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락 悅樂

김인규展 / KIMINGYU / 金寅圭 / painting   2014_0319 ▶ 2014_0412 / 월요일 휴관

김인규_열락 2010-1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0

초대일시 / 2014_0319_수요일_06:00pm

후원 / 사계절출판사 기획 / 이영욱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복합문화공간 에무 Multipurpose Art Hall EMU 서울 종로구 경희궁 1가길 7 Tel. +82.2.730.5604 www.emuspace.co.kr

첫 눈에 김인규의 작업은 하나의 충격이다. 보는 순간 우리는 마치 망치로 머리를 강타 당한 듯 그것에 방전된다. 시각을 뚫고, 뇌수를 흔들며, 몸을 가로질러 파고드는 어떤 전율. 그 작업들을 마주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그것들은 금지된 것, 외설스러운 것, 부정하고 거부하고 배척해 버려야 할 어떤 것을 내장하고 있다. 마치 죽음의 응시와도 같은... 하지만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다. 충격은 나를 사로잡아, 그 속에 나를 가둔다. 그리고 어떤 곧추 선 떨림, 흥분 속에서 나는 그것과 대면한다. 초점은 일단 구멍 그리고 그 주변 몸의 표면을 따라 피어오르는 피부의 지층에 있다. 구멍은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불길하게 터져 있거나 혹은 갈라져있다. 그것은 속을 들여다 볼 수도 없고 보아서도 안 되는 어떤 심연을 내비친다. 끝 모를 어둠 속으로 우리를 내팽개쳐 버릴 듯한 검은 허공. 때문에 시선은 불가피하게 구멍으로부터 멀어져 그 주변, 바깥, 피부의 표면으로 이동한다. 그리하여 그곳을 떠돌고, 그곳에 머문다. 놀랍게도 이곳에 펼쳐져 있는 것은 예상치 못한 향연이다. 촉각으로 구성된 세계. 작은 돌기들, 그 크고 작은 돌기들의 연쇄로 이루어진 주름들, 솜털의 바다, 흔적처럼 내보이는 핏줄과 그것들로 구성된 망, 하얀 점들로 피부를 이루는 바탕의 표피. 시선의 촉각은 이곳에서 몸의 표면, 그것이 이루어내는 굴곡을 따라 여행을 시작한다. 언덕과 구릉, 끝없이 펼쳐진 평원, 혹은 마른 사막, 구멍 가장자리의 화산지대, 깊은 계곡들과 그 그림자 속 공간, 검고 낮은 숲... 작은 폭발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벌레의 더듬이와 촉수처럼 시선과 촉각은 이 곳 사물의 감각들을 탐색하고 또한 탐식한다. 이것은 위험한 여정이다. 하지만 동시에 흥분과 쾌락으로 충만한 여정이다. 금기와 그것에 대한 저항과 위반으로 더욱 가열된 충동이 끝내는 만족감에 떨게 되는 여정. 열락Jouissance.

김인규_열락 2012-1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2
김인규_열락 2010-2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10
김인규_열락 2012-2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2

특이한 점은 이 그림들이 성적 열락에 대한 예술적 도해라고해도 좋을 정도로 정신분석학적인 성개념을 교과서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라깡에 따르면 인간적 의미의 성이 탄생하는 순간은 대상을 획득하는 순간이 아니라. 대상을 영원히 상실하는 순간, 곧 아버지의 이름으로 어머니의 가슴과 육체를 상실하는 순간이다. 성이란 영원히 상실되어 기억이나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 대상을 되찾으려는 부단히 반복되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김인규는 이번 작업들을 준비하던 과정에 있었던 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어느 날 그는 가슴을 그리다 갑자기 그리고 있던 가슴의 꼭지 부분을 잘라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그 꼭지를 지워버리고 그곳을 검은 구멍으로 채웠고, 순간 말할 수 없는 통쾌함(동시에 공포)이 밀려오는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이때부터다. ●꼭지가 사라지고 남은 이 구멍(혹은 꿰맨 상처)은 상실된 대상과 상응한다. 이로써 성적 열락을 도해할 수 있는 기본 이미지가 확보된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성적 열락은 상실의 회복이다. 완전한 만족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부분적 만족 혹은 박탈된 만족만이 가능하다. 따라서 성적 충동은 결코 대상에 도달하지 못한다. 충동은 단지 대상의 주변을 도는 '일주운동' 그 자체에서 여분의 만족에 도달할 수 있다. 이 그림들에서 시선의 촉각은 구멍의 주변, 돌기와 주름, 솜털, 핏줄에서 얻어낸 쾌락으로 바로 이 일주운동을 가시화한다. ● 하지만 열락은 또한 "고통속의 쾌락"이다. 회복과 재발견은 최초의 상실로 거슬러 오를 것을 요구하고, 이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가해진 거세위협에 대한 두려움 즉 초자아의 죄책감과 대면하는 고통을 동반한다. 여기서 쾌락과 죄책감은 같은 것이다. 양자는 대립하면서 동시에 중첩된다. 따라서 충동이 대상에 다가가면 저항(공격성)을 느껴 그로부터 멀어지고, 또 이렇게 멀어지면 쾌락을 느껴 다시 대상에 다가가는 현상이 반복된다. 이는 그림을 보는 과정에서 시선이 구멍과 피부 지층 사이를 오가는 방식을 통해 구현된다. 그렇다면 김인규의 작업은 성적 열락의 예술적 도해라기보다는 차라리 성적 열락과 대면케 하는 체험의 모형에 가까운 것 아닐까?

