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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예송미술관 서울 송파구 백제고분로 242(삼전동 62-2번지) 송파구민회관 1층 Tel. +82.(0)2.2147.2810 www.songpa.go.kr
고요한 마음으로 자기성찰을 하기위해 그리고 다시 나와 응시하는 내 작업은 이제 '반복적 수행'으로 지난 전시인 '친밀한 투영'에 이어 전시하려고 한다. 나에게 친밀하다는 것은 빈번하고 좋아한다는 의미이다. 함께 하는 작업을 모아보기도 하고 항아리에 투영된 일상이 각각 빛과 함께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기를 시도하게 한다. 이렇게 빈번하게 투영함으로써 내 삶과 나 자신을 다시 들여다 보고 명상함으로써 친밀하게 투영하고자 함이고, 이러한 반복이 작가로서 궁금해 하고 찾아나가고자 하는 세상을 어렴풋이 알게 하는 반복적 수행이 된다는 것을 깨달게 되었다. 상상력을 동원하여 열린 세상을 보고자 함이고 거꾸로 비친 상은 직관과 상상으로 더욱 단순하게 사물의 움직임을 순간 포착할 수 있는 생각하는 방법의 한 예가 될 것이다. 어디엔가 비추어진 상은 또렷하지 않고 어름어름 무엇인지 궁금하고 상상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위의 방법이 동양의 수묵화처럼 본질과 본체를 찾아나가는 정통한 방법이라 확신하고, 비추어진 상을 그리면서 동양인의 수양과 명상하는 자세를 이어나가고자 한다. ■ 예송미술관
채움, 담금, 비움 ● (전략)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나 사물에 대해서 생각하고 판단한다. 그러한 생각은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므로 별 영향 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으로 굳어지게 되고 그로 인해 또 하나의 세상이 펼쳐지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사물과 삼라만상의 진리와 전혀 상관없는 세상으로 펼쳐질 수 있으며, 각자 다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만의 세상에서 내가 보는 것이 진실이라 생각하고 한 생을 살아가게 된다. 다른 각도에서 보고 다르게 생각하기를 시도해본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놓치고 있는 많은 것들을 보고 사유하고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하기를 시작하는 매개체가 항아리이다. ● 시각소여에 따른 큰 질감덩어리가 항아리이며 항아리를 통해 사유에 의해 가공되지 않은 생각을 담아내고자 한다. 커다란 우주 안에서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가 존재한 다음에 어디로 갈지? 무엇을 찾아갈 지 고민하는 것처럼 나의 작품에서도 큰 질감 덩어리가 우선 보여지고 그 안에 담아내고 채우고 비우면서 비춰진 그 모습을 다시 보고 사유하게 함으로써 나의 예술세계는 인생의 근본적 질문과 나란히 가게 된다. 내가 그린 항아리는 거울과 같고 잔잔한 물과 같다. 장자는 심재(心齋) 이후의 마음의 작용을 거울에 비유하기도하고 때로는 물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흐르는 물을 거울삼지 않고 잔잔하게 가라앉은 물을 거울삼는다. 잔잔하게 가라앉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가라앉은 것을 잔잔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항아리에 비친 일상은 부산스럽고 요란한 실제와는 다르게 고요하다.
항아리에 비친 일상의 고요함은 일부러 조용하게 만든 것이 아니다. 비쳐지는 일상에 어지럽혀지지 않으므로 저절로 고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속해 있는 일상에 마음이 어지럽혀져 있으면 고요하기 힘들고 그 참모습을 보기 힘들다. 그러나 사물을 보내지도 맞아들이지도 않고 지인의 마음의 작용과 같은 항아리에 비쳐진 일상은 고요하다. 나는 항아리에 비추어진 고요한 나의 일상에 적당한 거리를 확보하고 물끄러미 쳐다봄으로써 내가 궁금해하는 제3의 우주는 어느 끝까지 열려 있을까 상상하게 된다. 나의 생각하는 방식으로 굳건히 세워진 그림 속의 세계를 내가 한 발 떨어져서 무념, 무상의 상태로 곧게 바라볼 수 있다면 아름다움과 담백한 감각 속에 조용한 휴식이 되며 눈과 마음으로 지나온 체험과 소소한 일상이 될 수 있다. ● 이 항아리는 떨어져 생각하기를 시도하는 매개체이고 조형적인 재미를 추구하게 하는 한 도구이지 내 그림의 목적은 아니다. 현재 작품을 시작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으로써 나의 이야기를 담아낼 큰 세상과 공간이 필요했으며 꽃과 항아리를 그리던 전작의 발전 과정일 뿐이다. 내 이야기와 공간을 담아낼 항아리는 점점 하나의 큰 공간으로 진화해 나갈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를 움직이는 근원적 에너지를 궁금해 한다. 그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내게는 그림이 된다. ● ... 장자가 추구하는 바의 것, 즉 모든 위대한 예술가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자기가 편안히 나아갈 세계를 완전하게 하여 자기의 인생이나 정신상의 부담으로 하여금 해방을 얻게 하는 것이다. (2012 정효진 작가 개인전 서문중에서 발췌) ■
