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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 / 호리아트스페이스 기획 / 아이프아트매니지먼트 후원/ 원메딕스인더스트리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공휴일 휴관
호리아트스페이스 HORI ARTSPACE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80길 26 (청담동 95-4번지) 노아빌딩 3층 Tel. +82.(0)2.511.5482 www.horiartspace.com
아이프 라운지 AIF Lounge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80길 26 (청담동 95-4번지) 노아빌딩 4층 Tel. +82.(0)2.518.8026 www.aifnco.com
변웅필 – 회화는 세련된 감각의 결정체다. ● 화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서양미술사를 정리한다. 20세기 후반부를 대표하는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말처럼, 화가는 작품으로 이전 시대의 흔적과 영향의 바탕을 극복하고 동시대 미술의 현재와 미래를 풀어놓아야 한다. 과거에 발목잡히거나 동시대와 조응하지 못하고, 일시적인 유행에 휩쓸려서는 미술애호가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요즘 애호가들은 유명 철학자나 이름난 비평가가 칭찬한다고 자신의 취향을 꺽고 좋은 작품이라며 콜렉팅하지 않는다. 물론 너나없이 그림을 사야한다며 국내외 아트페어가 북적이고, 뒤늦게 미술시장에 발을 디딘 초보 콜렉터들은 '삼성전자나 테슬라 주식같은 작품'이 뭐냐며 이리저리 묻고 다닌다. 이럴 때일수록 20여년 이상 자신의 작품세계를 단단하게 구축해내가는 작가들을 진지하게 탐구해야 한다. 변웅필이 그러하다.
아트파리를 사로잡은 변웅필의 색채 ● 2021년 9월 파리에서 열린 아트페어 아트파리Art Paris를 둘러본 프랑스 대표 예술잡지 보자르 Beaux Arts는 "섬세한 선들이 빚어내는 색채들의 편편한 표면의 매력"에 사로잡혀 깊은 감동을 받았다며 변웅필의 「SOMEONE」 (변웅필은 작품명과 연작명, 이번 전시제목도 의도적으로 같이 부른다.)을 극찬했다. 「SOMEONE」은 민트색 바탕에 성별과 나이, 인종이 불분명한 두 사람이 하얀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리고 서로를 껴안은 채 비스듬히 누워있다.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로 우울한 현재를 은유하는 듯, 전염을 피하기 위해서는 상대와 떨어져야 하지만, 오렌지색 머리카락이 뜻하는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얼굴과 몸을 꼭 밀착시킨 모습에 뭉클해진다. 전염병으로 얼어붙은 현재를 상징하는 듯한 차가운 배경색이 저들을 위협하지만, 그들은 몸을 포개어 체온을 나누며 꿋꿋하게 지금을 통과하고 있다. 사랑은 두려움을 녹이는 힘이다. 이런 해석과 창작자의 의도가 어긋날 수도 있지만, 변웅필은 섬세한 선과 세련된 색감으로 최소한을 보여주며 최대한의 감동을 이끌어낸다. 몇 년전부터 추상(단색)화가 대세다. 복잡하고 우울한 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이 단순하고 정갈한 색에 가닿고, 일체의 소음이 제거된 듯한 평온한 추상의 이미지에 편안하고 포근하게 젖어들기 쉽기 때문이다. 한동안 이런 경향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은데, 변웅필의 최근작들은 이런 경향과도 맥이 닿는다.
자화상도 초상화도 아닌 그것 ● 동국대 서양화과를 거쳐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한 후, 서울로 돌아온 변웅필은 자화상 시리즈로 이름을 얻었다. 민머리를 한 자신의 얼굴을 짓궂은 놀이를 즐기듯 이리저리 기묘하게 일그러트리고, 풍선껌을 불거나, 사과나 복숭아, 꽃과 이파리 등으로 얼굴을 가리는 모습으로 그렸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아니 보고 또 봐도 도무지 자화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무릇 자화상은 화가의 본질이 드러나야 하는데, 아시아 남자라는 특징만 제외하고 도무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이미지 그 자체로는 섬뜩할 만큼 충격적인데, 우리의 시선은 이미지의 속살로 파고들어가지 못한 채 표면을 배회할 뿐이다. 「Selfportrait as someone」 이라는 제목을 확인하면 그 어긋남이 이해된다. 자화상은 화가가 모델이고, 모델이 화가다. 그리는 나와 그려지는 내가 같은 사람이나, 변웅필은 '내가 나를 그렸으나, 그림 속 나는 내가 아니다'라는 관점을 견지한다. 거울에 비친 혹은 사진으로 찍은 내 얼굴에서 출발했으나, 그림 속의 저 남자는 길거리의, 인터넷의 누군가의 일반 명사로서 한 사람일 뿐이다. 따라서 빈센트 반고흐의 자화상을 보듯이, 변웅필의 자화상을 봐서는 안된다. 이것은 자화상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다. 이런 특징은 자화상에서 변화된 「SOMEONE」 연작에서는 더욱 강화된다. 이번에는 사람의 형체와 이목구비를 최소한의 선으로만 표현한다. 눈과 입의 선들로 만든 표정으로 인물의 기분과 성별 정도는 짐작가능하나, 혼자 혹은 두 명의 사람이 머리를 만지거나 고개를 돌리는 등의 동작을 취하고 있지만, 저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파악하기 불가능하다. 「보자르」의 평가처럼, 성별과 인종, 나이가 전혀 가늠되지 않는다. 그러니 변웅필의 「SOMEONE」의 사람은 아무도 아니니, 모두가 될 수 있다. 최소한을 표현하여 최대한을 품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추상화인가? 초상적 추상화인가? 추상적 초상화인가? 아니다. 이것은 정물화다.
