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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1006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포네티브 스페이스 ponetive space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34 Tel. +82.(0)31.949.8056 www.ponetive.co.kr www.thinkartkorea.com/gallery
'뜯겨져, 나온' 서은애의 '문' ● 서은애의 작업실에 들어서니 거대한 대작들이 여기저기에 기대어 있기도 하고 바닥에 뉘어져 있기도 했다. 그 대작들은 작년 씨알 콜렉티브(CR Collective)에서 열린 서은애 개인전에 전시된 「열리지 않는 문(Unopened doors)」과 문맥을 이루는 작품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신작들은 작년 작품들과는 확연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 필자는 작년 씨알 콜렉티브에 전시된 그녀의 작품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작품이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서은애의 작품'과 너무나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필자에게 '서은애의 그림'은 '유쾌·상쾌·통쾌'를 떠올리게 한다. 따라서 그녀의 그림에는 '아픔'이란 끼어 들 틈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녀의 『열리지 않는 문』은 '아픔'에 관한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서은애는 1996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중국 북경 중앙미술학원에서 판화과 연구과정을 수료한 후 귀국해 2003년 인사미술공간에서 『웃기는 자화상』이란 타이틀로 첫 개인전 개최해 미술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당시 그녀는 침체된 동양화에 재기발랄한 현대적 감성을 접목시킨 유머러스하고 재치 있는 '현대판 산수화'를 선보였다. 2004년 『오! 나의 즐거운 무릉도원』, 2005년 『꿈꾸는 별천지』, 2006년 『경계(境界)에서 노닐다』, 2009년 『꽃피는 봄이 오면』, 2010년 『유쾌한 은둔』, 2011년 『군자(君子)의 정원』, 2012년 『몽롱지경(朦朧之境)』등 매번 개인전을 개최할 때마다 미술계에 주목을 받았다. '서은애 스타일' 회화는 특히 한국화 전공자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그로 인해 그녀는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동양화전공 교수로 임용되었고, 국내외 여러 기획전에 초대되었다. ● 서은애의 상상력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 도통 어디로 튈지 감을 잡을 수 없는 그녀의 신작 발표는 필자를 매번 놀라게 하고 있다. 작년 씨알 콜렉티브에서 열린 서은애의 개인전 『열리지 않는 문』 역시 그러했다. 전시타이틀 『열리지 않는 문』이 암시하듯 서은애의 이전 그림에서 자주 등장했던 수려한 산수 배경이 회색조의 콘크리트 벽면으로 대체되었고, 건물의 문들은 굳게 닫혀있으며, 유쾌한 인물은 팔과 다리를 상실한 '불구자'로 전이되었다. 왜 서은애는 열리지도 않는 '닫힌 문'과 '불구자'를 등장시킨 것일까? 미술평론가 이윤희는 서은애의 『열리지 않는 문』에 관해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 "과거 그의 작품들이 늘 기성의 어떤 것들에 '기대어' 있었는데, 이번에 출품되는 작품들에서는 '참조'될 만한 것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도 크게 달라진 점이다. 뿐만 아니라 기존에 서은애의 방식으로 여겨졌던 정교하게 공들인 붓질과 같은 기법적 요소들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세필로 정성스럽게 마무리해 왔던 과거의 흔적들과 그것을 지워내려는 거칠고 어색한 붓질이 공존하고, 그림을 완성한 이후에는 제거해야 할 것들을 그대로 제시하여 날것 그대로의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과거로부터 달아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애써 구축한 과거의 '서은애적인 것'으로부터 탈피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왜 서은애는 기존 '서은애 스타일'로부터 탈피한 것일까? 그 답은 오히려 새롭게 구축하고 있는 그녀의 작품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윤희는 그녀의 『열리지 않는 문』을 '날것 그대로의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보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날것'은 화면에 표현된 흔적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그 '날것'은 한 편으론 내용적 측면으로도 확장될 수 있을 것 같다. 내용적 측면에서 본 서은애의 '날것'은 과거로부터 달아나고 있는 것이라기보다 차라리 과거로 회귀하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그녀는 '초심'으로 되돌아간다고 말이다. 2006년 비비스페이스에 열린 『하산(下山)하라!』에서 서은애는 미술평론가 김정연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 "대학시절에 저는 한국화 자체 보다 미술의 사회적인 기능에 대해서 더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미술이 사회의 제반 관계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 그리고 기능 등에 많은 관심을 두었던 것이지요. 제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 말 90년대 초는 한 때 절정을 이루었던 학생운동이 서서히 위축되어가기 시작한 이후 초기 단계로, 저는 저물어가던 학생운동의 끝자락에 한 발을 담고 미술이 사회 속에서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를 고민했었습니다."
