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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광교 Art Space Gwanggyo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광교중앙로 140 (하동 864-10번지) 수원컨벤션센터 B1 Tel. +82.(0)31.228.4195 suma.suwon.go.kr
우리는 어떤 노래인가? - 김리윤 개인전 『Emotonal landscape_감성 풍경: 잔상(殘像)에서 환상으로』에 부쳐 - "살아있음"이라는 아름다운 환상 ● '감성 풍경'의 화가로 대중에 잘 알려진 김리윤은 사진으로 남아 있는 존재의 흔적에서 사진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감성적 실체를 발견해 왔다. 사진을 찍는 행위, 사진으로 박제된 풍경, 사진이라는 과거와 그것을 보고 있는 현재, 사진 속 타인들과 그들로부터 발견되는 '나'..., 작가에게 사진은 현실의 리얼리티를 떠난 무언가이며, 삶과 죽음에 관한 사유를 일으키는 하나의 존재론적 사건이다.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자 롤랑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 1915-1980)가 전언하듯이, 사진이 안고 있는 것, 사진이 겨냥하는 것, 사진이 말하는 것은 "죽음"이며, 이 "죽음"이야말로 사진의 본질(Eidos)이다. 나아가 바르트는 사진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사유의 잠재태를 '노에마(Noema: 생각하는 바 혹은 의식의 지향성이 갖는 대상면)'로 확대 정의하면서, 노에마를 "그것이-이미-존재했음"을 말하는 사유작용의 대상, 또는 "그것이 어디에 있었다"라고 하는 무한한 저편과 주체 사이에 펼쳐진 사유의 암시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진을 볼 때 그 장면이 아무리 즐겁고 생기있는 순간이었더라도, 늘 아련하고 슬픈 감정에 휩싸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진은 '과거의 순간'과 그것을 바라보는 '지금'이라는 시간 차이가 주는 불안한 정서적 동요, 즉 우리가 그때 그 순간으로부터 죽음에 더 가까워졌음을 강하게 환기하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사진 앞에서 나는 주체도 대상도 아니고, 대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을 느끼는 주체다. 나는 죽음의 미소한 버전을 경험하고 있다"라고 힘주어 말하듯이, 김리윤에게 사진 속 현실은 삶의 생명성을 회복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대상이다. 작가는 우리를 스쳐 간 모든 잔상(殘像)에 "살아있음"이라는 '아름다운 환상'을 부여하려 한다. 현실적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공상이 '환상'의 사전적 정의라 할지라도, 우리 영혼은 언제나 삶의 환상을 지극히 실존적인 것으로 대한다는 것을 작가는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는 이러한 이해의 충실한 증거이며, 겸허한 암시이다.
심리적 뉘앙스(nuance)로서의 회화 ● 김리윤의 개성 넘치는 붓질과 채색법은 그동안 수많은 작품을 탄생시켰고, 이 작품들은 과도한 이론적 환원의 도움에 기대지 않고도 특유의 정서적 표현과 회화적 멋으로 감상자들의 공감을 얻어 왔다. 작가가 늘 말하듯이, 그의 회화는 어떤 특정 이론이나 이념적 지향성의 실천물이 아니다. 그의 고민은 지속 가능하고 본질적인 것에 관한 것으로서, 자신의 회화로부터 삶과 생명에 직결된 사유가 끊임없이 발생하는가이다. 그래서 작가의 회화는 대상을 정의(定義)하거나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메타언어(méta-langage)가 되고, 대상의 고유성을 떠남으로써 대상에 자유를 부여한다. '보이는 것'(사진적, 감각적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것'(회화적, 초월적 현실)으로의 여행, 즉 고정된 존재의 상태에서 고정되지 않는 '존재의 의미'(sens d'être)로의 전환은 이렇게 자유의 언어와 함께 이미지의 세계로 던져진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세계가 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지만, 그보다 더 확실한 힘으로 나의 영혼을 찌르고 뒤흔드는 세계가 있다. 우리가 영혼을 갖춘 존재임을 말할 수 있으려면, 바로 이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 과정은 무척 혼란스럽고 고통스럽지만, 나에게 아름다움이란 온갖 잔상과 환상, 상처와 회복, 뿌듯함과 미안함이 서로 뒤엉킨 이 험난한 풍경 속에서 어린아이의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다." (김리윤, 2021 작업 노트 中)
위와 같은 고백처럼, 김리윤의 회화가 지닌 형태와 색조 그리고 구성과 배치는 대상성을 향하지 않고 작가 자신의 심리적 뉘앙스를 진술한다. 따라서 작가에게 잔상은 과거 사실의 분절이라기보다는 현존재(現存在)에 내재한 심리적 파편, 혹은 정신에 남은 흔적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잔상은 시각에 있어서 자극이 없어진 뒤에도 감각 경험이 연장되거나 재생하여 생기는 상(像)을 뜻한다. 그렇다면, 시각성을 떠나서 우리의 정신에 일어난 사건으로 볼 땐 어떠한가, 이때의 잔상은 일상적 사건은 물론 모든 생명 행위 이후에 연장되고 재생된 관념 이미지일 것이다. 그리고 이 정신적 잔상들은 우리 존재가 발산하는 색과 형태, 느낌과 태도에 개입하며 '영혼의 구성물'로 성장하게 된다. 존재의 흔적으로서의 잔상은 우리의 물리적 현실을 직접 지시하진 못할지언정, 실재(實在)라는 잠재적 세계를 찾기 위한 소중한 길라잡이가 된다.
