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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17 Thinkartkorea 선정작가 기획 초대展
주최 / (주)신한화구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포네티브 스페이스 ponetive space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34 Tel. +82.(0)31.949.8056 www.ponetive.co.kr www.thinkartkorea.com/gallery
"다름들의 공간, 헤테로토피아에서 길을 잃다 / 공간은 우리들 밖에서 사물들로 퍼져 나가 그것들을 표현한다: / 만약 네가 한 나무의 생존을 훌륭히 이루어 내련다면, / 그것에 내부 공간을 주라, 네 안에 / 그 존재가 있는 그 공간을. / 그것을 속박으로 둘러싸라. 하나 / 그것은 경계가 없고, 네 자신의 포기(抛棄) / 한가운데서 질서를 찾을 때에야 / 정녕 한 나무가 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詩), 1924) ● 우리말의 '공간(空間)'은 비어있는 사이이다. 말하자면 "공간은 한정하기 힘든 모든 것의 일반적인 저장소(receptacle)로 외견상 우리 주변의 빈 공간(empty space)" (패트릭 프랭크)이다. '장소'는 공간보다는 좀 더 정적이며 구체적인 지칭의 의미를 담고 있다. 영어의 'Space'는 우주로 계속 확장하여 인간으로서는 가늠하기 힘든 무한성을 내포하고 있다. 독일어의 'Raum'은 '숲을 벌목해 인간의 정착지로 만들다'는 어원적 의미에 따라 인간의 질서를 통해 만들어지는 '거주'의 의미를 담고 있다. 최은정의 이차원 화면 공간에 펼쳐진 삼차원의 이미지 공간은 어떤 공간일까.
우리가 최은정의 작품 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은 불가능한 섬(Impossible Island)이다. 몇몇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불가능한 섬'에서 드러나는 것은 섬의 모습이 아니라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공간들의 복잡다단한 이종교합이다. '섬'은 고립이다. 최은정 작품 속에서의 섬은 어디에도 고립되어있지 않다. 오히려 도저히 풀 수 없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복잡하게 화면 속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다. 공간이 '비어있는 사이'를 뜻한다면 최은정의 공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어있는 사이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꽉 차 있다. 섬이 '고립되어 동떨어진 땅'을 뜻한다면 최은정의 섬은 기이하게도 강박적으로 화면 여기저기와 연결되어 있다. ● 보통 시간은 연속적이고 비정형적인 비물질을 지칭한다면, 공간은 구체적이고 정형화된 물질을 지칭한다. 그러나 최은정의 공간은 비정형적이고 모호한 비물질성을 보여준다. 아니 너무도 과한 물질성을 드러내는 탓에 그 경계는 불분명하고 규정할 수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애매모호함으로 드러난다. 몇 년 전 최은정의 작품을 처음 마주했을 때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s)'를 떠올린 것도 작품이 주는 복잡다단한 이러한 모호함 때문이었다.
'헤테로토피아'는 푸코가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일종의 현실화된 유토피아로 독자적인 개념화를 시도했다가 포기한 미완의 개념이다. 이는 서로 양립 불가능한 복수의 공간을 하나의 실제 장소에 나란히 구현하는 것으로, 고립과 침투, 열림과 닫힘의 체계를 동시에 전제하는 환상 공간으로 기능한다. 헤테로토피아는 모든 문화에 존재하며 역사성 및 시간성과 관련이 있는데, 푸코는 헤테로토피아의 예로, '정원', '묘지', '박물관과 도서관', '휴양촌', '매음굴' 등을 들고 있다. 헤테로토피아는 언제나 그것을 주변 환경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열림과 닫힘의 체계를 갖는다. 그것은 실제로 위치를 한정할 수 있지만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장소들이다. 그리고 헤테로토피아들은 다른 모든 공간에 대한 이의제기이다. 따라서 헤테로토피아는 항상 복수(複數)이며 하나의 장소에 정착하지 못한 채 열림과 닫힘을 반복하며 공간 속에 모호하게 위치한다. ● 전시장이라는 하나의 헤테로피아적 공간에서 최은정은 또 하나의 헤테로피아를 창출한다. 푸코가 완전히 설명하지 못했던 헤테로토피아란 미완의 개념처럼, 최은정의 회화 속 공간은 현실 세계에 있을 법하나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설명될 듯 하나 동시에 규정할 수 없는 난장(亂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총합적인 아름다운 풍경의 모습이 아니라 단편화되고 파편화된 세계다. 이것은 매혹적인 색감으로 이루어진 유토피아이자 끝없는 절벽으로 추락하는 디스토피아이다. 이것은 자연과 함께하는 조화의 세계이자 그 자연을 기하학적인 구조물들이 숨막힐 듯 규정하는 부조화의 세계이다. 최은정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Impossible(불가능한)', 'Subtle(미묘한)', 'Floating(부유하는)', 'Oblique(사선의)' 등의 형용사는 작품의 모순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줄 뿐이다.
