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70414f | 변웅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8_0426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아리랑 GALLERY ARIRANG 부산시 해운대구 마린시티1로 127 (우동 1436-2번지) 아라트리움 2층 205호 Tel. +82.(0)51.731.0373 www.arirangallery.com
누군가, 그 어떤 사람, 변웅필―『SOMEONE』 전시에 부쳐 ● 1. '한 사람'이 있다. / 내가 나일 때다. / '두 사람'이 있다. / '우리'일 때다. / 너와 나는 언제나 서로에게 / 누군가, 그 어떤 사람이 된다.
2. 때로 우리는 / 누군가, 그 어떤 사람을 대신하는 '사물'이 되기도 한다. / 기다림이 운명인 컵처럼. / 간혹 우리는 / 누군가, 그 어떤 사람을 대신하는 '풍경'이 되기도 한다. / 벌어짐이 운명인 틈처럼.
3. 우리는 / 누군가, 그 어떤 사람을 / '나'로 만나기도 한다. / 내가 궁금한데 / 내가 궁금할 때 / 우리 가운데서 / 누군가, 그 어떤 사람을 / 찾기도 한다.
4. 나이면서 동시에 우리인, / 누군가, 그 어떤 사람인, / 변웅필.
5. 2009년이었으니까 근 10년을 채워간다. '그림'으로 알던 화가 변웅필을 '사람'으로 알고 지내온 지가 말이다. 붓쟁이 다섯과 글쟁이 다섯이 만나 미술과 문학의 새로운 맞장구나 얼씨구나 쳐볼 심사로 부지불식간에 가져본 한 프로젝트(화가 다섯(윤종석, 이길우, 이상선, 변웅필, 정재호)과 문인 다섯(이원, 김태용, 신용목, 김민정, 백가흠)이 만나 미술과 문학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한 적이 있다. 그 결과는 전시(인터알리아 아트스페이스, 2010)와 도서(『그림에도 불구하고』―글쟁이 다섯과 그림쟁이 다섯의 만남, 그 순간의 그림들, 문학동네, 2010)로 구현된 바 있다.)에서 우리는 파트너로 조우했다. 제비뽑기였는지 주사위였는지 작대기였는지 애초에 그 맞잡음의 기준이 무엇이었는지는 가물가물하나 다만 한 가지 또렷했던 건 근 5개월간의 협업 후에 갤러리의 한 벽과 책의 한 챕터를 차지한 우리들의 결과물에서 우리 둘의 닮은 구석을 꽤나 발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 첫째는 빠름. 우리는 말에 모터를 달았듯 작업 속도에 액셀러레이터를 단 종자들이기도 했다. 둘째는 정직. 우리는 말에 감춤이 없듯 작업 내용을 숨기려 몰래 속속곳 한 장 껴입힐 줄 모르는 종자들이기도 했다. 셋째는 고집. 우리는 말을 꺾을 줄 몰라 작업 수완으로 보자면 그리 큰 이문 속에 살아갈 수가 없을 종자들이기도 했다. 예술가로서 이런 삶의 태도가 옳고 그른지는 예서 따질 문제는 아니렷다. 다만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좋아서 하는 일로 밥벌이를 할 수 있음에 만족하는, 어쩌면 가장 소박한 종자들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가장 행복한 종자들이 아닐까 하는 안도 속에 살아가는, 말하자면 가장 착한 종자들이 아닐까 간간 그렇게 자위하며 하루를 살아내는, 가장 보통의 종자들이기도 했다. ● 헌데, 그런데, 내가 어떻게든 닮은 척을 해대도 더는 좇지 못할 어떤 지경의 그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앞선 프로젝트에서 젖 가지고 좆 가지고 놀아본 나의 졸시 「젖이라는 이름의 좆」에 화답한 그의 그림을 보자마자 두 손 바짝 들고 항복이라 아니 외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유의 제 자화상을 밑그림으로 6과 9가 그려진 두 장의 하트 카드를 내미는 핑크빛 작품의 제목을 글쎄 「한 사람으로서의 자화상―6♡9」라 붙인 그였지 뭔가. 내가 '젖좆'이라 했으니 그가 '69'라 하면 승부는 원점이었을 텐데 그 사이에 그 무시무시한 하트를 샌드위치용 우유식빵 사이 베이컨처럼 끼운 그였기에 나는 무조건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내게 없는 '사랑'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내게 없는 사랑의 뜨거움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내게 없는 사랑의 뜨거움으로 불 조절에 도가 튼 진짜배기 사랑꾼의 빨간 볼이었다. 그 너머로 온통 빨갛고 빨갈 그의 몸은 덤일 터, 그는 그렇게 통째로 내게 없는 사랑이었던 것이다.
