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헤어 라푼젤 Black Hair Rapunzel

전윤정展 / CHUNYUNJUNG / 全玧貞 / drawing.installation   2018_0305 ▶ 2018_0427

전윤정_억누른, 어두운 공원을 걷다(Suppressed, Walk though the dark park)_종이에 드로잉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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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정 홈페이지_www.chunyunjung.co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24시간 관람가능

스페이스 이끼 SPACE IKKI 서울 성북구 성북로23길 164 www.spaceikki.com

겹쳐진 실재, 그 속의 환영 ● 너무나 확고한 이미지에 잔잔한 바람이 분다. 바람이 가져오는 흔들림에 마음도 일부러 흔들려보고 바람결 따라 손짓도 따라가 본다. 마음에 묶인 덩어리가 결 끝에 그냥 한번 흔들려본다. 흔들리는 척한다. ● 전윤정 작업의 첫인상은 긴 겨울을 보낸 일기의 묶음을 툭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공유되지 않은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은 뒤섞이고 감춰져 있어서 여러 겹의 암호로 싸여있는 것 같았다. 2018 봄의 시작에서 IKKI에 찾아온 작업 「블랙 헤어 라푼젤(Black Hair Rapunzel」은 동화를 차용한 제목처럼 이야기를 쌓아 담아낸 큰 책이다.

전윤정_정체된, 지금은 마치 어둠(Stagnant, The present is like dark)_종이에 드로잉_2012

그의 작업은 추상적 형태로 쌓아올린 라인 테이프와 그것들 사이의 층차, 그리고 견고함을 위해 칠해진 마감재의 끈적하면서도 매끈한 결과물과 마주하게 된다. 검은 선들은 제목처럼 긴 머리카락을 연상시킨다. 길고 긴, 엄청난 양의 머리카락은 오랜 기간의 적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시간을 품은 머리카락은 기억의 산물이기도 하다. 모든 일의 흔적이 머리카락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블랙 헤어 라푼젤」은 라인 테이프가 쌓아 올려진 층차만큼 여러 이야기가 겹치고 겹쳐있다. 이야기는 드로잉에서 시작된다. ● 라인 테이프처럼 단색 얇은 선으로 채워지는 드로잉은 캔버스 작업과 비교해보면 신체, 나무, 물방울 등 형상이 더 또렷이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한 장 한 장 이야기가 구성되고 피어나는 느낌을 받는다. 채워진 선 사이로 얼굴 없는(얼굴을 구분할 수 없는) 신체가 드러난다. 얼굴 없는 몸은 선들 사이에서 헤엄치고 때로는 벗어나며 순간 훅 빨려 들어간다. 이 무명의 몸은 이중적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 강박하는 어떤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 치다가도 동시에 강박의 소용돌이를 즐기며 그 안에서 위로와 휴식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무명의 몸과 몸을 연결하는 선이 이 혼란스러운 감정을 연결하고 있다. 선은 날카로운 침과 가시가 되어 공격하다가도 깊이 빠지지 않게 막아주는 그물이 되기도 하며 바람결에 누운 풀더미가 되어 그 흐름에 몸을 숨겨주기도 한다. 또한, 선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라나는 생각, 옥죄어오는 생각이 퇴적된 머리카락이 되어 스스로 감싸고 이어나간다. 단절이 모여 흐름을 이룬다. 주인 없는 몸, 주인이 누군지 알려주기 싫었던 몸은 스스로 차분히 기록해가며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전윤정_BlackHair Rapunzel_캔버스에 라인테이프_130×194cm_2018

실재의 '불편한' 이야기들은 테이프를 쌓아 올리는 반복적 행위로 만들어진 추상적 형상 안에 감춰진다. (실제로 작가는 일련의 이야기와 감정을 감추고 싶다고 언급하고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언급했던 것 같다.) '불편한' 이야기는 실재이고 외상으로 남았다. 외상을 감추려 하지만 감춰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외상이 감춰지지 않는다고 해서 실재가 재현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실재는 재현될 수 없고 단지 반복될 수만 있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 "반복은 재생산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듯이 반복은 열린 개념이다. 반복적 행위와 그에 따른 강박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반복이란 행위를 통한 실재의 재현은 실재를 가릴(screen) 수 있으며 그 변화의 결과물을 통해 실재를 가리킬(point) 수 있다. 「블랙 헤어 라푼젤」에서 실재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만들어졌고 고정된 흔적으로 '반복'되었다. 그리고 동적인 요소, AR(Augmented Reality)이 더해짐으로써 흔적 안에 감춰졌던 이야기들을 환영처럼 드러내며 실재를 환기한다. 라캉은 이 지점에서 주체의 지각과 의식 사이에서 실재는 반복의 스크린을 파열시킨다(rupture)고 언급하며 이러한 외상적 지점을 투셰(tuché)라고 정의했다. (할 포스터, 『실재의 귀환The Return of Real』, 이영욱, 조주연, 최현희 옮김,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3, p.212) 라캉이 언급한 파열이 「블랙 헤어 라푼젤」에서 동일하게 일어난다고 보기는 어렵다. 재현의 반복이 정신분석학에서의 행위의 변주(라캉)와 예술에서의 행위 반복(전윤정)이라는 차이도 고려해야겠지만 실재의 환기 요소에 이전과는 다른 매체(AR)가 사용되었다는 점도 그 차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파열보다는 비교적 안정된 의식 상태에서의 아련함과 외로움, 스산함과 잔잔함이 느껴진다.

