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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0901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2:00pm~07:00pm / 월요일 휴관
공간:일리 space illi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2길 17-2 (통의동 37번지) 3층 www.space12.gallery www.instagram.com/space_illi_1and2
"성(性)/성(聖)"의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가학/피학"의 꼬리 물기 ● 달포 전인 7월 중순 무렵, 전주대 이영욱(李英旭) 교수로부터 이 전시의 평문을 맡아 달라는 청탁을 받게 되었다. 그때 전시할 작가의 이름을 전해 들으면서 '언젠가 누드 사진의 게재 건으로 세간에 파문이 있었던 그분이신지'를 물었더니, '아! 이 김인규 선생이 바로 그 김인규'라는 답을 듣게 되었다. ● 당시 '그것이 일반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성적 수치심을 유발시키는가?' 또는 '과연 그것이 예술이냐 외설이냐?' 하는 등등의 통속하고 진부한 질의로서 각종 미디어와 지상을 오르내리며 세인들의 구설을 통해 이에 대한 이런저런 그 나름의 각개 입장들이 제기되기도 했었고, 한동안은 그에 대한 갑론을박 및 공방들도 꽤 있었던 것으로 얼핏 기억된다. 작가가 표현하려 했던 원의(原意)와는 달리, 우리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는 이 사건이 황색 저널리즘의 먹잇감 또는 대중의 가십거리로서만 쉽게 소비되거나 과도하게 도덕주의적 관점에서 논란에 휘말려진 측면이 없지 않다. 어떤 쟁점이 공론화되는 과정에서 도발성을 띠게 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주제가 '성(性)' 또는 '성(聖)'에 관한 담론들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들은 세상 그 어디에서라도 터부시될 수 있는, 금기들 중의 대표 선수이기도 하다. 예술적 발언에서 '섹스'나 '종교'의 언어와 도상들이 가장 빈번하게 차용되거나 패러디되는 것 역시 이런 이유와 결코 무관치 않다. ● 이번 전람회에 나오는 전체 작품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성(性)'을 소재로 한 작품들에 더해 '성(聖)'을 소재로 하는 작품들, 그리고 '성(性)'과 '성(聖)'이 한 화면 속에서 서로 혼재된 작품들까지도 눈에 띈다. 사실은 출품된 작품들 전부가 이 두 가지 내용으로서만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것이 전혀 과언은 아니다. ● 우선 '열락(悅樂)'이라는 제목이 붙은 두 점의 작품들을 살펴보자. 작품 『열락(2010)』에는 여자의 젖가슴을 세밀하고 정교하게 묘사한, 아주 생생한 형태의 도상이 유채로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젖가슴 한가운데의 젖꼭지 부분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기묘하게도 젖꼭지가 뜯겨 나가버린 상처의 흔적은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무저갱인 양, 낯설고 섬뜩하게 닿아온다. 일반적으로, 젖가슴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 번째로는 '생명의 젖줄'인 '성(聖)'이다. 엄마의 젖을 먹는 아이에게 젖가슴이란 자신의 전체 외부 세계를 표상하는 일종의 '세계-원형'이며 정서적, 신체적인 만족과 생존을 위해 자신이 거기에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절대-대상'이다. 두 번째로는 '쾌락의 원천'인 '성(性)'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성인 남성의 욕망을 고조시킬 수 있는 성적 표징으로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그로부터 8년이 지난 후에 제작된 같은 제목의 작품 『열락(2018)』은 이전 『열락(2010)』의 화면 위에서 보이던 그 뚫린 구멍이 완전히 봉합된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외과의가 지금 막 수술을 끝내놓은 자리처럼 말이다.
