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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규 홈페이지_http://www.mingyusong.com
초대일시 / 2017_0824_목요일_05:00pm
본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시행중인 『신진미술인 전시지원 프로그램』의 선정 전시입니다.
주최,후원 / 서울시립미술관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스페이스 캔 Space CAN 서울 성북구 선잠로2길 14-4 (성북동 46-26번지) Tel. +82.(0)2.766.7660 www.can-foundation.org
컴퓨터 그래픽의 야금술적 리듬과 생명서판으로서의 매체감각, 송민규 작가 ● #1. "포스가 함께 하기를. May the Force be with you." ● #2. "비유기적 생명이라는 경탄할 만한 관념은 야금술의 발명품이자 직관이다. 어떠한 유기적 표현도 포함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생명으로 충만해 있다." (빌헬름 보링거)
재즈의 임프로비제이션 ● 송민규 작가와의 대화 속에서 즐거운 것은 영화 「스타워즈」를 둘러싼 오타쿠적 이야기이다. 프리퀄 시리즈까지 잔뜩 나와서 창궐하는 바람에 이 SF 시리즈는 기억 속에서 난맥을 이루지만, 송민규 작가는 정연하게 이 복잡한 크로놀로지를 질서 잡는다. 영웅신화적 내러티브에서 그리스 비극까지 이어지는 이 미국식 신화에는 기묘하게도 송민규 작가의 작업과 최근 변화를 이해하는 단초가 있다. 가령, 시작은 이런 것이다. 드로이드 군단이 거대한 우주선에서 대지로 착착 내려앉는 끝없는 장면이라든가 클론 군단이 드로이드 군단보다는 훨씬 더 무질서하지만 역시나 질서정연하게 군진을 이루는 장면이 파시즘적 숨막힘으로 표현되어 있다. 우리 같은 '파레노'(편집증자)들에게는 이 숨막히는 장면의 매력은 그야말로 숨막히는 주이상스이다. 지난해까지 송민규 작가와의 대화는 이 파시즘 미학의 우주적 스펙터클을 확인하는 선상이 많았다. 그러나 올해 그는 '스키조'(분열증자)로 변신해버렸다. 어찌된 일인가.
"반복이 지겨워졌어요, 이제는 그냥 노래하고 싶어요." 그는 아주 소박하면서도 강렬하게 자신의 충동이 째지한 리듬과 예측할 수 없는 마주침으로 점철되는 쪽으로 흘러가기를 염원하는 듯했다. '스키조'는 언제나 길없는 평평한 대지 위에 두 갈래 길을 만들고, 그 두 갈래 길을 모두 평행하게 가보는 사람이다. 송민규 작가는 마치 드로이드 군단과 클론 군단이 오버랩으로 같은 우주선에서 타투인 행성에 착착 하차하듯이, 또는 다른 시간대의 그 군단들이 시간적 혼선[out of joint]을 빚듯이 그냥 '중첩'되는 것이다. 그는 이 '중첩'을 자신의 수많은 판넬로 구성된 회화매체 위에 이미지를 담는 물체이자 회화적 이미지로, 이 두 측면 사이의 상호작용과 긴장감을 엮는다. '중첩'이란 본래 '파레노'에게는 원치 않았던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별들의 운행질서,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적 x축 y축 좌표계 그리고 착실하게 물리법칙을 지키는 뉴튼의 우주에서 이미지는 각각 섞이지 않고 반짝이는 별들의 신비로운 빛처럼 독자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반복이 지겨워졌어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자, 우리는 송민규 작가가 영화 「스타워즈」에서 플라톤적 미학 세계로부터 이탈하는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를 어떻게 반죽하고 어떻게 배치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이기 이전에 그의 실존에 일어난 변화를 먼저 물끄러미 들여다보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 월드는 어찌 보면 매우 현란한 이미지 범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작가의 말에 조금은 귀를 기울여야 알게 되는" 이미지의 비의가 충만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표현된 그노시스의 서판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노시스는 시각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보다 깊은 시선에서 구성되는 비의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송민규 작가의 고뇌와 충동은 이 그노시스의 초월 감각을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로 접근하고 실험하면서 그 음악적 공명과 고차원적 놀이가 어떻게 출현할 수 있는가 하는 지점에서 맺혀 있는 듯싶다. 우리는 이 작가가 시각매체를 통해 시각적 저 너머까지 섬광처럼 유도되는 비유기적 생명성의 징후를 함께 느껴보아야 한다. 그가 지향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숭고미학'이며, 시각예술적 조건을 새롭게 툭툭 건드리는 타입의 '숭고미학'이다. 조금은 놀 줄 아는 '숭고미학'이라고 할까.
