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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서울문화재단 협찬 / 보안여관 BOAN1942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통의동 보안여관 ARTSPACE BOAN 1942 서울 종로구 효자로 33 Tel. +82.(0)2.720.8409 www.boan1942.com
병풍과 족자 ● 족자와 병풍을 이루는 각각의 부분에 이름이 있다. 장황(粧䌙:그림이나 글씨의 보존과 장식을 위해 족자와 병풍, 두루마리, 화첩 등을 만들어 천과 종이로 꾸미는 일)을 서화에 옷을 입히는 것에 비유해 그림 아래를 치마, 위를 저고리, 양 쪽의 띠를 소매라 부르는 관습이 있다. 신체의 연장인 여성의 옷에 빗대 장황을 부르는 관습이 흥미롭기도 해서, 정작 그림은 없는 족자와 병풍을 만들었다. 역사의 실존인물, 소설의 인물 등 다양한 여성들의 이미지를 장황만으로 만들어 그림/장식이라는 주종관계를 바꿔보았다. 고딕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을 소재로 한 족자 「버사Bertha, 2019」, 「카르밀라Carmilla, 2019」, 「레베카Rebecca, 2019」와 조선시대 열 명의 여성 문인들을 참고해 만든 병풍 「능파미보凌波微步 2019」, 「레이디 카스틸리오네Lady Castiglione, 2020」연작이 그런 작업이다. 이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재능이나 성격 등을 이유로 시대와 불화했거나 돌출된 기행을 남긴 여성들이다. 특히 19세기 여성을 '보는 방식'에서 기이한 기록을 남긴 카스틸레오네(Virginia Oldoïni, The Countess of Castiglione 1837-1899) 백작부인의 '자화상' 사진의 시각적인 구조를 족자나 병풍의 구조와 겹쳐보려고 했다. 백작부인의 사진에서 '보면서 보여지는' 복잡한 시선의 교란을 족자와 병풍의 형식에서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소품들을 모아 하나의 병풍에 스크랩하거나 콜렉션하는 백납병풍, 흔히 종교화를 그릴 때 쓰는 삼면 병풍 등의 형식을 다시 발견해보고자 했다.
장식과 문자 ● '현대미술'은 장식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동양의 그림, 특히 불화, 무속화, 부적, 문자도 등에서 장식과 꾸밈은 그 자체로 주제가 된다. 단청이나 탱화의 구름문, 연화문 등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이다. 「광배光背. 2020」, 「선기현알회백환조璇璣懸斡晦魄環照, 2020」등도 무신도나 탱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다양한 장식들을 그린 것이다. 동서양의 종교화에서 신성(神性)은 언제나 장식과 함께한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신의 모습이 빠진 이 그림들을 그리면서 신들이 떠난 빈 자리, 신성이 사라진 시대, 아직 오지 않은 신들의 모습 등을 생각하기도 했다. 「괴석도 2018~2020」도 산수화의 작은 단위이자 우주관까지 포괄하는 그림이면서 특별하고 괴이한 모양의 돌을 선호하는 동아시아의 장식애호를 보여준다. 「요妖 2017」, 「ㄹ세계, 2020」 등은 장식성에 더해 그림과 문자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나타낸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부적이다. 「두려움 없이, 2014」는 개의 부적을, 「2020년, 2020」은 북두칠성 부적을 다시 그린 것인데 ,부적이야말로 그림이자 동시에 문자이다. 문자가 그림이 될 때, 또는 그림이 문자가 될 때 어떤 신비한 힘을 갖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단순히 미신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뭔가 깊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어떤 시대착오 ● 그 동안 동양화의 형식이나 역사를 다시 보고, 지금도 이들이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물어왔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번 전시가 다소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기를 바랐다. 유난히 힘든 2020년의 한 가운데서 동시대적인 것이나 새로운 개념보다 역사 속의 인물, 소설의 주인공, 종교와 설화의 신, 부적의 동물 등을 비롯해, 천자문, 고대의 우주관 같은 오래된 문화가 조금 과장해 말한다면 나에게는 더욱 '친구'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피안(彼岸), 이상(理想), 자유 등을 말하기 쑥스러운 요즘 시대에 적어도 그러한 신화적인 존재가 실제로든 상상으로든 생생하게 '있다'고 여겨졌던 시간과 문화가 근래에는 더욱 풍요로운 것으로 느껴진다. 퇴행이이라 부르든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하든, 동양화에 늘 붙어 다니는 수식이 아무래도 상관없는 그런 시대에 온 것 같기도 하다. '시대착오'는 현재에 대한 믿음 말고는 모두 배제하려는 시대에는 비난의 말로 쓰이겠지만, 거꾸로 현재에 대한 의구심을 표현하기에 적절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림과 글의 재료가 하나였던, 또는 목적과 도구가 명확히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의 물건 「문방사우文房四友, 2020」를 가까스로 볼 수 있을 정도만 그린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벼루와 먹, 붓과 종이에 대한 애착은 시대착오적이겠지만 깨지고 헤진 이 물건을 보고 있을 때, 그렇다면 현재는 온전한가 라고 오히려 묻게 된다. ■ 김지평
Vol.20200914h | 김지평展 / KIMJIPYEONG / 金池坪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