채움과 비움, 순간과 영원의 교차점에서 ● 예술가는 자신의 실존에 대한 고민,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세계 속 존재들의 의미를 작품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행위는 세상의 크고 작은 이치와 질서, 진리를 깨우치고 담아내는 철학적인 시도로 이어지고 예술 작품은 물질과 정신, 현실과 이상, 실재와 허구가 공존하는 오묘한 시공간을 창조한다. 미술-회화- 역시 그러하다. 그것은 언어로는 미처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시각화한다. 가끔은 더 깊고 더 넓은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생략하고 덜어내는 방식이 사용되기도 한다. 작가는 '채움'과 '비움'이라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제한된 화폭에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에 작가는 시(詩)와 같은 은유와 함축, 그리고 암시를 통해 보이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 "담금, 채움 비움의 과정은 비단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우리 인생에서도 행복하고 평온하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작가 노트) ● 정효진은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작가이다. 그녀는 자기 자신과 일상을 관찰하고 의미를 찾아 삶의 가치를 고양시키기 위해 작업한다. 작가는 스스로를 바쁘게 움직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개인으로 인지한다. 그리고 자신이 만연한 경쟁과 심리적 불안에 노출되어 있음을 걱정한다. 작가에게 이 세상은 혼란스럽다. 지나치게 빠르다. 오늘날 정적이고 고요한 삶은 불가능하다. 객관적, 중립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수록 작가는 자신의 건강한 내면을 지키고 평정심을 유지하게 위해 작업에 몰두한다. 자신의 일상을 화폭에 담아내고 덜어내며 채우고 비워내기를 반복한다. 자신의 외적 삶과 내적 삶을 진중하게 성찰할 시간을 갖기 위함이다. 「담금, 채움, 비움」 연작과 「채움, 비움」 연작에는 현실 속에 함몰되어 자신을 돌아보지 못했던 작가가 스스로를 바라보고 자신을 되찾아가는 전(全) 과정이 담겨있다. 모든 연작의 제목 마지막에 위치한 '비움'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없어짐', '덜어냄'이라는 의미를 갖기에 올바른 성찰을 위해 화폭을 가득 채웠던 욕심을 덜어내고 많은 것을 담아내고픈 욕망을 절제해나가는 정효진의 작업 목표와 과정을 대표한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비워냄을 담아내는 그녀의 작품들에는 빈 공간이 그다지 많지 않다. 여백을 기대하게 만드는 제목과 달리 그녀의 작품에는 먹(墨)으로 그려진 형상들-항아리, 그릇, 사람들, 실내 풍경-이 가득하다. 그것은 마치 채움으로 완성되는 서양화 같기도 하다. 그러나 정효진은 자신의 작품에 분명 '비어 있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항아리-그릇-가 암시하는 공간이다. 정효진의 모든 작품에는 다양한 모습의 항아리들이 등장한다. 항아리는 무엇인가를 담기 위한 물건이다. 우리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항아리는 내부에 빈 공간을 갖는다. 동양화의 여백 안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숨겨져 있듯이 그녀의 항아리 안에는 '비움'이 숨겨져 있다. ● 세상의 모습을 비춰내는 항아리의 표면 역시 비어있는 공간이다. 아무 문양도 없는 항아리의 표면은 세상의 모든 모습을 반영할 수 있는 거울이다. 빛을 반사하는 물(水)이자 여백이다. 항아리는 안팎으로 모두 비워져 있기에 만물을 담아낼 수 있다. 언제든 채워질 수도, 비워질 수도 있다. 언제든 다른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다. 정효진에게 항아리는 유와 무를 모두 포함하는, 채움과 비움의 반복적 행위를 은유하는 상징이다. 항아리가 암시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공간은 신비로운 무한이다. '비움'은 드러나지 않는 세계며 감추어진 세계이다. 감추어져 있기에 더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한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담아낸다. 그것은 시각화할 수 없는 무엇까지도 담아내는 미지의 세계이다. 존재하기 위해 비워둔 자리이자 열린 공간이다. ● "나는 항아리에 비추어진 고요한 나의 일상에 적당한 거리를 확보하고 물끄러미 쳐다봄으로써 내가 궁금해 하는 제 3의 우주는 어느 끝까지 열려 있을까 상상하게 된다." (작가 노트)
궁극적으로 정효진에게 검정색 항아리는 채워진 세계, 그러나 곧 비워질 세계, 그리고 다시 채워질 세계 모두를 상징한다. 그것은 채움과 비움이 반복되는 작가의 작업 과정뿐만 아니라 채움과 비움이 순환되는 삶과 세계의 질서 모두를 담아낸다. 그녀의 항아리는 채움과 비움, 유(有)와 무(無)가 단순히 반대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있음과 없음,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는 서로 이어져 있다. 서로는 서로의 영역으로 침윤된다. 결국 정효진의 비움은 무엇이든 다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재된, '있음'을 담아내기 위한 '없음'을 창조한다. ● 작가가 먹을 주된 표현 매체로 선택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먹은 만물의 본질을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것은 모든 색을 의미하는 오채(五彩)이며 자연의 모든 색을 담아내는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색이다. 그것은 가득 찬 색이다. 그러나 먹은 동시에 아무 것도 없는 공색(空色)이기도 하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소멸과 사라짐을 담아낸다. 따라서 그것은 항아리가 그렇듯 생성과 소멸, 존재함과 사라짐을 암시하는 동시에 채움과 비움이 공존하는 재료이다. 채색의 과정에서 작가는 전통적인 채색화의 방식을 고수하지 않는다. 발색을 위한 밑작업이 생략되거나 여러 차례 색을 쌓아 올리는 방식이 변형되기도 한다. 항아리의 경우, 한 번의 커다란 붓질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더 많은 일상을 담아내기 위한 넓은 공간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이다. ● 「내 안의 일상」 연작에 들어서면서 '떨어져 생각하기를 시도하는 매개체'인 항아리와 그릇에는 더 많은 일상의 모습들이 반영되기 시작한다. 