중첩의 의미 ● 영화 「스타워즈」의 어느 시리즈에서 로봇 장군이 등장한다. "미래, 제다이가 없는 미래를 얻으려는 것이다! The future. A future where there are no Jedi!"(그리버스 장군) 이 장군은 "충성심도 신념도 없는, 프로그램만 있는 군대일 뿐이지. 그렇게 힘만 과시해서 대체 뭘 얻겠다는 건가?"라는 제다이 기사 오비완의 비아냥에 위의 대사를 읊는다. 이 격조와 품위를 가진 장군이 결투를 위해 망토를 벗었을 때, 나타나는 것은 4개의 팔이었다. 각각 4개의 광선검을 휘두르며 오비완을 위협하는데, 놀라운 것은 1개의 광선검을 가진 오비완이 차례차례 그 팔들을 잘라나가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리버스 장군이 모차르트라면, 오비완은 슈톡하우젠이다. ● 그리버스 장군이 휘두르는 광선검(들)의 궤적은 고전음악의 라이트모티브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송민규 작가가 말하는 '반복'의 전형적 곡선, 예측가능한 곡선에 해당할 것이다. 송민규 작가의 작업 속에서 이 광선검(들)의 궤적은 1) 괘[掛] 2) 궤[軌] 라는 두 개의 한자와 관련지어지는 듯싶다. 이 작가는 '괘도'라는 것과 '궤도'라는 것을 의식하는 그래픽 이미지의 점, 선, 면, 유체에 방점을 찍는다. 거기에는 우주의 가장 순수한 생명 에너지인 '포스'[force]가 있을까. 본래 「스타워즈」의 기원에서 유래되는 '포스'는 동아시아의 기[氣]라고 할 수 있다. 이 기[氣]를 로봇은 쇤베르크 이전의 규칙적인 하모니 타입으로 광선검의 그래픽 이미지를 무수히 그려대는가 하면, 제다이의 기사는 그 이후의 무조성적인 음들의 나열처럼 '이탈한 궤도'로서 광선검의 그래픽 이미지를 뿌려댄다고 볼 수 있다. 송민규 작가는 자신의 작품 「어둠의 속도」에서 이 광선검(들)이 두 개의 타입으로 '중첩'되는 시지각적이며 음향적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계주의적 명랑성과 생동감이 있는가 하면, 주관성의 무한 가능성을 꿈꾸는 일탈이 번뜩이는 우발성과 경이로움도 있다. 무리수적인 분할로서의 반점들과 곡선들 그리고 아나모픽한 형상들. 이제 나는 이 광선검(들)이 결투하는 밤하늘의 격전장, 시인 블레이크가 느닷없이 읊었던 선과 악의 부딪히는 공중장소를 연상하지 않고는 송민규 작가의 작품에 깃든 '포스' 즉 기(氣)를 그 생명성의 징후 그대로 느껴보기는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 그런데 '중첩'되고 있는 이미지의 정체는 정확히 무엇인가. 송민규 작가는 이 이미지들의 구체적 출처를 환히 밝히는 것, 하이데거적 밝힘을 거부하기도 하고 동시에 약간은 힌트를 던져주기도 한다. 아무래도 이 보여짐과 보여지지 않음이라는 이중적 작동에는 필시 컴퓨터 그래픽이 테크놀로지 기반으로부터 시각예술의 장으로 전격적 유출을 감행할 때, 반드시 필요한 그 무엇이 있으리라. 가령, 밝히지 않는 방식으로 밝히거나 이미 밝히기도 했으나 웬지 모든 것이 밝혀진 것은 아닌 것. 밝힌다는 것이 곧 숨긴다는 의미도 되는 것. 이런 작동에서 아이러니는 고유한 속성이며, 송민규 작가가 자신이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마치 '이동 대장장이 Nomadic Blacksmith'의 일로 여기듯 그 작업은 '중첩'을 통해서 금속성의 쨍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3. "운석과 천연 금속의 변화, 원광석과 금속의 함유량의 변화, 합금들의 변화, 금속에 가해지는 공정들의 변화, 특정한 조작을 가능하게 해주는 성질 또는 특정한 조작의 결과로서 발생하는 성질들의 변화."(앙리 리메의 서신 중에서) ● 송민규 작가는 금속으로 작업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자신의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를 깡깡 담금질하고 불림한다. 