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90627i | 곽인탄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서울특별시_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01:00pm~07: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 나인 SPACE 9 서울 영등포구 경인로 739 (문래동2가 4-2번지) 2층 Tel. +82.(0)2.6398.7253 www.facebook.com/space9mullae
좀비-과거가 초래한 (현재적) 공허 위의 조각들 ● 개인은 역사를 어떻게 경험하는가. 역사는 대개 과거에 종속돼 있고, 그렇기 때문에 얼마간 대상화될 수 밖에 없다. 아카이브에 둘러싸인 누군가는 일련의 자료들을 열람할 뿐, 결코 역사의 내부로 수렴되지 못한다. 물론 역사의 성좌를 다시 그리는 일은 가능하다. 이는 시간을 (재)배열하는 문제이며, 그럼으로써 현재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여전히 개인과 역사 사이에 가로놓인 간극은 유지된다. 서두의 질문을 반복하면, 역사는 결코 실시간의 경험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과거의 단면들을 제아무리 높은 해상도로 복원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물은 현재의 저편에 '그럴싸한' 모조품으로 제시될 뿐이다. 그러나 모조품은 그 자체로 유의미한데, 과거와 어긋나는 지점들을 노출하면서, 현재의 한계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 과거가 좀비처럼 출몰하는 일은 이제 클리셰가 된 지 오래다. 현재라는 화폭에 무엇을 투사할 것인 것인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과거 혹은 과거의 단면들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기능한다. 아카이브는 더 이상 먼지 쌓인 서고로 귀결되지 않는다. 모든 것들이 디지털 차원에서 저장되는 시대에, 누구나 편의에 따라 역사의 컬렉션을 열람할 수 있다. 이는 과거가 좀비로 환원될 수 있는 최적의 상황을 의미한다. 레트로의 경향을 따르든, 노스텔지아에 압도되든, 그것들이 암시하는 바는 현재가 더 이상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현재에서, 만들 것인가. 좀비들의 아수라장에서 탈출해, 새삼 역사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 역사는 단순히 무분별하게 소비되는 과거와 다르다. 이때의 과거가 현재를 계속 유예시키는 방편이라면, 역사를 향한 시선은 현재의 밑바탕을 향한다. 이는 시간의 파편들이 형성하고 있는 지형을 가늠하면서, 그것에 의해 좌우되는 현재를 유추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제, 무엇을, 현재에서,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은 그러한 총체적인 역사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만약 해당 질문이 현대미술을 겨냥한 것이라면, 작가는 반드시 미술사학자가 되지 않고도, (클리셰가 아닌)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 이를테면 곽인탄은 「Sculpture Gate」에서 좀비가 된 과거에 순응하기 이전에, 역사를 경험의 산물로 환원하면서, 이를 토대로 조각을 만든다. 주지하듯 역사는 그 자체로 경험할 수 없지만, 그것의 단면들이 현재에 속한 개인을 경유함으로써, 점차 경험과 연루되기 시작한다. 설사 작가가 참조한 과거 회화/조각의 도판 이미지들이 가상의 데이터에 불과하더라도, 그것들은 종내 작업을 조형하는 과정에 합류한 채, 여타 자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물리적으로 재/구성된다.
물론 역사의 단면들만으로 현재를 유추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작업 차원에서의 물성을 획득하면서, 현재로 편입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복원의 과정과는 다르다. 본 전시에서 제시된 일련의 작업들은 결코 과거에 대한 "높은 해상도"를 지향하지 않으며, 오히려 각종 레퍼런스는 작가의 상념과 뒤섞인 채, 원본과 상이한 형태로 귀결된다. 이를테면 「발작」의 목적은 3개의 머리를 봉합함으로써, 작가의 분열적인 내면을 가시화하는 데 있다. 그 과정에서 참조한 작업의 사례들은 미술사의 특정한 국면으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상념이라는 무정형의 상태를 조각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일종의 역사적 알리바이로 기능한다. 이때의 조각은 매체라기보다, 광의의 미술사를 암시하는 다소 추상적인 개념이다. 미술사로 대변되는 역사는 개인의 관점에서 온전히 파악할 수 없으며, 단지 그것의 일부만을 발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상념과 유사한 대상으로 간주된다. 이로써 역사는 표현주의의 관습을 경유해, 마침내 외부로 표출된다. ● 그런 의미에서 「발작」에서 봉합된 것은 3개의 머리 뿐만이 아니라, 작업으로 현존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유사한 대상"들이다. 작가의 상념은 무가치한 파편들로 와해되는 대신, 역사의 단면들을 현재의 시간대에서 재/조합해, 물성을 지닌 무언가로 구현하게끔 유도한다. 즉 작가는 단순히 내면에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상념을 표현하기 위한 미적 관습들을 도구 삼아, 역사에 관여하고, 그것을 조형한다. 