서은애는 『열리지 않는 문』에서 '미술이 사회 속에서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정면으로 응대한다. 이를테면 그녀의 근작은 '현대인의 아픔'을 표현한 것이다. ● 필자는 앞 서 '서은애의 이전 그림'은 '아픔'이란 끼어들 틈도 없어 보이는 '유쾌·상쾌·통쾌'한 그림이라 언급한 바 있다. 고풍미를 풍기고 있는 그 그림들은 마치 '명랑사회'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우리가 그녀의 그림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본다면, '유쾌·상쾌·통쾌' 안에 '아픔'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아픔'은 미술의 사회적인 기능에 대한 아픔이라기보다 당시 한국화의 상황을 둘러싼 '아픔'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당시 미술계에서는 '한국화의 위기설'이 회자되었기 때문이다. ● 두 말할 것도 없이 옛 선조들의 작품들을 참조하여 재구성한 그녀의 '현대판 산수화'는 우리 미술에 대한 자부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녀의 '현대판 산수화'에서 나타나는 '유머'는 위기를 방조한 한국화에 대한 '반항(反抗)의 반어법(反語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당시 '반항'은 미술의 통념에 대한 반항이었다, 반면 신작의 '반항'은 현대의 사회 문제에 대한 인식, 즉 '현대인들의 인간 관계 속에서 쉽게 관찰되는 진실한 소통의 부재와 단절'에 대한 반항이다. 따라서 서은애의 『열리지 않는 문』은 그녀에겐 일종의 오랜 '숙제'였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최근 그녀는 오랫동안 미루어두었던 '숙제'를 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번 전시타이틀은 『뜯겨져, 나온』이다. 서은애는 '뜯겨져'와 '나온' 사이에 콤마(,)를 삽입해 놓았다. 왜 그녀는 '뜯겨져'와 '나온' 사이에 콤마를 삽입해 놓은 것일까? ● 콤마(comma)는 문장 안에서 짧은 휴식을 나타내기 위해서 쓰는 쉼표이다. 따라서 서은애가 '뜯겨져'보다 쉼표 다음에 나온 '나온'에 심정적 무게를 더 두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무엇이 '뜯겨져, 나온' 것일까? 그것은 '열리지 않는 문'이다. 그것은 마치 한 번도 열린 적 없었던 것처럼 미동도 없이 견고한 문이다. 그런데 무수한 두드림에도 굳게 닫힌 문이 열린 것이 아니라 '뜯겨져, 나온' 것이다. ● 서은애의 신작들에 등장하는 '문'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문'은 열림과 닫힘 즉 '소통'을 뜻한다. 그렇다면 '열리지 않는 문'이 열린 것이 아니라 '뜯겨져, 나온'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만약 '열리지 않는 문'이 열린 것이라면, 사람들 사이의 소통이 이루어짐을 뜻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열리지 않는 문'이 열린 것이 아니라 '뜯겨져, 나온' 것이라면,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포기'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왜 그녀는 소통을 포기한 것일까? 혹 사람들 사이의 주장이 서로 평행선을 달리기 때문에? 그 점에 관해 그녀는 『뜯겨져, 나온』 작가노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뜯겨져 나온 벽과 문들은 이제 더 이상 건물의 질서에 복속할 필요가 없다. 무언가를 힘들게 머리에, 어깨에 짊어지고 지탱할 의무도, 누군가에 의해 열리고 닫히며 부셔질 필요도 없는 것이다. 뜯겨져 나온 모든 것들은 상실인 동시에 자유이다. 완결된 구조에서 뜯겨져 나옴으로 인해 원래의 기능은 상실되나, 역으로 뜯겨져 나옴으로 인해 아무런 목적 없이 그것 자체로 새롭게 존재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이 생겨난다."