이러한 야장의 테크놀로지는 금속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에 광물적인 원소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다는 논리에서 가능하다. 특히 그의 이미지즘은 물질과 이미지 전체를 이끌고 합금시키는 야금술적 울림으로 발생한다. 그가 '중첩'시키기 이전에 그 이미지들은 "어둠의 속도"이라는 장소이자 영토 개념으로 표현된 작품 속에서 1) 어둠 속을 뚫고 지나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2) 밤하늘을 나는 흰 새의 비행 3) 리아스식 해안이 가진 들쑥날쑥하고 무한한 프랙털 무늬 4) 생명수의 난데 없는 상징처럼 유체 운동중인 정액[sperm] 5) 상승하는 바람의 난류 6) 동굴 속의 벽화에서 발견되는 기하학적 문양 7) 시공간이 아인슈타인의 교리문답을 따라 확 꼬부라지고 휜 왜상 8)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없는 구름 9) 끊어진 시간을 포함한 영화 필름 10) 식물들의 이미지 등등 각양각색의 자연물을 연상할 수 있다. 송민규 작가는 자신의 작업 과정에서 마치 거푸집을 깨듯이 이 자연물이라는 출처를 끊고 독자적이며 고유한 이미지로 변조하고 배치한다. 여기서 변조란 연속적인 이미지를 위해서 거푸집을 깨는 것이다. 배치는 이미지(들)의 물질적 흐름을 그 내재적 힘의 법칙으로 다스리는 작업이다. 얼핏 연상되는 구체성의 세계라면, 송민규 작가가 '시스템'이라는, 마치 '죽음의 위성' 같은 악의 결집체가 표방하는 이미지가 되겠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계열과 트랙의 이미지들이 딱히 구체적인 기호로 읽히기보다 추상적 기호이자 생명적 기호로 읽히기를 원하는 듯싶다. 보다는 우리 내부의 신경 시스템에서 '시냅스'라는 빈 지역에서 일어나는 섬광의 무늬가 거대한 공간에 외화되는 듯한 상응성[correspondence]의 느낌도 강하다. 무엇이든 이 구체성을 벗고 추상적 고도를 찾아서 자기의 차원을 찾아가는 매체라고 할까. 그런 시각매체로서 이 매트릭스 판넬은 그 에너지적 조건과 위상학적 조건을 버무리는 작업을 통해 비유기적인 생명 리듬을 발생시킨다. 나는 이를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과 기계가 함께 연합한 '생명의 서판'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제안한다.
참여예술로서 오픈소스 ● 송민규 작가의 말에 따르면, 1977년 「스타워즈」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가 나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 시리즈의 오타쿠들은 조지 루카스와 모종의 소통과 그 소통으로 인한 시행착오적 개방과 조정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스타워즈」 최고의 '모에' 요소로 지목되는 광선검은 백미에 해당한다. 이 광선검은 제다이의 기사와 마치 모체처럼 '태어난 비유기적 생명체' 역할을 하며, 그런 스토리가 강화되면서 마침내 제다이로 입문한 어린 기사는 수련과 편력의 여행 중에 동굴 속으로 들어가 기기묘묘한 과정을 거쳐 광선검을 합성해내게 된다고 한다. 말하자면, 샤먼이자 대장장이로서 제다이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는 것. 이 서브텍스트는 놀랍게도 팬들이 창작해낸 것이었고, 조지 루카스는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 송민규 작가가 '중첩'이라는 현상을 빚어내는 기술적 기반 역시 아까 말한 것처럼 '이동 대장장이'의 위상에서 존립 가능하다. 그가 사용하는 그래픽 이미지는 '비트맵 bitmap'이 아니라 '벡터 vector'이다. 이 '벡터'는 '비트맵'과 달리 이미지의 확대나 축소시에 윤곽의 왜곡과 굴절 현상이 없다. 이미지 요소 하나하나는 수학의 방정식으로 이루어져 독자적이며, 그 방정식들의 켜켜이 쌓인 산물이 '벡터' 스타일 이미지이다.