좀비-과거가 창작자의 의도를 초과하는 일방적인 수용의 문제였다면, 「발작」을 발단 삼은 일련의 작업들은 더 이상 가용할 수 있는 고유한 재료가 없는 현재적 상황에서, 작가가 역사의 단면들을 능동적으로 운용한 결과물이다. 이때의 능동성은 바로 개인 혹은 작가가 역사의 내부로 수렴하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감행하는 대신, (역사의 단면들을 포함한) "유사한 대상"들을 전람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점유함으로써 발생한다. ● 이는 주지하듯 역사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주목해야할 것은 역사 자체가 아니라, 역사의 단면들을 굳이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고유한 재료"가 없다는 사실은, 현재에서 재/생산되는 (미술 작품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과거라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공산품으로 보이게끔 만든다. 그러나 「발작」은 작가가 과거 회화/조각의 도판 이미지들을 참조한 것과 무관하게, 오로지 현재에서 직립하기 위한, 현재의 조각이다. 이때의 직립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가상의 좌대 역할을 하는 「조각의 문」 연작을 제외하면, 실제로 대다수의 작업들은 직립의 상태를 고수하고 있다. "유사한 대상"들이 작가의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는 파편적인 상념인 한, 그것들이 작업이 되기 위해선, 특정한 구조(물)로 봉합된 채, 현실의 물리적인 토대 위를 발 딛고 서야만 한다. 이를테면 「발작」에서 외부를 향해 표출된 다양한 색의 레진은 철골에 의해 지지되고 있고, 「발작」을 모티프로 삼아 제작된 「직립하기 위한 머리의 규칙성」은 철골과 흡사한 형태로 구현됐다. ● 후자는 전후 시기의 한국에서 폐허 속 고철들을 기워 만든 조각들을 상기시키는데, 실제로 작가는 그와 유사하게 다른 금속 조각들을 만드는 과정에서 파생된 파편들을 재/조합해 작업을 제작했다. 이로써 "유사한 대상"의 범주에는 작업의 파편 또한 포함된다. 상념, 역사의 단면들, 작업의 파편, 이하 세 가지의 요소들은 계속해서 반복되며, 관객은 이를 통해 본 전시의 경향을 가늠하게 된다. 즉 일련의 작업들은 서로를 매개하고 있다. 물론 「발작」은 독립적인 작업이지만, 그와 별개로 「직립하기 위한 머리의 규칙성」과 「흰 머리」의 레퍼런스로 기능한다. 이를테면 「직립하기 위한 머리의 규칙성」의 전반적인 형태, 즉 외부를 향해 돌출하는 모습은 자연스레 「발작」에서 비롯한다. 또한 「흰 머리」에선 「발작」이 타공판으로 만든 미니멀한 입상의 내부에 갇혀있는 모양새다. (이처럼 작업의 파편은 반드시 물리적인 자재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원본의 작업을 또 다른 작업에 투사하기 위해 해체 및 재/구성하는 과정을 암시한다.) 그러한 관계 설정은 「발작」의 내적 역학과 마찬가지로, 미술사의 특정한 국면과는 무관하다. 다만 작가는 이미 현재를 점유하고 있는 「발작」과 같은 작업을 발단 삼아, 일종의 조형 실험을 반복하면서, "현재의 조각"을 구현하는 데 몰두할 뿐이다.
좀비-과거에서 비롯한 추상 덩어리와 달리, "유사한 대상"들은 서로를 참조하면서 자체적인 맥락을 확보한다. 그러나 이는 정형화된 형태로 귀결되지 않는다. 작가의 관점에서 상념은 자신의 일상에서 걷잡을 수 없이 증식되며,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미적 관습은 역사의 단면들에 매번 다르게 적용된다. 즉 동일한 과거 조각/회화의 도판 이미지는, 어떤 내적 표현을 경유하는지에 따라, 매번 다른 작업으로 구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단순히 과거 조각/회화를 사료로 참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자율성의 범위 내에서 의도적으로 곡해하면서, 특정한 이미지에 고착된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모색한다. 물론 아카이브에 포함된 일련의 작업 이미지들은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니지만, 본 전시에서 그것들의 역사적 위상은 대체로 묘연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역사 자체가 아니라, 그로부터 도출해낸 단면들을 현재에서 조형 가능한 재료로 환원하고, 실제로 조형에 돌입하는 것이다. ● 일련의 작업들은 분명 레퍼런스를 의식하고 있지만, 원본의 맥락을 준수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나선형 문과 토르소」에 동원된 「지옥의 문」과 「제3인터내셔널 기념탑」의 모형 사이에는 어떠한 접점도 없다. 다만 본 작업은 후자의 나선형 구조를 전자에 적용한다는 작가의 우연찮은 착상을 발단 삼아 조형됐을 뿐이다. 심지어 그 와중에 상념에 가깝게 떠오른 또 다른 레퍼런스들이 개입하면서, 조형의 과정은 점차 직관에 의해 전개된다. 이로써 「조각의 문」을 구성하는 인물 군상은 단테의 인페르노Inferno에서 벗어나, 현실의 물리적인 토대 위에 직립하고 있는 철골의 면면에 배치된다. 그러나 "우연찮은 착상"은 단순히 맥락이 없는 상태를 지향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역사는 거대 서사로 방치되는 대신, 개인 혹은 작가가 취사 선택할 수 있는 임의적인 조합으로 기능한다. 즉 역사의 단면은 그저 특정한 형상에 불과하다. 