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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대화 / 2018_0519_토요일_03:00pm
참여방법_인터넷 사전 접수(http://goo.gl/6d9JEQ) 및 당일 현장 참여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삼청로 18(사간동 78번지) Tel. +82.(0)2.720.5114 www.kumhomuseum.com
금호미술관은 조각을 통해 물질에 응축된 시간과 힘을 드러내며 인간을 성찰해 온 조각가 정현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정현은 철길의 침목(枕木), 석탄, 아스팔트 콘크리트, 잡석 등 산업 폐기물과 현대 사회에서 버려진 물질들을 재료로 하여 지속적으로 인간을 이야기해 왔다. 이번 전시는 폐한옥으로부터 남겨진 목재의 잔해와 경남 지역의 서원에서 나온 낡고 거대한 대들보를 재료로 한 신작을 선보인다. 대규모 콜타르 드로잉과 작가의 기존 작업 가운데 주요 작품 및 미공개작 또한 함께 구성되어 달라지는 재료와 형식 속에서 시련을 겪어낸 물질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금호미술관
정현의 세계에 관한 가장 흔한 오독 가운데 하나는 너무 간편하게 그것을 아르테포베라(Arte Povera) 미학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의 폐침목이나 철거된 아스팔트 파편을 중성적인 물성(物性)이나 재료 개념으로 읽는 것인데, 내 생각에 이는 명백한 오독이다. 그것들은 예컨대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Michelangelo Pistoletto)의 누더기 같은 '가난한 재료'가 아니다. 지오바니 안셀모(Giovanni Anselmo)처럼 화강석과 양상추의 물성을 대비시키는 방식은 정현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그다지 유효한 참조가 아니다. 폐침목이나 막돌, 철거된 아스팔트 파편에서 고가옥의 서까래에 이르기까지, 정현의 것들이 전통 조각의 문법에 위배되는 거칠고 불편한 속성의 것들임은 분명하다. 그가 기교적인 조각기법을 신뢰하지 않는 작가인 것도 물론이다. 반상업적이고 탈형식적 조형성을 추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도 이 세계에 대한 유의미한 진술이다. 그럼에도 보이는 것과는 달리 정현의 세계는 물성의 탐구나 유희, 또는 재료에 대한 유물론적 담론과는 오히려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정현이 전기톱과 도끼로 침목을 베거나 찍을 때 그것은 단지 재료를 가공하는 작업 이상이다. 이 세계에서 물질은 정신의 유비(類比)고, 막돌은 소박하지만 실존의 대체 불가한 메타포다. 폐침목은 존재의 담론을 위해 재배열된다. 파편화된 폐아스팔트는 존재 내면의 응어리진 것들과 긴밀하게 결부된다. 이는 이 세계가 두뇌로부터가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오는 것들에 절대적인 비중을 할당한다는 의미와 맞닿아 있다. 정현의 조각들은 두뇌로부터 오는 현학적인 것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이 세계에서 행위방식과 물질과 행위가 결합하는 방식은 결코 이론화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세계 자체가 이론으로부터 온 것도 담론의 구성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이론의 실현이 아니기에 수학화되지도 분석되지도 않는다. ● 해서 이 세계를 서구모더니즘과 형식주의 미학의 계보 안에 안치시키려는 시도는 계속해서 모호하게 되거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 모더니즘 조형미학의 맥락, 즉 물성의 탐구나 탐닉에의 온전한 몰입 같은, 일체의 인간적인 차원을 배제할 것으로 전제로 하는 기술적인 접근으로는 이 세계에 다가설 수 없다. 정현의 가슴에서부터 오는 인간적인 느낌이나 감동 없이 폐침목의 물성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접근이다. 물질을 대하는 정현의 태도는 자연을 통제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인식적 농간과 매우 긴밀하게 결부된 '재료'나 '기법' 같은 개념처럼 자연과의 필연적인 몰이해와 단절로 결코 귀결되지 않는다. 정현은 물질을 다루지만 가슴으로 그렇게 한다. 담론에 매몰되는 대신 마음으로 심취한다. 그의 물질들은 모더니스트의 물질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마음을 변두리로 내몰거나 영혼과 결별하지 않는다.
폐침목과 폐아스팔트 파편들은 그것들이 지나온 문명의 시간 자체다. 그것들은 물질인 동시에 시간이다. 물질화된 시간이거나 물질에 내포된 시간이다. 마치 살아있는 나무가 물질 이상인 것처럼, 그리고 인간은 그 안에 인격을 지닌 자연인 것처럼, 정현의 그것들은 탈문명적일 뿐 아니라 반문명적이기도 한 물질이다. 정현의 40개의 침목 군상이 이미 자연과 사람의 교환, 그 안에서 양자의 적대관계가 어떻게 화해하는가를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정현이 고가옥의 서까래를 쌓을 때, 물질과 비물질, 사물과 정신의 구분은 오히려 완화되거나 부정된다. ● 이런 의미에서 정현의 세계에 '재료'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에는 이미 대상화, 곧 인간의 인위적인 가공의 의미가 어른거린다. '재료나 '사용'은 자연을 도구화해 유용성과 효율, 자산으로 재구성하는 나쁜 문명의 발명품들이다. 정현은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의 사건이나 상태로서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이것이 문명과 자연에 대해 정현이 늘 취해 온 태도다. 그에게 '조각한다'는 것은 자연을 재료화하거나 물성을 탐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상황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을 의미한다. 이점이 정현의 조각을 다른 것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차이다.