마티스와 모란디, 그리고 변웅필 ● 이탈리아 현대화가 조르조 모란디Giorgio Morandi의 정물화가 초상화로 읽히듯, 영국 낭만주의의 대가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의 풍경화를 자화상으로 봐야하듯, 근대 회화의 시작을 연 에두아르 마네Edouart Manet의 그림은 결국 정물화이듯, 변웅필의 자화상과 초상화도 정물화다. 다만 차이가 있다. 과거의 정물화가 화병과 꽃, 과일과 식물 등을 통해 자연을 묘사하거나 도덕적 메시지를 은유했다면, 변웅필은 사람을 소재로 빛과 색의 본질적인 감각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 인물은 색을 칠할 수 있는 공간과 면적이고, 작가가 직접 조합해낸 독창적인 색들로 그곳을 아주 섬세한 붓질로 채워 그만의 세련된 감각을 구축해낸다. 감각의 세련미는 디테일을 켜켜이 쌓아야 완성된다. 남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아주 미세한 차이라도 작가에게는 아주 중요한 것이 된다. 변웅필은 완성작의 표면의 매끈함을 위해 가로로만 붓질을 하고, 수없이 많은 물감들을 실험하여 자신이 원하는 색을 찾아낸다. 혼합색으로 그리는 자의 숙명이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브랜드의 물감을 사용할 경우 빚어지는 여러 차이(다른 질감과 마르는 시간 등)까지도 그림의 완성도와 관계된다. 이런 섬세함들이 쌓여서 그의 그림은 멀리서 볼 때는 표면이 편편하고 매끄러우나, 가까이 다가서면 한지의 질감이 도드라진다.
"가시적 세계에서 내가 유일하게 흥미를 느끼는 것은 공간, 빛, 색, 형태이다." - 조르조 모란디 ● "형태를 그리기 위해 선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그리기 위해 형태를 사용한다. 그것이 회화다." - 변웅필 ● 모란디의 말을 지팡이삼으면 변웅필의 말은 쉽게 이해된다. 그는 사람 그 자체에 의미를 싣지 않고 캔버스의 공간과 형태를 찾아서 빛과 색으로 표현한다. 이런 면에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가 자유로운 형태로 오려낸 종이에 색을 칠하여 이어붙인 종이오려붙이기 (Papier découpé) 시리즈와도 연결된다. 그림에 사건과 이야기를 최대한 배제하고, 단순한 색과 형태로 사람들이 직접 느끼고 생각하게 만드는 조형미를 구축해낸다는 측면에서 세 작가의 작품은 같다. 공교롭게도 모란디와 마티스는 어떤 미술사적 유행을 좇기보다는 자기의 내면에 집중하여 고유한 회화 세계를 구축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미술사를 정리했다. 변웅필의 작품은 구상화처럼 보이는 표면을 통과하면, (단색)추상화처럼 때로는 마음을 따스하게 받아내는, 때로는 시선을 정화시키는 속살을 만난다. 물론 「SOMEONE」처럼,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림의 내용을 나름대로 해석하는 즐거움과 색채들로 빚어내는 감각의 즐거움을 모두 경험할 수도 있다. 물론 그의 작업실에서 미리 엿본 풍경화들도, 풍경을 소재삼은 정물화였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전시 「SOMEONE」에 출품된 변웅필의 70점을 꼼꼼히 음미하시길 권한다.
변웅필 회화의 목적지 ● 이처럼 장르 구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회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바에 충실한 창작자는 기존의 경계를 통과해 새로운 영토에 도착한다. 변웅필의 목적지는 선과 색으로 구축한 세련된 감각의 결정체로서 그림이고, 그 경유지로 인물과 풍경을 거쳐갔다. 그의 회화의 목적지와 도착지가 일치하지 않는(못한) 탐색의 시기도 있었으나, 이번 전시에서 우리는 그의 작품들이 목적지에 잘 도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무릇 여행은 도착지에서 새로운 목적지 ■ 이동섭
Vol.20211203d | 변웅필展 / BYENUNGPIL / 邊雄必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