김인규_상처 2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2
김인규_아르테미스의 사랑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13

김인규의 다채로운 개인 이력은 이런 맥락에서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는 '미술교사 김인규 사건'으로 유명했었다. 몸에 대한 가부장적인 시각이나 상업적 시각에 저항하는 취지로 홈페이지에 부부의 나체 사진과 작업들을 올렸지만, 그로 인해 그는 음란물 유포죄로 고발당했다. 또한 그는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으로 민중미술 운동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학교현장에 공공미술을 도입하는 개척자적 역할로 주목받았으며, 대안미술교과서 제작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한 바 있다. 그는 사회적, 예술적, 실천적으로 항상 통칭 진보의 길을 걸었다. ● 그렇다면 이 작업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는 왜 성적 열락을 그림으로 그려내야 했을까? 정신분석학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라"고 명령한다. 물론 이는 원하는 대로 권력을 추구하고, 돈을 추구하고, 성에 탐닉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는 타자의 욕망에 휘둘리지 말라는 의미다. 즉 아버지와 어머니의 욕망에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욕망에 휘둘리지 말라는 이야기다. 좀 더 근원적으로 그것은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명령이다. 환상은 '우리가 세계를 일관되고 의미 있는 것으로 경험하는 틀'이다. 그것은 주체가 열락의 실재를 거세당한 후 진입하는 상징적 질서의 결핍 혹은 비일관성을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 다시 말해 환상은 상징적 질서가 설명하고 상징화할 수 없는 외상적 상실을 관리하고 길들이는 방식이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라는 것은 따라서 이 세계가 결코 일관되고 의미 있게 설명될 수 없음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또한 현실이 화해 불가능하게 분열되어 있으며 이러한 사회적 갈등과 적대를 은폐하는 사회적 환상들 간의 투쟁이 벌어지는 곳임을 확인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이 관리하고 길들이려는 개인적 열락을 모든 보편적인 말씀에 앞서 위치시키라는 말이다. ● 오늘날 우리는 법과 정치, 민주주의 같은 상징적 질서들과 인간 자체에 대한 신뢰가 바탕에서부터 붕괴되고 있음을 느낀다. 굳이 예를 들진 않겠지만 신문을 통해 주변을 통해 혹은 나 자신에 대한 내성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김인규는 자신의 작업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기에 늘 회피되어왔다. 그것은 행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안과 공포와 마주하는 일이다. 그러나 회피는 결코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것은 자제하거나 또는 승화하거나, 대체할 일이 아니다." 혹은 "예전에 회화를 할 때, 그림이 완성되면 될수록 회화적 질서에 귀속되어 버리고 마는, 그래서 결국 욕망이 배제되어버리고 마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회화를 다시 욕망의 투기장으로서 느낀다. 그것은 어쩌면 일상 현실에서 실행할 수 없는 적나라한 싸움을 전개할 가상현실 혹은 새로운 현실일 수 있는 셈이다." 라깡은 대타자의 눈에 맞춰 행위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더 윤리적이라고 말한다. 이번 작업들은 김인규가 작가로서 새롭게 출발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관객들에게 그의 작업은 정직하려는 그 욕망으로 빛날 것이다. ■ 이영욱

Vol.20140327a | 김인규展 / KIMINGYU / 金寅圭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