엄마의 젖가슴을 욕망하는 갓난아이의 마음속에는 엄마에 대한 표상이 아직 완전히 하나로 통합되어 있지 않다. 이 시기의 아이는 도무지 엄마를 하나의 전체상으로 파악할 수 없기에, 엄마의 어떤 일부분을 엄마의 전부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인식의 한계를 지닌다. 그래서 젖이 넘치게 나올 때의 (엄마의) 젖가슴은 좋은 젖가슴으로, 젖이 말라 잘 나오지 않을 때의 (엄마의) 젖가슴은 나쁜 젖가슴으로, 그때그때 서로 다른 두 감정이 엇갈리면서 아이의 마음속 엄마의 상은 좋은 엄마와 나쁜 엄마로 분열된다. 사랑과 미움을 번갈아 가며 불러일으키는 이 분열된 두 대상이 사실은 같은 하나의 대상이라는 것을 아이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의 아이에게 나쁜 엄마는 무서운 공포의 대상으로 다가오게 되는데, 아이는 젖꼭지를 물어뜯는 행동으로 자신의 공격성을 마음껏 분출하면서 나쁜 엄마를 해치려 한다. 그러나 이내 아이는 공격을 받은 나쁜 엄마가 다시 자신에게 복수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다. 즉 아이에게 이 시기는 편집적인 의심과 두려움의 시기이자 통합이 불가능한 전적인 분열의 시기인 것이다. 그래서 발달 단계에서의 이 시기를 '편집-분열 위상(paranoid-schizoid position)'이라 한다. ● 그러나 이후 아이는 성장함에 따라 차츰 외부 세계를 파악해 낼 수 있는 통합적 능력을 갖추어 나가게 된다. 즉 좋은 엄마와 나쁜 엄마가 서로 다른 두 엄마가 아니라 같은 하나의 엄마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비로소 아이에게는 자신의 무분별한 공격이 엄마를 죽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근심이 생겨나게 되고, 지금까지의 잘못된 자기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면서 아이는 애도와 우울감에 빠져든다. 엄마가 자신을 해치려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엄마를 해치려 했다는 사실을 자책하면서, 아이는 전에 자신이 맹렬하게 공격했던 엄마의 회복과 안녕을 마음속 깊이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발달 단계에서의 이 시기를 '우울 위상(depressive position)'이라 한다. ●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의 유아기 인간 발달에 관한 이러한 설명은 작가의 작업이 지시하는 심층적 내면이 무엇인지를 해석하는데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작가는 '그간 작업의 과정 안에서 계속 헤매다가 일순 젖꼭지에 구멍을 뚫어버리면서 불현듯 고민이 해결되고 답답함에서 벗어나 통쾌함이 실현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나중 작업에서의 이전에 뚫어버린 구멍을 꿰매는 행위가 나 자신에게는 위로의 의미로 다가왔다'라고도 언급했다. 즉 대상을 향하는 가학적 공격을 통한 파괴의 본성에서 시작된 작업의 모티브는 8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이것을 취소시키려는 회복을 위한 위로의 여정으로서 귀결되고 있는데, 이것은 '성(性)'의 이미지를 빌어 작가가 인간과 세상에 대해 느끼고 알아가는 진행 과정들이 어떻게 변화되어 나갔는지를 간명하게 요약해주고 있다. 결국, 이 작업은 자신의 분노가 젖꼭지에 구멍을 뚫는 – 혹은 젖꼭지를 물어뜯는 - 가학으로 표출되다가 나중에는 그 구멍을 꿰매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공격을 자책하는 피학의 지점으로 회귀하게 되는 정신역동의 큰 흐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이와 상통하는 또 다른 모티브는 '성(性)'과 '성(聖)'이 혼재된 작업에서 발견된다. 