이러한 (불)가능한 (비)현실 세계에게 작가는 파이프, 사다리, 연결 구조물 등의 이미지들로 서로를 잇고 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거주함으로서의 건축함이란 측면에서 공간을 고찰하고 "이 땅 위에서" 즉 "하늘 아래" 땅(대지)와 하늘, 신적인 것들과 죽을 자들이 하나로 결집하여 모여드는 것을 건축의 특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대표적인 건축, 혹은 장소로는 다리가 있는데, 다리는 강 주변의 풍경으로서의 땅을 결집하여 모아들이는 것이다. 최은정이 구현하는 수많은 연결의 이미지들은 이러한 다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하이데거의 다리가 '거주함'이라는 공간의 본질에서 사방을 허용하고 불멸의 신과 죽을 운명인 인간을 하늘과 땅의 중간에서 연결하는 것이라면, 최은정의 연결물들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현실과 가상을 연결하여 그 자체가 하나의 헤테로피아적 관문(gate)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관문은 견고하게 닫혀있거나 활짝 열려있지 않다. 그것은 지옥문의 아가리처럼 살아있는 입이자 만들어진 구조물이다. 원래 '입을 벌리다(chainein)'라는 뜻인 '카오스(chaos)'가 '혼돈(混沌)'을 의미하게 된 것처럼, 최은정의 관문들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그 입을 벌리고 닫아 우리를 혼돈의 세상으로 이끈다.
가능한 한 모든 색을 쓴다는 최은정의 작품에서 나는 가능한 한 모든 기하학적 모양들을 구현해내고 있는 어디에도 없는 그 공간을 본다. 모든 것이 가득 차 있는 최은정의 화면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더 많은 빈 틈(chasm)을 보인다. 난간과 난간 사이, 자연과 구조물 사이, 물감이 흘러내리는 사이, 우리는 이질적 세계, 설명할 수 없는 여기와 저기,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함을 본다. 이런 최은정의 작품은 어린 시절 주사위를 던져 목표물을 향해 한 칸 한 칸 말들을 움직였던 놀이판 그림을 닮아있다. 기이하고도 화려했던 그 그림에서, 결국 결승점을 앞에 두고 저 깊은 나락으로 미끌어져 다시 기어 올라가야 했듯이 최은정의 화면은 화려한 이상세계와 혼돈의 가상세계가 뒤얽혀 우리를 저 깊은 나락에서 저 위의 황홀경까지 롤러코스터를 태우듯 흔들어놓는다.
수많은 헤테로피아들을 중첩시켜놓은 것으로도 모자랐을까. 최은정의 최근작들은 회화의 모든 장르를 다시 이종교배하는 탐험을 보이고 있다. 고흐의 붓질처럼 마띠에르가 강한 나무들에서, 솔 르윗의 기계적 드로잉을 보이는 구조물들, 그리고 추상표현주의의 대담한 붓질까지 모든 방식들을 토해내듯 화면에 채워 넣는 최근의 작업들에서 우리는 공간의 중첩 뿐 아니라 시간의 중첩까지 본다. 그런데 그 공간을 보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전지적인 시점에서 공간을 조망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화면 속에서 색색의 숲들과 물감들의 미끄러짐, 구조물들의 날카로움 속에 갇혀 이 바깥을 보고 있는가? 최은정의 공간 속에서 우리는 이미 신체가 없다. 이질적 공간 속 우리 자신의 존재도 이질적이 되고 만다. 캔버스 안에 갇힌 회화를 넘어서 직접 공간을 창출하고자 화면을 배치하고 캔버스를 이어붙이며 구조물들을 바깥에 설치하는 최은정의 작품들 사이를 걸어다닐 때, 우리는 비로소 망각했던 우리 몸의 존재를 되살린다. 작가가 마련해 놓은 현실과 가상,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이종교배적 무대에서 우리는 공간을 산책하는 산책자가 된다. "침투할 수 있지만 불투명하고, 열려 있으면서도 닫혀 있는, 이해 불가능한 몸", "실상 내 몸은 언제나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다른 곳들에 연결되어 있다." (푸코).
