을 이어 짧은 글을 보내왔다. 왜 스스로와 타자의 삶을 '상처'로 보는지, 살아있음의 기쁨보다는 '측은지심'으로 같이 쓸쓸한지, 그리고 어쩌면 이 문제가 자기 작업의 시작 같기도 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부끄러웠다. 나는 수옥의 마음과 작업을 지켜보았다고 하면서도 '같은 마음으로 가지는 그 쓸쓸함'을 헤아리지 못했다. 수옥의 작업을 그림으로만 보았던 것이다. 푸네스처럼 ( ) 사이의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쉴새 없이 죽음으로 향하는 상처로서의 삶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말이다.
수옥은 오 년 전부터 오늘이, 내일이, 모레라 부르는 고양이, 살구라 부르는 개, 꽃들, 풀들, 그리고 소녀들을 그렸다. 비슷한 형상을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이 년 전부터는 색이 점점 사라지고 드로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희미한 선들을 쌓아 올리는 방식의 드로잉은 삶을 발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드로잉은 증식되었다. 버려질 종이에 스캔한 뒤 붉은 징표를 찍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다 올해는 끝없이 내려가는 계단을, 아무것도 담지 못할 케이지를, 너머가 없는 담벼락을, 침묵하는 돌덩이들을 그리고 만들었다. 그들은 불쑥 튀어 오르고, 휘청 나락으로 떨어지고, 당장 사라져도 아무도 묻지 않을 그림자처럼 보였다.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누구도 모르는 현재처럼 보였다. 경계 없이 흘러 다니다 엎질러진 마음처럼 보였다.
보르헤스는 인생을, 세계를 악몽이라 했다. 자신은 매일 밤 악몽을 꿈꾼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악몽(nightmare)을 밤의 악마라는 일반적인 어원 외에 우화를 뜻하는 독일어 메르헨(märechen)을 가져와 '밤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에게 세계는 밤이고, 그의 글쓰기는 '밤의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앞이 보이는 우리에게 세계는 낮이고 다 보이는지 물을 수 있다. 밝은 곳의 어둠은 보이지도, 보지도 않는다. 자세히 보려 하지 않으면 그곳은 밤보다 더 깊은 어둠이다. 물음은 잘 보이지도, 보지도 않는 그 깊은 어둠에서 시작된다. 그 물음에 답은 없다. 단지 서성거리고, 더듬고, 헤맬 뿐이다. 마치 의미가 해체된 ( ) 사이 텍스트처럼, 혹은 부질없는 손놀림이 겹쳐 만든 드로잉처럼 계속 미끄러지고 다시 매달리는 물방울과도 같다.
그 물방울 같은 물음이 수옥은 '측은지심'에서, 푸네스는 쓰레기 하치장 같은 기억에서 맺힌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풍요롭고, 예민하고, 오래되고, 사소한 일들까지 마음을 두고 기억하는 전신마비 상태에서 그들은 ( ) 사이로 걸어들어 간 것이다. 그래서 푸네스는 청동상처럼 기념비적이고, 이집트보다 더 오래되고 예언과 피라미들보다 앞서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고, 수옥은 계단을, 케이지를, 담벼락을, 돌덩이를 그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릴 수 없는 것들이 출렁대다 굳어졌는지 모른다. 끝없이 내려가고, 아무것도 담지 못하고, 너머가 없고, 그리고 침묵하는 세계를 드로잉 중인지 모른다.
수옥은 삶을 '상처'로 보는 것이 자신과의 불화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측은지심'의 근원은 잘 모르겠다고, 드로잉이 이를 찾는 과정인 것 같기도 하다며 글을 맺었다. 당연하게 잘 지내면 어둠은 보이지 않는다. 그 불화가 물음의 시작이고, 수옥에게는 작업의 시작이 되었다. 예술은 그 불화의 상처가 죽음으로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여기서 죽음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닌 '나'라고 여겼던 주체의 죽음을 가리킨다. 수옥은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과 화해한 것이 아니라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타자와의 경계를 지워나갔던 것이다. 이 행위가 같이 쓸쓸해질 수 있는, 바로 '측은지심'의 근원이 된다. 수옥이 헷갈렸던 것은 '측은지심'이란 말이 주는 느낌 때문에, 아니면 경박한 나의 말이 만든 느낌 때문이다. 이 느낌이 우리의 눈앞,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밝음이다. 느낌일 뿐인데도 사실인 것처럼 여겨지는 이 헷갈림으로 우리는 상처받기도, 열광하기도 하면서 늙어가는지 모른다. 그러나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계는 우리가 ( ) 사이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 )에 대해 무수히 기억하게 하고 드로잉하게 한다. 희미하지만 명료한 물음 앞에 설 수 있게 한다. 그리고 행위하는 ( )가 되어가게 한다. … 수옥은 드로잉 중이다. ■ 이혜진
Vol.20220804c | 심수옥展 / SIMSUOAK / 沈守玉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