6. 유난히 추웠던 지난겨울이었지만 강화읍의 한 시골 마을에서 홀로 집 짓고 사는 옥림리 23-1의 그에게 위아래 빨간 내복 따위는 결코 필요치 않았을 성싶다. 운이 좋아 이번 봄의 전시에 소개되는 그림 마흔아홉 점을 미리보기로 훑으니 어디선가 붓 타는 냄새부터 스멀스멀 풍기더란 얘기다. 붓을 태우는 마음, 마음에 불을 지피는 붓, 그 서로에게 마주한 닿음이 어찌 사랑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의 대상을 주체로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지고 껴안고 또 껴안아도 좀처럼 가 닿아지지가 않는 허방이 사랑이라 할 때 그는 하나의 대상을 주제로 그리고 또 그리고 칠하고 또 칠해도 좀처럼 채워지지가 않는 허탈 또한 사랑임을 동시에 아는 듯했다. 그는 이해와 오해 사이를 오가는 진자의 추로 사랑을 살아내듯, 머리 아래 눈으로 눈 아래 심장으로 심장 아래 붓 든 손으로 소통과 불통 사이를 오가는 진자의 추로 작품을 살아낸 것이 분명해 보였다.
7. 「한 사람으로서의 자화상」은 나에 대한 나의 사랑을 여러 각도에서 실험해본 그만의 장기이자 그만의 특기인 시리즈! 자기애는 필시 스스로에 대한 스스로의 열렬한 구애가 아니던가. 내가 나를 잘 그리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잘 보는 일이 우선시되어야 할 터, 이를 위해 그는 여러 분주함으로 제 안에 저를 다각도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에 한 치의 게으름도 피운 적이 없어 보인다. 그는 세수하며 물에 비친 제 얼굴을 수십 수만 번 마주했을 것이다. 그는 면도하며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수십 수만 번 마주했을 것이다. 그는 제 얼굴을 카메라에 담아내며 이미지로 찍혀 나온 제 얼굴을 수십 수만 번 마주했을 것이다. 그는 몽타주도 아닌 것이 애인의 미사여구로 촘촘히 완성됐을 제 얼굴을 수십 수만 번 마주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거나 뒷담화로 만들어진 제 얼굴을 수십 수만 번 마주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스스로의 다짐에 힘입어 한 장의 영정사진으로 남을 제 얼굴을 앞으로 수십 수만 번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가 죽어 없어질 때까지 이 시리즈가 무한 반복될 수밖에 없을 지구력의 연유에는 바로 이러한 그의 성실함이 기본기로 깔려 있을 까닭일 터! ● 이렇듯 온갖 본다는 행위의 합집합 가운데 내게서 선택받은 나는 부리나케 혹은 느긋하게 나로 인해 캔버스로 옮겨진다. 이때 각 작품의 제목이자 소재인 사물들은 나를 보다 멀리, 보다 크고 넓은 사유 속으로 확장시키고 들이파는 발 구름판이자 다이빙 보드의 본새가 되어준다. 천진하고도 난만한 그의 유일하고도 필수불가결한 장난감이 이를테면 사물이라는 일단의 결론이랄까.
8. 그는 왜 주먹으로 얼굴을 가리고 손을 펴서 얼굴을 짓뭉갤까. 망가져도 내 얼굴이니까. 그는 왜 핑크색 티셔츠로는 코를 파고 블루 수건으로는 코를 풀까. 헐어도 내 코니까. 그는 왜 덕지덕지 밴드를 일자로 붙였다가 검정 전기 테이프를 엑스자로 붙일까. 따가워도 내 볼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나를 가지고 놀 때의 즉흥성은 얼마나 탬버린 같은가. 그러니까 내가 나를 가지고 놀 때의 치밀함은 얼마나 계산기 같은가. ● 내가 나 갖고 놀기, 내가 나 데리고 놀기의 희열은 어른인 그를 어린이인 그로 방목하게 하여 보다 풍요로운 자유 속에 풀을 뜯게 한다.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한 긍정의 에너지는 매일 조금씩 늙어가는 우리들의 얼굴을 잊게 하고, 우리들의 얼굴 너머 새로운 그 무엇에겐가 시선과 숨통을 분산시키기에 바쁘다. 그렇게 새롭게 주입한 산소로 우리들의 호흡은 보다 원활히 편안해지고 우리들의 시야는 보다 시원히 트이기에 이른다. 우리가 왜 꽃놀이를 가겠는가. 꽃이 질 것을 아는 까닭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왜 산에 오르겠는가. 산에서 내려올 것을 아는 까닭이 아니겠는가. 익숙했으나, 익숙했기에 미처 관심을 갖지 못했던 사물들의 재발견은 무디게 닫혀 있던 우리들의 감각에 무한 확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지 않았나 싶다.