작가는 그것을 작업 차원에서 자유롭게 재/구성하고, 그 와중에 발생하는 각종 변수들마저 작업의 일부로 수렴한다. ● 그러므로 조형의 과정은 역동적일 수 밖에 없으며, 이는 그 결과물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즉 일련의 "특정한 형상"들은 작가에 의해 왜곡된 면모를 전방위하게 노출하고 있다. 이로써 조각은 그것을 온전히 파악하기 위한 다수의 각도를 요구하면서, 비로소 입체로 거듭난다. 주지하듯 스마트 기기가 보편화한 이후, 입체를 그 자체로 파악할 수 있는 여지는 대폭 감소했다. 스마트 기기와 동기화한 사용자-주체는 자신에게 내장된 가상의 뷰파인더를 통해, 주어진 대상을 이미지로 포착하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용자의 이목을 끌기 위한 장식적인 제스처이며, 소위 '텀블러 미감'은 그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 기능한다. 반면 본 전시의 작업들은 대개 (정방형의 프레임 단위로 분할할 수 없는) 다양한 세부가 철골을 둘러싼 채, 이미지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 전시는 노골적으로 현장에 의존한 채, 관객으로 하여금 일련의 작업들을 조각-오브제로 가늠하게 만든다. 즉 "특정한 형상"들이 작업 차원에서 돌출하는 모습은, 작업을 현장에서 (가상의 뷰파인더와 무관한) 입체로 마주했을 때, 비로소 예기치 않은 순간으로 드러나게 된다.
물론 이미지와 오브제(혹은 3D)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전략은 얼핏 시대착오적으로 보인다. 양자는 좀비 포멀리즘 이후, 회화적 조각 혹은 조각적 회화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서로 연동하는 대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비평 차원에서 탐구하기보다, 좀비-과거의 유사 현상학으로 귀결되는 사례들이 점차 늘어났고, 결국 좀비 포멀리즘이라는 화두는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그러므로 자신의 작업을 굳이 조각-오브제라고 주장하는 곽인탄의 경우에서, "회화적 조각"이라는 명분을 찾는 일은 무의미하다. 이를테면 「발작」, 「지옥의 문 위에 앉아있는 사람」과 같은 몇몇 작업들에서 일관되게 등장하는 다양한 색의 레진은, 레퍼런스로 참조한 「여인」 연작이 의도한 추상(화)의 숭고를 지향하지 않는다. 즉 「여인」 연작은 다만 "특정한 형상"으로 기능하면서, 그것의 추상표현주의적 필치를 작가가 (입체 차원에서 왜곡해) 구사하게끔 유도할 뿐이다. ● 물론 그 과정에 선행하는 것은 작가의 내적 무의식이지만, 이는 일련의 작업들을 그저 추상으로 환원하지 않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즉 상념의 키워드는 작업을 추동하는 중요한 동력인 한편, 때로 추상을 매개로 인물, 신체와 같은 보다 구체적인 형상을 조형하는 데 기여한다.) 앞서 언급했듯 작가는 "이제 무엇을, 현재에서,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 화답하기 위해, "현재의 조각"을 제작하는 데 몰두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추상과 같은 한 가지의 형식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한 각종 레퍼런스를 활용해, 현재에 적용할 수 있는 작업의 프로토콜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때의 작업이 "조각-오브제"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통상의 이미지가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프레임 내에서 가시화된 이미지를 감상하는 관객의 시선은, 먼저 스크린의 물리적인 표면에 의해 차단된다. 그리고 프레임의 외부는 대체로 존재하지 않거나, 관객의 망상 차원에서 구현될 뿐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사용자-주체는 실재의 대상을 (가상의 뷰파인더를 통해) 이미지가 투사된 스크린 너머에 구속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 물론 작가가 참조하는 "역사의 단면"들은 도판 이미지에서 비롯하지만, 일련의 작업들은 바로 그러한 이미지의 관성에서 벗어난다. 이는 이미지를 단순히 불필요한 대상으로 간주하려는 의도라기보다, 이미지를 매개로 한 좀비-과거가 너무도 만연한 상황에서, 조각이 자신의 본질을 모색하고, 이를 통해 현재로 편입되기 위한 과정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조각이라는 물신이 아닌) 시간의 문제다. 애초의 발단은 "역사의 단면"이었다. 그것은 비록 역사 전체를 관망할 수 있는 전지적 시점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역사를 얼마든지 (재)조형할 수 있는 권한을 제공한다. 이로써 역사는 현재가 잃어버린 독자적인 역량을 대체하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수급하기에 이른다. 그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한때 과거가 다양한 방식으로 귀환하면서 현재를 계속 유예한 이후, 이제 비로소 현재의 문제를 숙고할 때다. 본 전시에서 서로를 매개하고 있는 조각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직립한 채, 현재 혹은 그것이 초래하는 "실시간의 경험"을 일시적으로 동여매고 있다. ■ 권시우
Vol.20201109j | 곽인탄展 / KWAKINTAN / 郭仁攤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