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내리다 The moon rises in my heart

김지수展 / KIMJISU / 金芝秀 / painting   2023_0310 ▶ 2023_0514 / 월~목요일 휴관

김지수_달의 꿈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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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목요일 휴관

삼자갤러리 SAMZA GALLERY 경남 남해군 삼동면 동부대로1876번길 4 (지족리 281-7번지) 2층 Tel. +82.(0)10.4798.6671 blog.naver.com/samzagallery

명경지수(明鏡止水), 존재의 공감과 기억의 질감 ● 가상공간의 시대다. 평생 제 손으로 땅을 일군 농부도 이제는 유튜브를 보면서 새로운 농법을 시도한다. 인간이 늘 꿈꾸던 시공간의 초월에 대한 욕망은 이제 첨단 공학을 매개로 하나하나 현실이 되어 현재 메타버스라는 확장된 가상공간에 이르고 있다. 이런 세상에 변신의 귀재인 미술 또한 디지털 회화 등으로 자기 영역을 넓히면서 가상 현실을 매개로 디지털 정보를 조형적으로 재구성한 작업을 시시각각 선보이고 있다. 디지털 기반의 미술의 등장은 단순히 미술에 대한 형식적 개념의 확장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대체로 장르의 확장이 사조의 변화를 대체하는 20세기 후반 이후의 미술사 혹은 회화사에서 특히 탈물질성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매체와 공간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적 차원의 의미를 수반한다. ● 전통적인 회화를 고수하더라도, 제 그림에 제대로 몰입하는 화가의 내면은 이제 크게 보아 디지털 정서에 기초한 탈물질적 공간성과 감각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표현할 수도 있고, 반대로 전통적인 육필의 감성과 물질화된 사유에 더욱 몰입하는 식으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김지수 작가의 그림이 나아가는 방향이 바로 후자에 가깝다. 그런 맥락에서 작가의 회화적 태도에서 돋보이는 것은 '무엇을 그릴 것인가'보다 '무엇을 담을 것인가'이다. 물론 이 둘 사이의 의미는 직접적이냐 혹은 은유적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동일하다. ● 하지만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주체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대상'이 전제된다면, '무엇을 담을 것인가'는 대상이 아닌 곧이곧대로의 '존재'를 부각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또한 무엇을 담을 것인가에는 화가의 마음을 강조하는 의미가 내포된다. 마음을 강조한다는 것이 곧 주체의 강조와 통할 수 있으므로 이 말은 모순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은 화면에 대상을 구성하는 주체적 의지의 의미를 넘어 대상이 아닌 사물의 존재 그 자체를 새기는 마음가짐을 뜻한다는 점에서 모순을 탈피한다. 작가에게서 그림은 형식상 '마음 그릇'으로서 동아시아 전통 회화에서 강조한 '마음의 경관(心境)' 혹은 '마음의 거울(心鏡)'과 통한다. ● 작가의 그림 내용에서 먼저 눈여겨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물 존재를 바라보는 그만의 시선이다. 작가가 날마다 사경하는 금강경에는 세계를 관찰하는 다섯 가지의 눈이 등장한다. 주지하듯이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이 그것이다. 위계를 가진 다섯 가지의 눈은 물론 종교적 깨달음과 연관되면서 동시에 종교적 차원과 다른 회화적 관찰과 깨달음의 차원에서 전통적으로 강조된 '심안(心眼)', 즉 '마음의 눈으로 보기'와도 통한다. 그런데 작가의 그림에서 그 시선은 시각적 깨달음 내지 미적 깨달음으로서 '심안'에 기초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그만의 보기 방식이 있다. 그것을 나는 '월안(月眼)', 즉 '달의 눈으로 보기'라 이름 짓고자 한다. 달은 작가의 최근 그림에 직접 등장하는 사물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작가의 시선이 아닌 작품에 들어 있는 달의 시선이라는 것은 문학적 은유로서는 심미적이나 미학적 해석의 처지에서는 너무 추상적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것은 작가의 마음을 달에 투사해서 보는 것이다. 작가가 자기 마음에 뜬 달에 사물의 제 모습을 비춰 밝히는 것이며, 작가가 사물을 그린다기보다 달빛에 비친 사물이 스스로 제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방식의 그려보기다. 다시 말해 그것은 곧 '그' 사물의 처지에서 세계를 바라본다(그린다)는 것을 뜻한다.

