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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도스 Gallery DOS 서울 종로구 삼청로7길 37 Tel. +82.(0)2.737.4678 www.gallerydos.com
현실과 이상세계의 교차지대, 검은 정원 - Scenery 1. 현실 '너머'의 이상세계, '풍경 너머' ● 박영학은 오랫동안 산, 나무, 논과 밭, 마을, 바다가 펼쳐진 자연의 풍정을 담아왔다. 모두 자연의 본성에 가까운 것들이다. 뚜렷하게 눈에 들어오는 소재들로 구성된 그의 화폭에서 유독 '보이지 않는' 것은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의 손길이 닿은, 이른바 문명적인 것들도 검은 선의 윤곽만을 취하고 있어 그 공허한 존재감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마치 '인위'로부터 '자연'을 지키려는 듯, 인간의 온갖 흔적들이 화면 밖으로 사라지거나 증발된 것이다. 그 반대로 자연의 생명력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또한 함축하는 대상은 나무다. 치밀한 정밀묘사로 화면의 공간을 수북하고도 꼼꼼하게 메우며 하얀 바탕과 공허한 존재들을 품어 아우른다. ● 자신을 낱낱이 설명하고 부각하는 나무, 텅 비어버린 논·밭·산야, 그 사이를 휘휘 돌아다니는 기하학적인 검은 선. 몽타주처럼 기괴한 풍정이다. 비움과 메움이 노골적으로 대립하는 공간이다. 더 나아가 자연과 문명이 이질적으로 대비하며 불통하고 불화함을 드러낸 현장 같기도 하다. 혹은 현대인의 사회적 소외와 부적응에 대한 저항과 반목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 과연 박영학의 그림은 어느 지점에서 말을 걸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경직된 의구심과 달리 작가의 창작의 지향점은 회화에 대한 지극히 전통적이고도 순수한 가치와 인간의 삶에 대한 묵상적 위안을 추수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
박영학은 자신의 회화세계에 대해 '현실의 산과 들을 거닐며 보고 느낀 풍경 중에서 아름답다고 기억되는 것을 되살린 시공간의 풍경'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중국 남북조시대 송(宋)나라의 화가 종병(宗炳)이 '와유(臥遊)와 흉중구학(胸中丘壑)'의 태도로 산수화를 남긴 기원적 의미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관점으로, '자연주의'와 '표현주의'를 기저로 한 창작 행위의 실천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보니 작가의 회화세계는 현실에서 출발했으나 아름다움만을 걸러낸 이상적인 공간으로 재구성되고, 이를 통해 현실이면서 이상적인, 혹은 현실을 통해 이상을 보는 시지각의 변환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가 언급한 현상학적 존재론의 관점과도 상통하는 지점이다. 사실성에서 출발하여 대상의 본질을 통각하는 현상학적 가치는 극단적 주관주의와 극단적 객관주의에 대한 경험으로 계측된 합리성에 결합시키는 개념이다. 보고 보이는 '투명성'을 골자로 하는 현상학의 개념은 박영학이 언급한 '너머', 즉 현실과 이상을 투과하는 '너머'의 본뜻에 중첩된다. 그리고 작가가 생각하는 현실 속 아름다움, 즉 이상적 풍경에서 제외된 문명의 소산들은 인간의 욕망과 욕심의 무게로 인해 '너머'에 안착하지 못한 채 존재의 부재만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삶의 순환 구조에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묵상이자 반성의 흔적일 것이다.