정현은 정제된 금속이나 목재화된 나무, 잘 다듬어진 돌 같은 과거가 없는 것들 대신, 삶의 흔적과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것들만을 불러들인다. 현재는 갈라지고 터진 폐기물들이지만 한때는 '속도의 문명'이라는 악행에 주도적으로 가담했던 것들이다. 정현의 세계는 그것들을 거부하지 않는 것, 거부가 아닌 수용하는 것에 기반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를 따르면, 사람들은 거부함으로써 복수한다. "복수는 시간에 저항하고, 또 '과거의 한때'에 대한 의지적인 거부"를 뜻한다. 반면, 수용, 곧 받아들이는 것에는 '용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폐침목은 철로를 지탱해 기차를 달리게 했고, 폐아스팔트는 자동차들을 질주하도록 함으로써, 한때 '속도의 문명'으로 명명되는 악행을 자행했던 것들이다. 장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자면 "심지어 파국에조차 무심하게 해변을 따라 곧바로 달리는 사람들"의 문명이자, "홀을 따라 끝없이 도는 레코드나 증식하는 종양세포처럼 정지 공식을 잃어버린 사회"를 촉구하는 문명이다. 그럼에도 정현은 그 파국적 문명의 수행원이자 동조자였던 것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악행적인 과거에 깊숙이 관여되었던 그것들의 전력을 용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정현이 그것들을 받아들인 것은 그 역시 그것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유의 파편', 곧 이 빈곤하고 붕괴될 위험에 처해 있는 시대를 사유하기 위해, 그것들이 서로 부딪히고 결합하면서 내는 목소리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자주 과거의 파편들을 불러들이는 방식으로 사유한다. 그것들의 일대기를 자신의 아틀리에로 불러들임으로써 말이다. 그 저간에는 버려지고 폐기된 것들과의 조밀한 연대감이 존재할 것이다. 폐기된 폐침목이나 폐아스팔트는 그러므로 무작위로 선택된, 과거도 기억도 없는 물질이 아니다. 이제 그것들은 정현의 아틀리에에서 주어진 기회를 통해 자신들의 과거로부터 벗어나고 반성할 뿐 아니라, 속도의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의 표지로 거듭난다. 그것들의 짓눌림과 터짐과 갈라짐이 여전히 악행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는 현재를 과거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그럼에도 이 세상에 대해 믿음을 갖는 유일한 사람들이 예술가들"이라고 했다.
정현의 아틀리에에서 일어나는 것은 역전적인 사건이다. 그것들은 자신이 처음엔 자연이었고, 한때 나쁜 문명의 수행원들이었지만, 지금은 바로 그 문명에 의해 버림받고 폐기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고,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그것들은 다시 순환을 준비한다. 이번만큼은 나쁜 문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문명에 반박하고 저항함으로써 지속되기 위해서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그것들은 분해되어 다시 자연의 일부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렇듯 정현의 조각 담론은 결코 가난한 질료의 차원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사물의 인식에 기반한 상징성의 구현으로 나아간다. 역사와 사회, 존재에 대한, 긴밀한 서사를 구성할 준비를 마친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그 상징성은 '서 있는 사람들'처럼 인체의 형상이 주어졌을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모더니즘의 한때를 지나면서 조각은 '조각 자체'를 탐구한다는 지적 허영에 빠져 허우적댔다. 다른 한쪽으로는 정치적 정의에 관여한다는 또 다른 자만에 취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예술로 착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껏 경험한 바로는 조각의 힘의 출처는 아틀리에도 국회의사당도 아니다. 조각은 조각 자체로부터 오지 않는 것처럼, 조각의 저 너머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물질이 궁극을 자처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영혼인 척할 때일 것이다. 현대조각은 그런 기만의 덫에 걸려 상처를 많이 입었다. 물성을 탐구하지만 매몰되지 않을 때, 위험에 처한 세계를 고뇌하지만 정치적인 메시지로 변질되지 않을 때, 그 자체로 생명을 가장하는 대신 생명으로 나아가는 열망을 담을 때 조각은 비로소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조각이란 무엇인가?', 정현은 오랜 세월 이 질문을 품었고 스스로에게 던져 왔다. 그의 답 가운데 하나는 그 질문이 물질과 형식의 탐닉에 그쳐서는 안 되며, 반대로 정신이 완전히 물질을 정복하도록 두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물질도, 정신도 상실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질문과 결부되어야 한다. 작품의 내적인 세계 또한 상실되거나 부재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누가 진정으로 조각을 묻고 답하는 사람인가? 인간에 대해 묻고 답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조각을 스스로를 기만하는 알리바이로 전락시키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조각만이 힘 있는 것이 된다. 인간으로서 보는 사람만 진정으로 작가로서 볼 수 있다. 물질에서 영혼을 반추하고, 정신을 사물에 각인하는 변증적 인식 위에서만 조각은 그 고유한 가치를 경작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정현의 조각 세계는 그가 이 교차하는 두 질문과 맞서왔음을 보여준다. ■ 심상용
심상용, 「정현의 조각론: 조각은 어떻게 가치 있는 것이 되는가?」, 정현 초대전 『정 현 Chung Hyun』 도록, 2018.
작가와의 대화 내용 : 작가 정현과 미술평론가 심상용의 대담 형식으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는 시간 일정 : 5월 19일(토) 오후 3시, 금호미술관 3층 세미나실 참여방법 : 인터넷 사전 접수(http://goo.gl/6d9JEQ) 및 당일 현장 참여
Vol.20180409e | 정현展 / CHUNGHYUN / 鄭鉉 / sculpture.draw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