흥미롭게도 이 이해 불가능한 몸과 더듬거리는 눈으로 나는 최은정의 내부에서 꿈틀대듯 욕망하는 새로운 에너지의 분출을 본다. 절단된 캔버스와 구획하는 그리드(grid)를 넘나드는 물감은 언제고 터져나올 듯 팽팽하다. 지극히 구상적이고 계산적으로 보이는 화면에 미칠듯한 속도감을 선사한다. 구상과 추상, 풍경과 구조물, 현실과 가상을 팽팽하게 줄다리기 하는 최은정의 화면에 언젠가 그 균형이 폭발해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우리를 밀어 넣기를 기대해본다. 그 현기증 나는 이종(異種)의 세계를 꿈꾼다. ● "내가 있는 공간, 나는 바로 그것이니" (노엘 아르노, 초벌상태, 1950) 나는 최은정의 화면 앞에서 내가 있는 공간이 어디인지 모르겠다. 그 '알 수 없음'이 나이다. 안도 밖도, 현실도 상상도 아닌 모든 것이 가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로 그 곳. 우리는 그 다름들이 충돌하는 공간에 있다. 그리고 그 다름들이 바로 우리이다. 헤테로피아에서 길을 잃은 이종교합적 다름의 존재들이다. ■ 전혜정
그동안 나는 기계문명과 자연환경의 변화에 주목하여 애매하게 보이는 도시공간이나 기하학적 추상 위에 자연구성물의 개입 또는 재 조합시켜 왔다. 어떻게 보면 모순적이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풍경은 사실 불완전한 인간의 욕망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다른 차원에서 현실을 조망하고자 하는 것이다. ● 이번 작품들도 사실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지난 시간의 작업들이 단지 자연에 대한 환상적 욕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면 이번 작업들의 배경은 무너질 듯한 공간을 상징하는 건축물들과 과거에는 존재 했으나 지금은 폐허가 된 낡고 오래된 건축물들이다. 이러한 모티브를 얻게 된 것은 카프카의 소설 '성'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성은 환상적이고 기이한 의혹으로 가득 찬 공간으로서 허구적 성이다. 소설 속 작가는 허구적 요소들과 현실적 구성물을 혼합해서 자유롭게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자신이 만든 이야기 속에 편입시킨다. 결국 이야기는 미궁에 빠진 채로 남겨지게 되고 그토록 바라던 성엔 도달하지 못한 채 미지의 대상으로만 남는다.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불가해하며 이러한 세계의 이방인인 우리는 어쩌면 자신이 만든 성인 미로 속을 끊임없이 걷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문을 던지게 된다.
이번 전시 작품에선 소설 속에 등장한 특유의 형태로 파괴된 건물들과 불안정한 공간들이 주요 모티브로 사용되는데 이러한 요소들이 혼재된 화면에선 극적인 스케일의 사용과 어긋난 투시점, 그리고 원근감 등의 요소들에 변화를 더하여 화폭 안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시각체계를 탐구해 보고자 하였다. ● 전체적인 공간 연출은 그 동안 평면으로만 봐야 했던 회화를 구조적으로 설치하거나 조명등으로 작품의 배경이 된 폐허의 극장을 환상적이고 기이한 의혹으로 가득 찬 공간으로 연출하고자 하였다. 이 전시를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휘황찬란한 도시에서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는 다차원적 세계로 열린 틈새를 보여주고 싶다. ■ 최은정
Vol.20170914f | 최은정展 / CHOIEUNJEONG / 崔恩正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