서은애의 『열리지 않는 문』은 '뜯겨져, 나온' 문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뜯어낸' 문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뜯겨져, 나온' 문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왜 그녀는 '뜯어낸' 문을 '뜯겨져, 나온' 문으로 표기한 것일까? '뜯어낸' 문은 행위자를 전제하는 반면, '뜯겨져, 나온' 문은 문 자체가 행위자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 서은애는 문이 타의로 뜯겨져 나왔든, 자의로 뜯으며 나왔든 간에 건물로 상징되는 일종의 절대적 질서에서 떨어져 나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 흥미롭게도 '뜯겨져, 나온' 문은 기존 '서은애 스타일'로부터 이탈을 뜻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이를테면 서은애는 오랫동안 갈고 다듬어 만들었던 자신의 스타일을 과감하게 탈피해 또 다른 가능성의 회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마치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파멸'을 각오하고 위험천만한 항해를 시작한다. 왜냐하면 좌절하고 파멸되어야 새롭게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류병학
"예술이란 무엇인가" 고백하건데 이 커다란 질문 앞에 우매한 나는 답을 내놓을 역량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너에게 예술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있다. 나에게 예술은 고백이고 바램이며 위로이고 정화(淨化)이다. ● 작년은 내게 유난히 힘들었던 한 해였다. 안타까움으로 부대꼈던 마음은 여과 없이 그림에 나타났다. 그 동안 익숙했던 고풍스런 은유의 방식으로는 담아낼 수 없던 감정들은 노골적이며 격해지고 아프게 형상화 되었다. 뱉어내고 싶었고 드러내고 싶었다. 나는 위로가 필요했다. ● 모래먼지 날리는 바닥에서 한바탕 뒹굴고 나니 나를 힘들게 했던 대상은 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내 마음이었음을 문득 깨닫게 되었다. ● 관계 속에 살면서 관계 속에 상처받고 그러면서도 또 관계 속에서 위로받기를 원하는 모순 ●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풀도 나무도 새도 꽃도 바람도 서로에게 아무 것도 바라고 기대하지 않으며 그저 생겨났다 사라질 뿐이다. 시작을 기뻐하지도 소멸을 슬퍼하지도 않는다.
목소리 높이던 그림들은 다시 차분히 가라앉고 있다. 더 단순해지고 더 덤덤해지길 바란다. ● 지난 전시에서 거대한 장막처럼 펼쳐져 있던 벽들과 굳게 잠겼던 문들을 그것들이 속해있던 건물이라는 인위적인 육중한 구조로부터 분리시킨다. ● 뜯겨져 나온 벽과 문들은 이제 더 이상 건물의 질서에 복속할 필요가 없다. 무언가를 힘들게 머리에, 어깨에 짊어지고 지탱할 의무도 누군가에 의해 열리고 닫히며 부셔질 필요도 없는 것이다. ● 뜯겨져 나온 모든 것들은 상실인 동시에 자유이다. 완결된 구조에서 뜯겨져 나옴으로 인해 원래의 기능은 상실되나 역으로 뜯겨져 나옴으로 인해 아무런 목적 없이 그것 자체로 새롭게 존재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이 생겨난다. 용도를 상실한 비애보다는 속박됨 없는 자유로움이 더 크다. 긴 시간 묶여있던 하나의 기능, 하나의 목적. 그 강제성으로부터 홀연히 벗어나면 존재함 그 자체만으로 충분해지는 것이다. ● 뜯겨져 나온 모든 것들에게 깊은 경의를 바친다. ■ 서은애
Vol.20181015f | 서은애展 / SEOEUNAE / 徐恩愛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