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빛 산수

김원경 채색展   2003_1105 ▶ 2003_1115

김원경_풍경_한지에 채색_98×78cm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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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미술관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번지 Tel. 02_720_5114

분홍빛 산수 ● 화면 가득 퍼져있는 형광의 분홍색 안으로 보일 듯 말 듯 단아한 산수가 얹혀있다. 김원경의 산수를 보려면 그림에 한발 더 앞으로 다가가 섬세한 주의력으로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의 산수는 그 섬세한 필치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산과 물 그리고 그 산과 물에 깃들어 사는 많은 생명들과 인간은 안개처럼 전체화폭을 덮고 있는 분홍의 색조 안에 몸을 숨기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서는 사람에게만 조금씩 내면의 모습을 드러낸다.

김원경_풍경_한지에 채색_98×78cm_2003

필법의 운용 면에서 보자면 김원경의 산수는 전통적 맥락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산세 따라 물결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준들은 김원경이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고전의 세계에 머무르는 법칙들이고 준거들이다. 그의 섬세하고 단아한 필선에 의해 표현되는 산수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산수양식을 탄생시켰던 시대의 이상적 본질을 재현하려는 사유 속에서 가치를 지니는 것들이다. 따라서 강하게 눈을 자극하는 형광색만 아니라면, 또 날아갈 듯 들떠있는 분홍의 색조를 검은 색조로 바꾸고 산수의 필선을 금니로 바꾼다면, 세상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무심한 세월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박물관 한쪽 구석에 조용히 걸려있을 법한 조선 초기 금니산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고전의 세계이다. 우리에게 자신의 역사적 전통성을 되새겨 주고 우리가 검은머리 노란 피부의 동양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며, 전통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된다는 문화적 해석학의 일부이다. 그러나 현재 나의 삶은 이러한 과거의 이상적 진실 추구만으로 해명되지 않는다. 우리의 정신이 여전히 역사적 전통의 맥락 위에 서있고, 우리의 육체가 과거 선인들이 살았던 이 땅위에 발붙이고 있다 하더러도 우리의 삶은 과거와는 완연히 다른 지표 위에 있다.

김원경_풍경_한지에 채색_58×74cm_2003

현재 나의 몸과 정신을 구성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서구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한 것들이다. 일상적인 용기들에서부터 사회적 제도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은 전통적 사유구조로부터 매우 벗어나 있으며 서구문화 그 중에서도 미국주도의 문화에 가깝게 다가서 있다. 미술이라는 형식의 틀 속에서 보더라도 근대적 의미의 '미술'은 이미 전통적 '그림'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의 '미술'은 엄밀히 말하면 용어 자체 역시 일본을 통해 번안된 서구적 체계에서의 미술이지 과거의 전통적 회화양식이나 조각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처럼 현재 우리의 미술은 서구적의 관점에서 우리 미술의 민족적 정체성을 규정해야하는 모순적인 것이다. '근대'의 속성은 타자와 구별되는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나'와 '우리'라는 민족의식, 그리고 민주의식을 바탕으로 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환기를 전제함과 동시에 또 이것을 서구의 잣대로 보아야 한다는 규칙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김원경_풍경_한지에 채색_75×98cm_2003

김원경은 자신의 작업에 대한 정체성 획득을 위해 분홍빛 산수를 통하여 민족적 정서를 유지한 채 근대적 미술의 테두리 안에서 해석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을 제시한다. 즉 전통적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어법과 규칙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 새로운 어법과 규칙은 경박성과 비 명료성으로 이것은 김원경이 형광의 분홍빛으로 나타내는 동시대적 가치이다. 서구적 근대 문명은 많은 점에서 삶의 편리를 제공하였지만 본질에 대한 이해의 결여라는 측면에서 부정적인 가치들을 유포시키고 가벼운 의미들을 확대 재생산한다. 그러한 가치들은 겸손하지 않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과대 포장하는 형광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명쾌한 언변과 과장된 표현 속에 본질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는 비 명료성으로 나타난다. 적어도 내가 보는 입장에서는 그렇다.

김원경_풍경_한지에 채색_98×78cm_2003

김원경의 키치(Kitsch)의 속성이 비치는 분홍빛의 경박성은 근대의 속성중의 하나인 대중성과 맞닿아 있다. 김원경이 보여주고자 하는 그의 진정한 의도는 전통적 산수의 표현에 있지 않다. 그가 비록 섬세한 필치와 준법으로 아름다운 산수를 그려내고 있다 할지라도 그의 뜻은 산수의 형상 밖에 있으며, 그의 산수는 근대 '미술'의 사유구조 안에서 이해되는 시각적 형상을 통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파악이다. 그렇다면 김원경은 왜 현대문명의 경솔함이나 비 명료함의 표현 수단으로 전통적 산수 기법을 택한 것일까? 하나는 전통 속에서만이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기초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그의 신념이자 경박성 안에 숨어있는 본질을 통찰하는 혜안을 전통에서 찾겠다는 그의 의지의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새롭게 해석된 전통을 통해 오늘의 삶을 투영하고자 하는 모습이다. 이것은 전통문화에 대한 그의 신뢰를 표시하는 것으로 그의 삶에 대한 진지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 우리는 김원경이 번안한 고전의 새로운 해석, 즉 가볍고 비 명료한 산수를 통하여 본질의 이해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는 반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 김백균

Vol.20031104c | 김원경 채색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