결국, 잔상은 혼란도, 과장도, 그렇다고 변덕이나 가상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함"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건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하나의 거대한 느낌이며, 언어적 인과성을 초과한 우발적 푼크툼((punctum)이다. 느낌의 심연(深淵)에 흩뿌려진 영혼의 잔상은 그래서 시적(詩的) 은유와 미적 환상으로만 그 형태를 갖출 수 있다. 추억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의 모양새가 노스탤지어와 멜랑꼴리의 리듬감을 의무처럼 짊어지고 있고, 추억을 떠올리는 순간 모든 이들의 심장이 일상의 냉정함을 이기고 존재의 뜨거운 체온을 회복하듯이 말이다. 김리윤이 영혼의 잔상을 존재의 '에이도스(Eidos: 형상-본질)' 문제로 이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2021 「잔상(殘像)」 연작 ● 그동안 작가는 비교적 안정적인 구도와 통일감 있는 색조 그리고 대상성의 친밀한 기호적 작용을 토대로 삶의 감성적 모양새를 다듬어 왔다. 이러한 비교적 '조화로운' 분위기 안에서 작품들은 형태의 모호함과 이중성, 채색의 번짐이나 생략 등을 자유롭게 펼치며 우리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 새롭게 발표되는 「잔상(殘像)」 연작에서는 첫눈에도 큰 조형적 변화가 감지된다. 우선, 작품 이미지가 해체적 특성을 도드라지게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작풍(作風)의 변화는 케케묵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déconstruction)를 위한 것도, 무의식의 초현실적 발상을 위한 것도, 그렇다고 형식의 파괴를 위한 것도 아니다. 작가가 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밝힌 바에 따르면, 신작(新作)의 해체적 특성은 그의 일관된 주제의식의 또 다른 표현으로서, 오롯이 작품의 환상적 분위기를 증폭하기 위한 일종의 조형적 장치이다. 나아가 작가는 "환상이란 아름다운 존재나 대상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 그 숭고하고도 내밀한 우리의 삶을 그리기 위한 시공간"이라고 덧붙인다. 작가에게 해체적 분위기의 환상은 환영(幻影)도, 가상(假像)도 아닌 '존재의 실재'에 연루된 지극히 미학적인 공간이다. 부연하자면, 작가는 진실의 환상이 아니라 환상의 진실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이번 『감성 풍경: 잔상(殘像)에서 환상으로』 展에서 한 단계 더 진전된 작가의 예술적 자유와 시적 허용, 그리고 이 무규정적인 미감으로 인해 발생하는 풍요로운 정서는 관객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얼핏 '결과의 미완성'으로도 보이는 그의 작품은 관객들의 심리적 동요와 함께 '시작의 완성'으로 향할 것이 틀림없다.
고정된 영혼에는 음악이 흐르지 않는다. 리듬(Rhythm), 선율(Melody), 화성(Harmony)은 물론, 악기의 발성과 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정동(affect, emotion)은 모두 변화의 산물들이기 때문이다. 자연도 변화의 되풀이가 있을 때 노래가 되고 영혼을 갖춘 생명체가 된다. 아름다운 존재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려짐으로써 아름다워지는 존재, 생명을 타고난 존재가 아닌 생명을 노래하기에 살아 숨 쉬게 되는 존재..., 그렇게 화가 김리윤의 잔상과 고된 예술 노동 안에는 "살아있음"이라는 환상이 교향곡처럼 흐른다. 바로 이러한 생명의 율동감과 확신에 찬 느낌만이 죽음의 트라우마로부터, 그 상실과 허무의 억압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회화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표현, 그 신비로운 영혼의 에이도스는 애초에 이것을 목적으로 탄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이재걸
Vol.20211221a | 김리윤展 / KIMRIYUN / 金利潤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