9. 이러한 과정 속 그가 주입하는 그만의 무한 긍정의 에너지는 우리를 제 얼굴에서 벗어나 이름도 예쁜 능소화의 고움을 처음 보게도 만든다. 그가 주입하는 그만의 무한 긍정의 에너지는 우리로 하여금 담쟁이의 빛바래가는 쓸쓸함을 재확인하게도 만들고, 그가 주입하는 그만의 무한 긍정의 에너지는 수수깡의 다채로운 컬러에 어릴 적 탐구생활의 추억에도 젖어들게 만들며, 그가 주입하는 그만의 무한 긍정의 에너지는 앵두가 저리 빨갰나, 앵두의 신맛에 침을 삼키게도 만들고, 그가 주입하는 그만의 무한 긍정의 에너지는 풍 두 장에 녹색 화투판을 배경으로 장땡을 외치던 아비도 실은 엄청 짜증나지만 간만에 일으켜 앉히게 만든다. ● 그 결과 우리들은 그의 그림 앞에서 저마다 제 안에서 흘러나오는 제 얘기들로 복잡한 심경을 자랑하게 된다. 그 결과 우리들은 그의 그림 앞에서 이내 두리번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내 눈에 꽂히는 이 사물과 저 사물은 대체 내게 어떤 의미인 것일까. 왜 하필 이 사물과 저 사물이 눈에 밟히는 것일까. 왜 그처럼 재갈이거나 알약이지 않는 걸까. 왜 그처럼 풍선 두 개이거나 풍선 한 개이지 않은 걸까. 그 과정 가운데 지금 현재 내 마음의 상태를 알게 되는 일, 필시 이것이 예술이라는 무한 확장의 결과라 할 때 그 불러냄을 기점으로 과거로부터 훑다보니 그도 자연스럽게 늙어왔음을 알겠는 거다.
10. 그래, 그도 알았겠지.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턱은 단단하게 더 각이 져왔고 눈은 살짝 더 찢어져왔으며 귀는 훨씬 더 작아져왔음을. (코? 코는 수치를 좀더 내본 다음 기회에!) 자 이걸 어떻게 자신하느냐고? 빤하지, 내가 쟀으니까! ● 그의 그림을 보는 내내 나는 30센티미터 플라스틱 자를 손에 쥔 채였다. 그러고는 그의 그림 속에서 뭐든 '흥밋거리'가 생기면 일단 자부터 들이대 재고 싶은 것 사이의 '거리'를 쟀다. 예서의 자는 가늠의 상징으로서 넘나듦을 확인하려는 마음. 그래서 알게 된 사실이라면 그는 좀처럼 오버하지 않는다는 것. 언뜻 시끄럽게 들리지만 그의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귀가 먹은 듯 고요함이 느껴진다는 것. 언뜻 성깔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의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역시나 사람이 가진 순정이라는 영역을 재차 인정하고 싶어진다는 것. ● 그래, 괜한 자 타령이 아니었다. 그래, 그에게는 그만의 거리가 있다. 그래, 그에게는 그만의 '내외'가 있다. 그 거리의 '일정함'과 그 내외의 '공교함'이 그의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눈과 마음에 긴장이라는 어떤 보폭을 지금껏 유지하게 했을 것이다. 그래, 우리는 누군가, 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기대로 살지 미워할 작심으로는 살지 않지 않는가. ● 저는 단순한데 우리는 복잡하게 만드는 사람, 변웅필. 우리는 심각한데 저는 낄낄대고 있을 사람, 변웅필. 그는 이번에도 또 이렇게 빠져나갈 모양이다. 뱀처럼 아니 능구렁이처럼. 아 얄미워! ■ 김민정
Vol.20180426b | 변웅필展 / BYENUNGPIL / 邊雄必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