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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23_0713_목요일_04:30pm
이기수 장편다큐멘터리 시사회
1부 / 04:30pm 2부 / 06:50pm (총 4시간 15분)
주차 가능하고 주차증 드립니다.
KU시네마테크 서울 광진구 능동로 120 건국대학교 예술문화관 B108 Tel. +82.(0)2.446.6579 cafe.naver.com/kucinema
아마도 처음 이 영화작업을 생각하게 된 것은 이맘때인 것 같다. ● "고루한 질문으로 되돌아가보면 어떨까? 예전 INTERVIEW 작업이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2017년 5월 22일) ● 2004년 당시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면서도 엉뚱했다. "왜 우리는 자신이 하는 미술에 대해서 진지한 대화를 피하는 걸까?" 솔직한 발언은 경솔함으로 이탈해 버릴 위험이 있고 진지한 주장을 계속하다 보면 혹시나 자신의 예술론이 바닥을 드러낼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작가들은 자신이 하는 전문적인 작품 활동에 대해서 말을 아끼고 어떻게 보여 질 것인가에 대해서 신경을 쓴다. 그것이 미덕이고 결국 자신에게 득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 작업은 그런 태도는 아니다. ● 모두가 농담을 하는데 한 사람만 진지하면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사람이고 모두가 진지한데 한 사람만 농담을 하면 그 사람은 무례한 사람이 된다. 이 영화가 그렇다. 눈치 없고 고지식한 사람이 분위기 파악 못하고 던지는 식상한 농담이기도 하고 때론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무례한 요구이기도 할 것이다. ● 이렇게 모호하고 힘들게 만드는 질문을 굳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조리한 질문을 작가가 부정하고 방어하는 과정에서 혹시 중요한 생각이 드러나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질문으로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공격할 때, 짜증과 답답함이 느껴지고 방어기재가 작동하는 것을 본다. 심지어 그들을 더욱 분노케 하는 것은 어쩌면 내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가 있다는 것이다. 질문이 없는 대답이다. 영화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말이지만, 정확히는 대답할 사람의 현재 관심사나 바로 앞의 대화 주제 또 일부분은 그의 예술관에서 질문의 요지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정교한 질문에서 기대할 수 없는 의외의 대답들, 마치 '맥루언의 매체론'처럼 어수룩한 질문의 구멍을 애인이 대답에서 메꿔주는 형상이랄까... 그렇게 애초에 대화의 목적에서 기대하지 못했던 의미 있는 발언, 궁지로 몰 때 그에 상응하는 반격의 신선함을 기대한다면 무리한 상상일까... 그래서 질문은 없이 대답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 "예술가의 딜레마는 중요치 않다, 우리가 그의 예술을 고려한다면. 하지만 그의 예술을 보다 폭넓되 덜 명백한 딜레마의 강렬한 반영으로 여긴다면 중요할 수 있다." (1953년 8월20일)* ● "나는 작가에게 '우문현답'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우문이異답'을 기대한다. 작가들에게 명석한 대답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송은영의 말대로)그들은 그렇게 훈련되지 않았다. 하지만 엉뚱한 대답은 기대할 수 있다. 우매한 질문과 이질적인 대답은 그 틈이 넓을수록 생각 해 볼만 한 것이 더 풍부해질 것이다." (2022년 10월 28일)
2004-2005년 그리고 2022년 작업 공정은 같다. 질문 여덟 개가 작가들에게 던져진다. 준비되지 않은 그들에게 갑자기 던져진 질문은 대답이 쉽지 않다.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Communication 미술을 통해 대중과 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2. Criticism 한국에서 미술비평은 잘 기능하고 있는가? 3. Uniqueness 미술에서 희소성의 가치를 어떻게 보는가? 4. Creativity & Originality 미술에서 창조성 또는 독창성은 중요한가? 5. Quality 고급미술과 저급미술은 존재하는가? 6. Form & Notion 미술에서 형식과 내용 중 무엇이 중요한가? 7. Art 예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8. Fine Art 순수미술은 존재하는가?