이 범주에는 『내 살이니라(2018)』, 『한 찌질한 남자의 최후(2018)』 등의 작품들이 포함되는데, 성스럽고 숭고한 소재와 모티브가 가학적 투사(sadistic projection)와 피학적 내사(masochistic introjection)의 사이에서 어떻게 호환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작품 『내 살이니라(2018)』에서는 피학자인 예수가 십자가에 메어 달린 채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는, 자신의 살과 피를 가학자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것은 유카리스티아(εὐχαριστία, 성찬)가 의미하는 바 그대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예수는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는 피학적 기제를 통해 사람들의 가학적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처음에는 '나쁜 엄마'의 젖을 물어뜯는 아이처럼 맹렬한 분노를 표출하던 '편집-분열 위상'의 사람들이 피와 살을 내어주는 '좋은 엄마'와 같은 예수의 모습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우울 위상'의 사람들로 전환되는 독특한 지점을 화면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 중세 성화의 도상을 차용한 작품인 『한 찌질한 남자의 최후(2018)』 역시,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예수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가학자들로 하여금 애도와 죄책을 느끼도록 만드는, 피학자로서의 전략을 한 번 더 채택하고 있다. 결국, 이 일련의 작업들 전체 - 『열락(2010)』, 『열락(2018)』, 『내 살이니라(2018)』, 『한 찌질한 남자의 최후(2018)』 - 는 "성(性)/성(聖)"을 가로지르면서 "가학/피학"의 연쇄를 아우르는, 상호의 공역(共域)으로서 파악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인심 - 욕정에서 나온 마음 - 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심 - 도를 지키려는 마음 - 은 극히 희미하기만 하니 오로지 정밀(精密)함과 전일(專一)함으로서 진실로 그 가운데(中)를 잡으라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書經 『大禹謨』) ● 이 16자의 짧은 문장은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蕩文武周公)으로 이어지는 동양의 전통적인 내성외왕지도(內聖外王之道)의 핵심을 요약, 포괄하고 있는데, 이는 공자(孔子)와 자사(子思), 맹자(孟子)와 주자(朱子)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지면서 중용(中庸)과 존천리거인욕(存天理去人欲)의 사상 체계를 확립할 수 있게 만드는 원리와 근거가 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의 인심으로 인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도심이 발현되지 못하는 것이므로, 어떻게 인욕(人欲)을 다스리면서 천리(天理)를 보존하느냐 하는 문제가 인성론(人性論)의 주요한 쟁점으로서 대두되었던 것이며, 그에 대한 해법으로서 희로애락의 감정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未發)' 상태인 '중(中)'을 지키는 것이 소아(小我)적 욕망으로부터 보편적 대아(大我)를 향하는 유일한 길임을 천명한 것이다. 동양적 사유 체계에서는 몸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매개로 하는 욕망은 길들여져야 하고 다스려져야 하는 어떤 것이었다. 이는 서양의 경우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로마서 8 : 13) ● 여기서 로마서의 '육신'에 해당하는 희랍어 단어는 '사르크스(σάρξ)'이며 이는 서경(書經)에서의 '인심(人心)'과 상통한다. 마찬가지로 '영'은 '프뉴마(πνεῡμα)'이며 이는 '도심(道心)'에 상응한다. 동, 서양 유교와 기독교는 공히 육(肉)을 멀리하고 영(靈)을 일깨우는 것이 진리됨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영-도심'을 회복하고 '육-인심'을 멀리해야 한다는 주장 자체가 역으로 '육-인심'의 강력한 실재성을 강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작품 『발각된 사랑(2018)』에서의 한 쌍의 남녀 성기는 마치 채집된 곤충의 표본처럼 화면에 제시되고 있다. 또 다른 작품 『은신술(2018)』에서는 바로크 시대 곤충 표본 그림의 도상 안에다 남성의 성기 하나를 살짝 숨겨놓았다. 이것은 『은신술(2018)』 속의 그 남성 성기 역시도 채집된 곤충의 표본처럼 박스 안에 드러나지 않게 감추어진 상태로 놓여 있음을 은연히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채집된 곤충인 것처럼 모호하게 성기를 위장시켜봐야 실상 그것은 곤충이 아닌 성기일 뿐이다. 