달리 보면, 안토니오니의 영화 「욕망 Blow-up」이 보여주듯이 이미지의 주변부가 연속적인 벽돌 무늬로 불연속화되는 '비트맵'은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의 한계를 알려주는 그래픽이다. 즉 '비트맵'은 라이프니츠의 적분이 가동되는 유한한 가장자리를 포함하고 있다. 반면, '벡터'는 이미지 개별마다 수학의 방정식이 개입하여 무한한 가장자리를 내포하고 있다. 송민규 작가가 이 '비트맵'과 '벡터'의 차이를 예민하게 의식하면서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이미지의 물체이자 회화적 이미지로 이해하는 것은 음미해볼 만하다. 그는 마치 다마스커스의 검처럼 저절로 검이 울려서 기하학적 문양들의 생명적 징후가 나타나는 것과 비근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미지즘을 다룬다. 야금술의 주름공학이 엄청나다고 해도 일본도의 경우와 다르다. 일본도가 물리적 간극의 이미지라면, 다마스커스의 검은 정신적 밀도의 이미지이다. 이렇듯 송민규 작가는 그래픽 이미지를 마치 금속적인 역량과 그 역량에 따르는 흐름으로 다룬다. 마치 백남준이 초기 텔레비전 내부의 회로에 불을 피우듯이 변조한 것처럼. 주사선들의 교직을 불과 같은 플라즈마의 너울너울거리는 타입으로 연출한 것처럼. 다시 말해서 여기서 변조라는 것은 이미지가 연속적으로 변주되도록, 아니 반복적인 곡선 순환에서 벗어나도록 거푸집을 바꾸는 것이다. 가령, 텔레비전을 풀무의 불로 바꾸고, 컴퓨터 그래픽을 대장간으로 바꾸는 것이다. 송민규 작가는 이 바꾸는 행위를 가리켜서 "반복을 그만두고 노래 하고 싶었다" 라고 원초적 욕망의 언어로 표현한다. 그는 자신이 다뤄온 이 평평한 판 위의 시각매체가 스스로 그 자체를 창조적으로 배반하도록 즉흥적인 충동의 법칙을 따르고자 한다고 술회한다. 그는 재즈의 임프로비제이션을 손의 무의식이 가는 대로 맡기고, 그동안 '파레노'로서 이미지의 피타고라스적 정수 질서를 지켰던 것에 크게 회의를 표한다. 그는 '스키조'로서 그래픽 이미지들의 자유롭고 비예측적인 중첩에서 음악적 힌트와 돌파구를 찾는다.
「어둠의 속도」이란 제목의 최근 작품은 송민규 작가의 고뇌와 열정이 응결된 결정체이다. 가로 12개 x 세로 3개의 매트릭스로 구성된 이 작품은 "직선이 원을 살해하듯" (시인 이상) 주어진 반복과 완성의 궤적을 끊어내고 다소는 "컴퓨터가 아니라 사하라 사막을 두뇌 속에 집어넣어라"(들뢰즈) 라는 태생적 자기모순과 자기극복을 저지르고 있다고 보여진다. 컴퓨터라는 '태생적 디지털'이 불이라는 플라즈마 상태의 은택을 입어 금속의 기하학적 무늬를 잉태하고 출산시키듯이 말이다. '이동 대장장이'는 일렁이는 불 앞에서 '스키조'이며, 소프트웨어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기 몸에 흡수되는 불길의 에너지로 인해 스스로 금속이 되는 타입이다. 송민규 작가의 실존을 이야기하면서 이 글을 이어온 이유이기도 하며, 유목적 야금술로서 '숭고미학'을 치열하게 지향하는 작가에게 보내는 경의의 표현이기도 하다. 혁명적인 것은 금속성의 쨍한 울림 속에서 들려오는 그 무엇인가이다. 작가의 계속되는 근본적 태도 변화 그 자체이며, 급기야 그의 '스키조'적인 즉흥이 가져다주는 경험의 예술이자 "개념적 두뇌 예술"(백남준) 자체이다. ● #4. "어떻게 단풍나무가 방안에 자랄 수 있는가? / 구름과 안개에서 강과 산이 솟아 나온다." (류탄) ■ 김남수
Vol.20170824c | 송민규展 / SONGMINGYU / 宋旼奎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