하지만 괜찮다.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을수록 대답의 정직함은 멀어질 수 있다. 사실, 정직함은 내가 더 문제가 많다. 솔직한 질문의 요지는 이랬다.
1. Communication → 대중과 소통은 불가능하다. 2. Criticism → 한국에서 미술비평은 잘 기능하지 않는다. 3. Uniqueness → 원하든 그렇지 않든 희소성의 가치는 영원 할 것이다. 4. Creativity & Originality → 미술에서 창조적 또는 독창적인 작업이 가능하긴 한가? 5. Quality → 미술에서 고급저급은 존재한다. 6. Form & Notion → 내용 못지않게 형식도 중요하다, 어쩌면 더 중요하다. 7. Art → 예술이 도대체 무엇일까? 8. Fine Art → 순수'한' 미술은 있어야하지 않나...
이것은 영화 스토리에 대한 스포일러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 진 않았다. 나의 생각에 대한 스포일러는 된다. 영화를 보는데 참고는 될 것이다. ● "예술은 기능인가 목적인가? 예술은 발언인가 효과인가?" (2019년 11월 19일) ● 사람들이 나에게 왜 스스로에겐 그 난처한 질문은 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미 반복적으로 질문을 하면서 그럴싸한 문장으로 대답을 무장해 놨거나 이제는 도통 모르겠어서 그 의지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동기의 말대로)그럴싸한 문장을 말한다면 이렇다.
'예술은 무엇인가'를 나에게 묻는다면, 생각 하나, 과학이 지식을 찾고 철학이 진리를 쫓으며 항구적인 지속성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라는 면에서 예술은 그것들과 관련이 있는 듯하지만, 그것들은 과거를 부정하면서도 전제로 삼는 반면에 예술은 부정도 하지 않고 전제에도 관심이 없다. ● 생각 또 하나, 예술이란 동일 시간대의 횡단에서 가능해지는 시각적 현현顯現이 아니라 시간의 종단이라는 연속성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가령 과거의 것들이 현재에 와서 예술로 인정되듯이, 결국 예술에 대한 판단은 항상 현재에 위치한 횡적 시간대의 시점에서 결정할 수 없고 계속해서 지연되거나 유보되는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 그러나 여기까지는 예술의 정의가 아니다. 예술의 성질을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생각해 보자... 다시 생각, 예술이란 시간상의 횡단면으로 정의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시간의 흐름의 지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정의의 순간 무효화 되는 어떤 것, 역설적으로 횡단적인 규정의 연속으로 종단적인 흐름의 지속이 가능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 세 번의 '어떤 것'이 전부다. ● 뭐냐 이거, 작가들에게 명쾌한 대답을 요구하면서 정작 나는 말이 모호하다. ● "예술? 그 입 다물라!" (2017년 1월 16일) ● 나의 장황한 글 속에서 그나마 하나의 맥락을 짚는다. 시간이다! 적어도 예술을 시간성이라는 정황 속에서 파악하려 하는 것은 분명하다. 다행인지 미천한 상상력인지 이것은 순수미술에 대한 생각에서도 일관성?을 보인다. ● '순수미술이 존재하나'를 생각해 본다면... 순수미술은 존재 가능하다. 단, 그것을 정의할 때 그 대상은 지금 여기라는 존재의 사안이 아니고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사안이다. 즉, 어떠한 미술작품도 시간상의 지점에 따라 순수성은 획득될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다. 앞선, 예술의 성질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이기도 한데 19세기 상업적 목적으로 제작된 포스터가 시간의 경과로 예술작품으로 자리매김 하기도 하고 20세기 강박적인 추상회화가 자본주의적 욕망에 의해 상품적 조건을 과도하게 갖추게 되는 이치가 그것이다. ● 이것도 너무 장황한가... 이정도 비교는 어떨까? 무지와 순수는 비슷해 보이지만 '의지의 유무'에 차이가 있다. 무지는 의지를 결여하고 있지만 순수는 의지를 가진 행위이다. 쉽게 부서져 내릴 것 같은 '순수'라는 말에서 '의지'라는 강력한 의미를 끄집어내니 왠지 믿음이 생긴다. 정말 순수, 엄밀하게 말해서 '순수한' 뭔가는 있지 않을까 하는... 많은 작가들의 말대로 그거라도 있어야 계속하지 않겠나. ● 이 영화는 '실천론'이다. 