전윤정_BlackHair Rapunzel Part1_캔버스에 라인테이프_130×194cm_2018

잠들기 전 침대의 저 아래로 몸이 내려가고 정신은 또렷해지는 온전한 나를 느끼는 그 찰나가 있다. 전윤정의 작업은 그가 되는 온전한 순간의 기록이다. 어쩌면 그의 작업 앞에서 마주 서게 되는 것은 자신이 되는 그 순간이다. 자유롭지만 답답한, 흐릿하면서도 선명해지는 기억과 잊힘, 외로우면서도 편안한 그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긴 겨울 여행의 기록은 침잠하나 또렷하게 남았다. ■ 박우진

전윤정_BlackHair Rapunzel Part2_캔버스에 라인테이프_130×194cm_2018

생각과 감정의 기술- 불편한 드로잉 ● 그 동안 타인과 대화를 할 때 무의식적으로 노트 모서리에 낙서를 하면서 마음 속의 생각들을 끄적여왔다. 습관적으로 써내려간 낙서 위에 또 다시 겹쳐 그리거나 귀에 맴도는 단어들을 써내려가며 나만이 알아볼 수 있도록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이 소소한 '생각과 감정'을 시각화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가느다란 펜으로 매우 작게 그리다가 점차 크게 하거나 유기적인 형태로 증식시키는 방향으로 작업이 변화했다. ● 이러한 변화는 색에 대한 즉각적인 감정에만 집착하는 한계를 느낀 후, 점차 색을 배제하고 펜으로만 작업하게 된 것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그리고 오랜 고민과 탐색 끝에 마침내 지금의 작업에서 사용하는 검은색 라인테이프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 캔버스 혹은 공간의 벽에, 가늘게 자른 라인테이프를 겹쳐 쌓아 촘촘하게 박힌 검은 형상들을 쓰고 있다. 이렇게 직선과 곡선을 이용한 노동집약적 과정을 거쳐 한정된 공간과 시간 안에서 제한적으로 표현된다. ● 본인의 작업은 본질적 용도에서 벗어나 물질적 속성의 '불편함'과 현대사회 안에서의 '불편한' 감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본인은 이러한 라인테이프 작업을 '불편한 드로잉' 이라고 부른다.

전윤정_블랙 헤어 라푼젤 Black Hair Rapunzel展_스페이스 이끼_2018

사회적 관계 속에 얽혀 있는 복잡 미묘한 심리, 미처 표현되지 못한 생각과 타인과의 오해 등 감정의 파편은 이미지와 함께 깨알만한 텍스트가 들어간 드로잉으로 수집된다. 수집된 이미지는 오랜 작업 과정에서 시간의 단절이 주는 다양한 감정의 축적을 보여주는 가느다란 라인테이프의 선으로 조율된다. 그리고 외부에 실재하는 시공간적 제약을 인식하는 동시에 실존공간의 구조적 한계 위에서 스스로 감정을 통제해 가며 그리듯, 칠하듯, 쌓고 겹치면서 형태를 구축하여 공간으로 확장시켜 나간다. ● 검정 라인테이프라는 매체의 '불편한' 표현으로 다시금 '생각과 감정'을 통제하면서 감정에만 집착하지 않는 이성적인, 이상적인 '나'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시각적으로는 기술적 감각만이 아닌 내재된 이면을 드러내려고 한다. 테이프의 쌓기 또는 곡선과 직선으로만 나타내는 추상적 형상을 통하여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불편한 생각을 감추려 하는 것이다. 어디에도 없는 듯 하지만, 라인테이프가 그려진 방안에서 본인은 이전의 모습과는 다른 차이점을 가지며 이렇게 여전히 머무르고 있다. ■ 전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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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80305f | 전윤정展 / CHUNYUNJUNG / 全玧貞 / drawing.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