김지수_달의 꿈_캔버스에 유채_80.4×99.5cm_2023

동아시아의 언어 전통 가운데 특히 문학적 비유의 차원에서 달의 또 다른 이름은 '명경(明鏡)', 즉 '밝은(맑은) 거울'이다. 늘 동경의 대상이었던 달이 작가의 마음의 투사로서 그림 속에 자리 잡을 때 거기에는 자연스레 은은함과 고요함을 수반한 맑은 거울의 정서 또한 스며들게 된다. 현실의 작은 정원을 구성하는 사물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달빛의 반사와 흡수를 통해 종래 가장 내밀한 제 본색을 드러낸다. 홍매화는 달의 시선(달빛)에 의지해서 존재 그 자체를 세계의 거울에 한껏 비추어 밝힌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은은함과 고요함에 깃든 사랑과 자유의 색상과 채도의 만개를 몸소 체험하게 된다. 그랬을 때 환영으로서의 그림은 비로소 살아 있는 사물의 찰나성을 초월한 영원성으로서 자리 매겨진다. 또한 그랬을 때 비로소 실재와 환영, 현실과 꿈은 서로 분간할 수 없는 존재 사태로 융합된다.

김지수_푸른달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21
김지수_달의 꿈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22

작가의 그림은 작가의 달눈의 시점에서 자기 앞의 정원 공간을 바라보는 그 장면 그대로를 현시한다.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달과 꽃과 새와 물과 하늘과 땅 등은 현실에서 가져온 것이면서도 현실에서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가장 극적으로 부각한다. 그래서 그것은 현실적이면서도 초월적인 풍경을 구성한다. 달의 존재 속성은 '떠 있음'이다. 작가가 달뜬 눈으로 세계와 사물을 바라볼 때 꽃은 '피어 있음'으로써 존재하고, 새는 '(나뭇가지에) 앉아 있음'으로써 존재하거나 '(물에) 떠 있음'으로써 존재하고, 물은 '멈춰 있음'으로써 존재한다. 사물들이 각기 제 속성 그대로 드러나 현실을 초월하고 있을 때 발견하는 것은 바로 작가가 사물을 바라보는 거리다.

김지수_달의 꿈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22
김지수_달의 꿈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23
김지수_부엉이의 꿈_캔버스에 유채_53×45.2cm_2023

달빛에 노출된 현실의 한 장면 그대로가 현시될 때 작가와 사물 간의 사실적인 거리는 매우 가깝다. 그러나 또한 거기에는 가까움의 중용이 있다. 노출된 새가 자기 존재의 속성을 파괴하지 않는 딱 그만큼의 거리, 다시 말해, 새가 작가의 낌새를 알아채고 날아가지 않는 선에서의 지근거리다. 마찬가지로 그 거리는 홍매화가 눈치 보지 않고 만개하는 거리이자 원앙이 물의 파문을 만들어내지 않는 거리이자 부엉이가 달눈을 뜨지 않는 거리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사물의 속성을 파괴하거나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장면을 연출한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또한 사물을 주재하지 않고 존재하게 하는 진실한 공감대를 구축한다.