이 도상들은 숨겨진 성기가 표상하는 바처럼 그 욕망이 겉으로는 교묘히 은폐되어 있을지라도, 또 잘린 성기가 표상하는 바처럼 그 욕망이 밖으로는 세련되게 거세되어 있을지라도, 이 은폐되고 거세된 남성 성기가 표상하는 속과 안의 욕망이 지금도 아직 여일(如一)하게 들끓고 있음을 폭로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여기에서 '성(聖)'의 상징인 예수를 자신의 작업 안쪽으로 이끌어오고, 다시 남성인 예수를 보편적 남성성과 연결시키고 있다. 일찍이 남성은 가부장으로 상징되는, 마치 예수와 같이 존경과 우러름을 받는 위상을 점유하고 있었으므로 작가는 '성(聖)-예수-남성'의 연결을 통해 남성과 여성 사이의 성적 위계와 권력의 하이어라키(hierarchy)를 환기시키려 하고 있다. 작가는 특히 최근 미투(Me Too) 운동의 진행을 보면서 '성(聖)-예수-남성'의 구조가 결정적으로 전복되고 있음을 느꼈다고 이야기했다. '성(聖)적 존재'가 아닌 '성(性)적 존재', 숭배가 아닌 연민의 대상으로 전락한 남성의 실체를 새삼 응시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남성은 여성과 섹슈얼한 맥락으로 연결되며, 성적 욕망의 추악한 발현과의 연관 속에서 결국 '성(聖)-예수-남성'은 '찌질한 남자'로 격하되고 그 찌질한 남자는 작품 속에서 십자가상의 예수처럼 처절한 최후를 맞게 된다. 성찬식과 성기의 대비를 통해 살과 피를 주고받는 예수와 인간 사이의 가학과 피학의 고리가 '성/속(聖/俗)'의 맥락으로부터 남녀라는 '욕망-주체/욕망-대상'의 맥락으로 전도되는 것이다. 이렇게 주체할 수 없는 성적 욕망에 휘둘리는 존재로 전락한, 그리고 그러한 존재임이 지금-여기의 현장에서 이미 백일하에 드러나 버린 남성들은 이제 역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처럼 자기희생적인 피학성을 발동시킴으로써 가부장적 가학성을 은폐시키는 소심한 '은신술'의 책략을 구사한다. 작가는 지금의 미투 상황이 남녀 간의 편향된 권력 관계에서 기인한 여성들의 분노 표출이므로 이것을 정당한 세태의 흐름으로 바라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처럼 구차한 피학의 변신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남성들의 현실과 처지에 대해서는 깊은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낀다고도 언급했다.
이 '성(性)/성(聖)'과 '가학/피학'은 또 다른 차원과도 연관된다. ● 주이상스(Jouissance)는 욕망의 절벽 끝에 있는 아름다운 꽃 한 송이 같다. 꽃을 내 손에 쥐고 꺾는 순간 나는 절벽 밑으로 굴러 떨어진다. 그런데 어쩌나 … 그 꽃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으니 … 그게 인간이다. (변상규)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 : 24 - 25) ● 쾌락은 죽음과 연결된다. 쾌락을 욕망하다가 그것을 소유하면 종내는 허무만이 남는다. 지상(至上)의 열락에는 치명적인 무저갱이 마치 독사의 똬리인 양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인간은 그것을 갈망하기를 도저히 그칠 수 없는 미욱한 존재이기도 하다. 작가는 작품 『열락(2010)』에서 젖가슴의 색과 그 피부의 질감을 극한까지 정치하게 묘사해가고 있다. 그 밀도 있는 묘사의 행위처럼 현란한 욕망에 집착하고 거기에 세밀하게 다가갈수록, 그래서 점점 더 그 욕망의 극점까지 근접할수록, 오히려 그 욕망에서 미끄러지고 배제되며 소외되어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그 처절한 극한의 지점에서 젖꼭지를 제거해 버림으로써, 자살하듯이 그 욕망의 대상을 거세해 버림으로써, 오히려 욕망은 역설로서 구현된다. 그래서 욕망은 그 정점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어긋나고 틀어지면서 서로 배반으로 귀결되어 버린다. 바로 이것이 쾌락과 죽음이 맞닿은 지점인 절대 쾌락, 곧 주이상스다. 최대치까지 발기된 남근이 오르가즘에 이르게 되면 이내 열락의 사정이 뒤따르고, 결국 그 이후에 돌아오는 것은 죽음뿐이다. 항룡(亢龍)은 유회(有悔)라, 곧 극상의 쾌락은 나락의 급전직하를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 자신의 제목인 '열락'이 의미하는 바처럼, 주이상스가 작동되는 전형적인 기제를 단적으로 시현(示現)해 주고 있다. ■ 김동화
Vol.20180902e | 김인규展 / KIMINGYU / 金寅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