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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0905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한옥 GALLERY HANOK 서울 종로구 북촌로11길 4(가회동 30-10번지) Tel. +82.(0)2.3679.3424 galleryhanok.blog.me www.facebook.com/galleryHANOK
김원경의 시적 회화가 갖는 의미 ● 김원경 선생은 준법이나 전통산수화가 갖는 웅혼한 의미와 뜻에 매우 정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2003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렸던 선생의 전시회를 보았다. 처음에는 분홍색으로 처리된 단색화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자세히 바라보았을 때 산수화가 펼쳐져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그리고 2011년 겨울에 처음으로 동양경전 『중용』을 공부하다가 '비이은(費而隱)'이라는 세 자에 감동하다가 김원경 선생의 그림을 떠올린 적이 있다.
물론 '비이은'이란 군자의 도를 칭찬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우주가 우리와 자연 모두를 낳고 기르고 성대하게 해주며 서로 화락하여 복되게 해주는 크나큰 은혜가 떠올랐다. 눈에 흔하게 보이는 천지산하 역시 그 깊이를 깨닫지 못하면 그저 산이고 물일 뿐이다. 우주가 우리를 낳고 기르는 마음을 가리켜 '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이라고 한다. 이를 간단히 '우주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우주심은 어디서 온 것인가? 우주는 어째서 천지자연과 만물을 운영하는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물음에 대한 우리 동양의 사유체계를 가리켜 '인학본체론(仁學本體論)'이라고 한다.
우주를 운영시키는 것을 '인(仁)'으로 보았으며, 이 '인'이라는 것은 반드시 본체를 갖는다는 사고방식이다. 우주의 그 위대한 덕과 자애로움은 광대하지만 또한 숨겨져 있어서 그 뜻을 알기 힘들다. 그 오묘한 뜻을 얻은 자라야 비로소 산수를 그렸다. 산수화는 철학하는 자세로부터 비롯되었다. 우주심을 깨닫고 감동하면서 그 천지생물지심의 생생함을 표현한 것이 산수화의 전통이다. 김원경 선생의 그림 속에 '비이은'과 '천지생물지심'이라는 가장 중요한 의미가 펼쳐져 있었다. 지금도 2003년과 2011년이라는 간극 속에서 발생했던 개인적으로 매우 기묘했던 감정을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다.
놀랍게도 우리가 만나는 2017년 김원경 선생의 작품은 산수화가 아니다. 기량이 완숙했고 아름다운 형식이 지극히 고양되어 균제를 이루는 추상화이다. 더욱이 김원경 선생은 제목이나 일말의 형상으로 무언가의 메시지로 전달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형상은 전무하며 제목도 단순한 넘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놀라운 새 작품 시리즈를 분석하기 위해서 현상학을 사용해보고자 한다. 세계와 우리가 만나는 순간 우리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세계는 무한히 변화하며 관계와 관계, 즉 수많은 메트릭스의 창출과 소멸이 거듭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해석하고자 한다.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내는 의미의 평원이 있다. 또 세계가 복잡다단하게 착종(錯綜)되면서 우리에게 던지는 내용들이 너무나 깊고 광대하다. 세계가 쏟아내는 이 생성하는 새로운 의미의 또 다른 평원이 있다. 따라서 두 가지 층위의 평원이 자웅을 겨룬다.
이 두 층위의 평원에서 수많은 의미가 발생하며, 그에 대한 해석이 오간다. 우리는 이 의미들을 언어로 가둔다. 언어라는 틀에 가두어 소유한다. 우리가 이 언어라는 틀에 어떠한 현상을 가두고 소유하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했다고 믿는다. 세계의 형상이 우리의 언어, 즉 이해의 틀 속에 가두어지면 우리는 매우 편안해한다. 마치 이불 속에 누워있을 때처럼 편안해한다. 그런데 어느덧 이불을 들춰버리면 매우 고통스러워한다. 이불이 들춰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디스-커버(dis-cover)이다. 우리말로 발견(發見)이라고 번역된다. 우리에게 처음 보는 현상이 주어지면 우리는 어떠한 언어의 틀로 현상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매우 불안하고 초조하며 고통스럽게 된다. 이는 마치 이불 속에 편히 누워있는데 이불을 들춰버린 것과 같다. 이 들춰진 순간을 모면해서 새로운 편안함을 얻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새로운 언어의 틀로 이 현상을 가두어야 한다. 이때 놀라운 창의력이 나오게 된다. 이 창의력이 발휘되어 현실화되는 순간을 가스통 바슐라르는 시적 시간이라고도 한다.
시적 시간은 시적 느낌으로 변환된다. 시적이라는 말보다 포에틱하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정확하다. 세계라는 평원과 자아의 의식과 언어라는 평원이 마주쳐서 높이 융기되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마치 산처럼 보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포에틱한 순간이며 느낌이다. 이때 생겨난 언어가 가장 진실하고 참된 시간이자 참된 느낌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이 참된 느낌은 점점 쇠락하게 된다. 포에틱한 순간의 느낌을 한 단어로 표현한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논리적 문장으로 풀어지게 된다. 최초의 포에틱한 순간이 논리적 설명으로 거듭되다가 의미과잉으로 진부해져 가는 인류의 발달사는 마치 점점 거품을 일으키다 달아서 사라져버리는 비누를 닮았다. 비누는 최초에 뜯어냈을 때가 가장 의미심장하다. 점점 사용되고 역할을 더 해갈수록 자신은 사라져버린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이자 운명이기도 하고, 열역학 2법칙이기도 하다.
김원경 선생은 최초에 만났던 언어초월적 감정을 분명히 느꼈다. 그 느낌을 언어로 전환해서 가두려고 하지 않고 예술 속에 남겼다. 이렇게 생성된 그림들은 매우 특별하고 깊은 울림을 준다. 하이데거가 반 고흐의 '농부의 신발'로부터 받았던 느낌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고흐의 그림 속에서 시적 순간을 느낀 것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경지에서 그간 쌓아왔던 모든 개념과 해석이 전소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것은 독일말로 니히테트(nichtet)라고 말한다. 즉 무화(無化)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특별한 순간과 조우하면서 기존에 있었던 모든 가치체계는 정지되고 무화된다. 마치 선불교에서 말하는 원만구족(圓滿具足)한 경지의 체득이 바로 그것이다. 유가에서 말하는 희노애락미발(喜怒哀樂未發)의 순간과도 같다. 김원경 선생의 새로운 연작 페인팅은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원만구족한 느낌과 시적 순간이 창발시키는 기개로 가득하다. 따라서 보는 사람도 그 순수무구한 무화의 느낌에 동참하게 된다.
지금 내가 김원경 선생의 시적 순간을 언어로 풀이하는 것조차 그윽한 향기를 갈아서 비누거품으로 만드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 느낌은 언어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다. 인간은 다만 페인팅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여전히 회화가 필요한 이유이다. 디지털이나 매체 예술은 모두 물에 섞여 풀린 비누 거품이다. 비누 자체, 그것은 김원경 선생 같은 페인팅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무화된 순간을 만나면 전혀 다른 의식으로 전환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영혼의 성장이라고 부르며, 우리가 하루하루를 더 살아도 되는 이유가 된다. 작가의 그림 속에서 진정으로 기쁨을 느껴본다. ■ 이진명
Vol.20170905j | 김원경展 / ??? / ???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