김지수_달의 꿈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22

순환론적 비유(적 해석)이긴 하나 '사물을 주재하지 않고 존재하게 한다'는 것은 곧 사물이 그림 속에서 제대로 살아있게 한다는 소리다. 작가의 그림에서 그러한 생동성을 포함해서 최종적으로 작품성을 견인하는 것은 바로 묘사의 방식과 연관된 색채의 질감이다. 작가의 그림에서 달과 물을 배경으로 홍매화의 흐드러진 만개가 존재의 찰나와 영원을 매개하고, 새의 생동하는 자유와 활짝 핀 사랑 역시 꿈과 현실을 매개하지만, 그것들이 단순히 도상적 차원에서 묘사된다면 어떻게 표현되든 그것은 특별한 향기를 내지 못하는 시각적 눈요기에 머물고 말 것이다. 작가의 그림이 색채와 형상으로써 무리한 묘사를 하지 않음에도 충분히 사실적인 것은 바로 다소 평면적인 묘사 방식을 압도하는 질감 표현 때문이며, 질감으로 환원된 색감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물리적인 무게를 넘어 화사한 중후함을 발산하는 것이다.

김지수_달의 꿈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22

작가의 그림에서 질감은 다름 아닌 유화 물감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사변적으로 보면 사물에 대한 각별한 기억을 되새기는 과정이라 정의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유화 물감이라는 화학적 재료로 환원된 시간이기도 하다. 작가의 그림이 육안이 아닌 월안으로 사물이 제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나게 하는 방식이라 말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이론적 근거가 바로 두꺼운 물감의 질감에서 파생된 퇴적된 시간과 기억의 질감에 있다. 작가에게서 물감칠과 형상의 묘사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물감을 쌓아 올리면서 형상을 구축하는 형태를 띤다. 비록 흰 바탕에서 시작하지만, 중간중간 완성될 듯한 그림이 끊임없이 새 바탕이 됨으로써 종래 겹겹이 쌓인 물감의 질감에 색감을 우려내어 사물 본래의 가장 안정된 색깔을 수반한 형상을 드러낸다. 마치 약탕기에서 한약을 우려내는 것처럼 화면의 색상과 명도와 채도는 특정 사물의 가장 농밀하고 내밀한 순간을 포착할 때까지, 사물이 자기 스스로 존재를 드러낼 때까지 끊임없이 조정된다. 이와 같은 붓질은 채색이라기보다는 '떡칠'에 가깝다. 수없이 겹쳐 쌓은 물감의 지층에서 우러나오는 숙성된 색은 달에 비친 꽃과 새의 한시적 아름다움을 영원의 범주로 고착시킨다. 새로운 것은 거듭된 떡칠이 사물 존재의 화사함과 가장 극적인 장면의 고요와 경쾌함을 전혀 침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지수_부엉이_캔버스에 유채_53×45.5cm_2022

부엉이는 작품성의 근거를 살펴보는 마지막 계기다. 알다시피 부엉이는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그의 『법철학』 서문에서 말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드는 무렵에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에서 비롯하여 지혜와 철학을 상징한다. 하지만 작가의 말에 의하면 그림에 등장하는 부엉이는 달마의 의인화다. 그러고 보면 달의 눈을 가진 존재로서 부엉이의 지그시 감은 눈에서 내면을 향한 시선, 즉 각성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작가의 부엉이는 각성한 채로 밤의 정원을 '지키고 있는' 존재로서의 성격이 더욱 돋보인다. 달빛에 드러난 농밀한 색의 꽃을 통해 순간과 영원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새를 통해 자유와 사랑의 진실을 이야기한다면, 부엉이는 내면적 각성에서 비롯한 관심과 관조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생태적 파수꾼이다.

김지수_달의 꿈_캔버스에 유채_41×31.9cm_2022

부엉이를 비롯해 김지수의 그림 그릇에 담긴 것들은 전통적이며 종교적인 색채를 띠는 사물이면서 사실은 작가 자신의 기억의 정원을 구성하는 체험적인 것들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작품이 순간적 생멸의 사물로부터 영원을 각인하는 계기는 사물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밝히는 감성과 사물의 존재 기억을 회화적 시간으로 환원하는 색채의 질감 외에, 최종적으로는 그러한 것들을 생태적 파수의 관점에서 자연스럽게 바라보는 데 있다고 본다. ■ 정석도

Vol.20230310c | 김지수展 / KIMJISU / 金芝秀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