얘기하고 싶은 것은 미술이론이 아니다 '작가실천'에 대한 영화다. 그 안에서 다루어지는 이론은 심도 깊은 것도 아니고 새로운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작가 태도'에 대한 완곡한 지적이며 '작가 의무'에 대한 무례한 요구이다. ● "여러분, 예술은 무엇일까요? 미술이란 것이 우리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듯 그저 자유롭게 그리면 그것으로 족한 걸까요? 난 오늘 하루도 성심껏 붓질을 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고 하루 더 화가로 산건가요?" (2020년 6월 21일) ● "부르즈아 사회가 점점 더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창의력을 파괴하고 타락시킴에 따라, 상상력이 깃든 창조의 경험은 점점 드물어지다가 결국에는 창조에 어떤 마법 같은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1954년 1월 3일)* ● 하지만 이 영화는 성공하기 어렵다. 2004-2005년 작업이 그랬듯이 어쩌면 애초에 실패를 기정사실로 하고 시작한 것이기도 하다. 왜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다. 모든 행동의 시작이 성공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지 않는가. 이 지루한 작업을 도발하게 했던, 어떤 신념으로 무장하고 싶었던 나의 어슴프레한 예술론 따위는 많은 작가와 대화를 나누며 작업이 진행될수록 여지없이 무너지고 솔직히 길을 잃었다. 이론서 몇 권에서 얻는 다부진 신념은 나이 먹으며 관대해지는 (지원진의 말대로)작가들의 현실 삶에 미치지 못한다. 내가 생각하는 이 작업은 고고학자의 공룡 발굴과 같다. 공룡의 실체도 확실치 않은데 빈약한 뼈 부스러기들로 퍼즐을 맞추는 행위이며 심지어 한 공룡의 뼈도 아닌 것을 한 몸으로 엮는 일이다.
미술도 결국은 '기록'이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현재는 '표현'이지만, 그것은 결국 기록이 된다. 이번 작업은 세 가지로 분리되어 기록되었다. 하나는 영화이고 또 하나는 (유튜브)영상아카이브이고 나머지 하나가 여기 정리된 글 (대화집)이다. 세 가지 방식은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으나 그 양이나 방식에서 매우 다르다. 영화는 내용을 빠르고 매끄럽게 전달한다. 하지만, 잘게 난도질 되어 맥락을 잃고 먼지처럼 부유하면서 아무 의미 없이 사그라질 수 있다. 심지어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게 변질되기도 한다. 영상아카이브는 그에 비해서 고지식하지만 충실하게 내용을 전달한다. 작가 억양의 강조점이나 표정 그리고 발언 사이의 침묵 등 모든 것들을 포함한다. 이것은 중요한 사안이다. 하지만, 많은 양은 과도한 인내력을 요구한다. 세 번째로 글이다. 글은 셋 중에 가장 분량이 적어 내용 전달의 디테일에 약점이 있다. 그러나 앞선 두 방식이 시간을 기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면 글은 그것에서 자유로워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 모든 부분을 동시에 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구식이 가장 최신이 되는 경우가 이런 것 아닐까... 이 영화도 이렇게 의외의 것이 있기를 바란다. ● "그림이 매우 제한된 예술이라는 걸 깨닫는 건 더없이 중요하다. 이건 어떤 의지의 빈곤에 따른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활용할 수 있는 표현 수단이 풍부해진 결과다. 조토가 오늘날 살아 있었다면 당연히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고야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라파엘로, 피에로, 티치아노, 푸생, 세잔은 아니다." (1954년 8월10일)* ●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미술과 영화는 닮아 있는 '어떤 것'인가 보다. - INTERVIEW 작업노트 '영화를 위한 변명' (2022. 11. 8) ■ 이기수
* 존 버거의 소설 '우리 시대의 화가' 인용 (강수정 옮김, 열화당)
Vol.20230713b | 이기수展 / LEEKEESOO / 李基洙 / fil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