일상의 풍경이 쌓여갈수록 먹빛에 숨겨져 있던 오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최근에는 빨간색, 초록색, 보라색 등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강렬한 색채가 가득함에도 항아리 속 세상은 여전히 평온하다. 항아리에는 작가의 일상과 주변 모습이 덤덤히 비춰진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건물들, 사물들은 모두 항아리에 반사된 이미지로 존재하기에 작가는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최대한 벗어나 스스로를 관조하게 된다. 관조의 태도는 세상을 어지럽히지 않는다. 세상은 잔잔하게 가라앉은 물처럼 맑아지고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의 참모습도 드러난다. 일상과 존재의 참모습이 담길수록 형상은 담백해지고 본질만 남게 된다. ● 정효진은 자신의 존재를 더욱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 작업이 진행될수록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자신에 대해, 삶에 대해 더 깊이 숙고한다. 작가는 항아리에 비친 이미지들을 통해 자신의 실존을 확인한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 속 존재들을 확인한다. 항아리는 작가가 자신의 삶에 함몰되지 않게 도와주기에 작가는 불안을 가라앉히고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균형의 상태를 이끌어낸다. 평정심을 지켜낸다. 정효진에게 작업은 내면적 수련 과정과도 같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면서 현실 속에서 분출되는 충동과 불만을 평안함과 안정됨으로 바꾼다. 불안의 시간은 명상의 시간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작가의 평정심이 반영된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 항아리에 비친 세계의 이미지들이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일상의 순간이 반영된 이미지임에도 영원처럼 느껴진다. 우리 모두 다 잘 알고 있듯이 현실 속의 시간은 흐른다.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너무 빨리 흘러간다. 허무하게 사라진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 인생은 날아가듯이 아주 빨리 흐른다.(Hans Meyerhoff, Time in Literature, Berk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8, p. 16.)" 흐르는 시간 위에 놓인 언젠가는 사라질 인간, 그것은 필연이다. 작가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작업에서 흐르는 시간을 붙잡는다. 그리고 일상의 한 순간에 영원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작가의 특권이다. ●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잠시 정지시키고 나의 상황을 객관화하여 한 번 더 생각하고 사유하기를 시도한다." (작가 노트) 정효진의 회화는 결국 영원과 순간의 접점을 제공한다. 그것은 『네 개의 사중주 Four Quartets』(1936)에서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이 언급했던, 시간과 무시간의 교차점인 정점(Still Point)과 같다. 순간의 시간에서 영원의 시간을 느끼게 되는 과정은 정효진에게 실존을 확인하는 과정이며 기쁨의 경험이다. 그리고 그 기쁨 속에서 작가는 다시 한 번 자신을 바라보고 사유한다. '시간은 자아(self)의 개념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에' 자신의 실존을 담아내는 작가에게 시간을 붙잡는 행위는 매우 중요하다. 정효진은 현실의 시간-삶-이 계속 흐르며 그것을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 작가를 포함한 인간들을 더욱 바쁘게 만들고, 자신을 돌아볼 수 없게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자신의 진정한 실재를 사유하기 위해 흐르는 시간을 한 순간 정지시켜 주목한다. 속도와 변화에 집착하는 시대적 조류와 달리 작가는 순간을 영원과 결합시킴으로써 시간을 초월한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지만 그녀는 영원을 꿈꾼다. 현실 이상의 것을 꿈꾸고 음미한다. 삶에 대한 진정한 직관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시공의 경계와 구별을 뛰어넘고 그녀의 작업에는 객관적 척도를 따르지 않는 정지된 시간, 영원성이 존재한다. ● 정효진의 예술적 행위가 실존에 대한 그녀의 고민을 완전히 해소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예술적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마음을 평온한 상태로 다스리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자연스럽게 삶과 세계에 대한 고민을 조금씩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언젠가 삶의 진실이 그녀에게 조금씩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 때까지 작가는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하고, 영원한 순간을 음미할 것이다. (끝.) ■ 이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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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70704c | 정효진展 / JUNGHYOJIN / 鄭孝珍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