다시 작가의 그림 속 풍경으로 돌아가면, 그의 기억에 남아있는 아름다운 풍경이란 결국 나무, 즉 자연이다. 혹은 자연으로 상징되는 순수한 생명력이다. 작가는 이러한 '자연성'을 보존하기 위해 자연의 일부분이었던 숯, 목탄, 돌가루(석채) 등을 재료로 취해서 자연의 풍경을 완성한다. 말하자면 자연에서 가져온 '자연'에 새로운 생명과 기운을 불어 넣어 다시 그림 속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의식인 셈이다. 그리고 그 자연과 함께 있어야 할 문명의 소산들은 일정한 검은 선으로 자신의 부재를 완강하게 노출하여 스스로 자연에 순응하고 조화하는 가치를 지닌 뒤에 비어있는 자리로 회귀할 것을 종용받는 듯하다. 이처럼 박영학은 스쳐 지나칠 수 있는 현실의 시공간 속 아름다움, 즉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면서 우리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꾸준히 자문자답해 왔는지도 모른다. '풍경 너머로(beyond the scenery)'는 자연에 투영된 이상사계의 모둠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상세계에 닿지 못한 현실에 대한 역설, 현실 속 삶에 대한 반추를 권유한다. 현실 '너머'의 이상세계를 향한 여정은 결국 현실로 다시 돌아오기 위한 시선이었음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Scenery 2. 현실과 이상 '너머'의 신세계, 검은 정원 ● 『검은 정원』 연작은 지금까지의 박영학의 회화세계와는 정반대의 시점을 보여준다. 손에 닿지 않는 먼 이상향을 좇아 하늘 위에서 조감하는 매크로의 시선은 이제 지상으로 내려와 손이 닿는 가까운 현실의 정원을 클로즈업하여 마이크로 단위의 시공간 여행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작가의 현실 속 생활환경이 바뀐 데에서 기인한다. 테라스가 딸린 주택으로 이사한 후 나무와 꽃이 있는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작가는 자신에게 진정한 휴식과 위안을 준 것은 역시 자연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했지만, 그것은 더 이상 먼 이상세계에 존재하는 자연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자연, 특히 스스로 가꾼 그만의 자연 공간인 '검은 정원'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잔뜩 마음의 준비를 할 필요 없이, 그저 힘을 빼고 편안하게 그 공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면 힐링의 이상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 그런 까닭에 작가의 화폭에 새롭게 자리한 풍경은 마치 그 자신이 숲 속의 후미진 구석에 들어가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가지고, 나무줄기와 꽃, 풀, 괴석 등이 서로 어지럽게 뒤엉켜 있는 장면을 포착한 듯하다. 여기에서는 숲이나 나무의 전모라든가 자연과 조화할 존재들을 기다리는 공허한 여백들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또한 자연의 생명력을 대표하는 나무도 흐트러짐 없는 최상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어둡고 다소 음습해 보이기까지 하는 검은 정원의 단상들은 이리저리 꺾이고 휘어진 나무줄기와 피었다 시든 흔적이 남아있는 꽃과 열매들, 오랜 풍화작용으로 구멍 나고 깨진 괴석들이 자신들의 생노병사의 순환을 결코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과정적 상황들을 빼곡히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그저 '거기'에서 호흡하고 있는 '그대로'의 '순간들'인 것이다.
작가는 '검은 정원' 속에서 "잘 그려야 한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편안한 자세로 작업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풍경 너머'의 이상향은 그에게 '잘 그려야 하는 욕심'이 투사된 세계였을 것이다. 인공의 문명이 자연에게는 위해한 것이기에 그에 대한 필연적인 반성과 예술적인 보상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풍경 너머'의 풍경은 자연이 지니는 아름다움과 자연의 존재에 대한 소중함을 발견하고 그러한 자연을 존숭하는 태도가 확연하게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자연, 즉 이상세계는 '있음'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새로운 '검은 정원' 연작은 그가 좇았던 이상세계에 대한 가장 확실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작가는 자연 속에 이상적 아름다움이 존재함을 확인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연의 순환에 대한 가치, 자연과 소통하며 생명의 기운을 주고받는 것에 대한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이제 그에게 아름다운 기억이란 박제된 이상세계의 자연 풍경이 아니라 현실에서 자연과 직접 대면하고 함께 호흡하는 시공간의 공유 체험으로 전환된 것이다. ● 『검은 정원』에서는 엄격한 규율보다는 무질서한 자유가 두드러진다. 목탄으로 그어진 기하학적인 검은 선은 그동안의 일사분란함을 벗어버리고, 저마다의 자율적인 리듬을 타며 생기를 발산한다. 또한 흑백의 무채색이 아닌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강렬한 인상을 자아내는데 이 또한 자연이 지닌 활력을 강조하는 듯하다. 목탄과 파스텔을 눌러쓰는 『검은 정원』의 채색방식은 언뜻 보기에 건조하고 불투명한 느낌을 주지만, 자연의 담박함과 투박함을 전해준다.
박영학의 새로운 도전은, 이상세계란 끝없이 쌓고 만들어도 '이상'일뿐이며, 현실에서 찾은 위안과 평안이 곧 '이상세계'임을 말해준다. 어쩌면 이러한 행보는 한 마리의 새가 되어 광대한 산야를 보고자 했던 문인들의 심상 속에 매란국죽(梅蘭菊竹)의 생활 속 사군자를 가까이 하고자 했던 양가적 태도와도 비견되며, 초월적 관념론을 넘어 세계와 존재로 나아가는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적 환원의 개념과도 상통하는 면모라고 하겠다. ● 박영학은 '풍경 너머'에 '검은 정원'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이상세계'가 '현실세계'의 이면이며 '너머'는 이 두 세계간의 투명한 통로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말하자면 박영학의 『검은 정원』은 우리 앞에 현실 속 이상, 이상 속 현실은 늘 존재하며, 그것은 나와 교감하는 관계성에서 재발견되는 것임을 재차 확인하게 한다. ■ 최정주
Vol.20180920h | 박영학展 / PARKYOUNGHAK / 朴榮鶴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