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0821g | 김건주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7_0609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예술공간 수애뇨339 SUEÑO 339 서울 종로구 평창길 339 Tel. +82.(0)2.379.2970 sueno339.com
카오스모스의 조각학 ● 김건주의 근작들 김건주의 조각은 양방향의 욕망을 내포한다. 하나는 "형(form)의 구축"을 향한 욕망이다. 그의 조각은 먼저 혼돈(chaos)을 질서(cosmos)로 이끄는 방향을 취한다. 즉 비가시적인 것, 규정하기 어려운 애매한 것들에 가시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러한 욕망은 필연적으로 닫힌 형태(closed form)를 취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작가는 그 닫힌 형태가 "규정할 수 없는 것을 규정해버리는" 우격다짐의 폭력이 될 것을 근심한다. 따라서 그는 그 닫힌 형태를 열린 형태(open form)로 풀어헤칠 가능성을 살핀다. 이렇게 열린 형태를 갖게 됨으로써 조각은 가능성들로 충만한 상태를 가리킬 수 있다. 여기에는 "형의 해체"에 대한 욕망이 자리할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 작품은 다시금 혼란의 상태로 회귀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작가가 염려하는 바다. 김건주의 조각을 추동하는 두 가지 욕망, 곧 '형의 구축'과 '형의 해체', '질서(닫힌 형태)에의 열망'과 '혼돈(열린 형태)'에의 열망'은 기본적으로 서로를 배척한다. 닫힘과 열림, 양자가 공존하는 상태를 생각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설령 공존한다고 해도 한쪽으로 힘이 쏠려 균형이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대부분의 예술작품들은 양자 가운데 어느 한 쪽의 승리를 공표하는 입장을 취하기 마련이다. 가령 바타유(Georges Bataille)가 에로티즘을 설명하면서 내세운 "파괴하기 위해 구축한다"는 식의 논리가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닫힘과 열림, 양자의 팽팽한 긴장관계를 존재 이유로 삼는 작업들이 존재한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가 '카오스모스(Chaosmos)의 시학'으로 지칭한 경향성을 갖는 작업들이다. 나는 김건주의 조각이 이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온갖 관점들을 내 안에 끌어들여 조율하거나 균형을 잡는 일"이야말로 이 작가의 주된 관심사다. 이를테면 사물(+)/그림자(-)의 의미론적 위상을 형태론적 수준에서 역전시켜 그림자에 포지티브(+)의 형태를 사물에 네거티브(-)한 형태를 부여한 후 양자의 역학을 조율하는 식이다. 또는 비정형(inform)의 '구름'에 닫힌 형태를 부여하되 그것이 또한 구름의 유연성을 간직하도록 하는 도전적인 시도를 떠올려볼 수 있다.
그런데 열림과 닫힘은 어떻게 조각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을까? 즉 형을 구축하면서 형을 풀어헤치는 일, 또는 형을 풀어헤치면서 동시에 형을 구축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러한 작업을 최적화 할 수 있는 재료를 탐색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작가의 요구일 것이다. 닫힌 형태를 지니지만 부드럽고 말랑말랑해서 언제든 변형이 가능한 재료 말이다. 돌이나 철은 너무 단단하고 무거워서 이런 작업에 적합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깃털이나 물방울, 라텍스 같은 것들은 너무 가볍고 유연해서 닫힌 형태를 구현할 수가 없다. 이러한 자문자답 과정에서 이 작가가 주목한 재료가 바로 스펀지다. 스펀지는 닫힌 형태를 갖지만 언제든 절단하고 접고 끼우고 구기는 일이 가능하다. 그 과정에서 얻은 잠정적인 형태를 핀으로 고정하는 일도 가능하다. 즉 유동적인 형태를 고정시킬 수 있다. 그렇게 얻은 형태를 이 작가는 "움직일 수 없는 유연함"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렇게 스펀지를 접고 구기는 과정에서 얻은 형상은 또한 매우 선적(linear)이다. 과거에 고유섭이 주장한대로 운동태, 또는 경향태를 근본으로 하는 예술은 선(line)을 일획(一劃)하는데서 시작하지만, 완성태 내지 존재태를 표현하는 예술은 대상을 '한 덩어리'로 보고 '한 덩어리'를 표현하려는 데서 시작한다. 그는 이렇게 덩어리를 표현하는 예술에서 우리는 "형성 중의 형"을 볼 수 없고 오로지 "형성이 완성된 형"을 볼 수 있을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선은 면(面), 또는 덩어리(塊)와 달리 방향성을 갖기에 "형성을 표시하는 동시에 형성 중의 것을 표시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것을 고유섭은 "선의 운동태"라고 불렀다. 다시 김건주에게로 돌아오면 그가 스펀지를 접고 끼우고 구기는 과정에서 '선의 운동태'에 주목하게 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라 할만하다. '선의 운동태'를 아우르는 조각을 상정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사실 이 조각가가 선(線)의 방향성에 주목한 것은 스펀지를 발견하기 훨씬 전의 일인데 이를테면 『익명의 숲』을 표제로 내세운 2001년 성곡미술관 전시에서 그는 숲에서의 이동경로와 산 능선의 궤적을 '선적으로' 재구성한 설치작업-『멈춤-재현․실재』을 선보인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스펀지를 자기 조각의 재료로 택한 것은 어쩌면 그것이 '선'의 특성, 또는 뉘앙스를 간직하고 있어서 일 수 있다.
김건주의 조각 작업에 개입된 '선'은 조각의 주된 요소로 적극 용인됐다. 그것은 때때로 독자적인 '형태'로서의 의의를 갖는 것으로 부상하기도 했고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요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 작가의 작업노트에는 "연장선이 흐려지는 드로잉"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그의 조각 작업에서 선을 그리거나 긋는 일이 갖는 의미를 함축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김건주의 조각이 운동태(경향태)로서 선의 열린 동세를 다시금 덩어리(mass)의 닫힌 형태로 되돌리는 방식이다. 가령 이 작가는 특정 틀에 스펀지를 끼워 넣거나 구겨 넣는 식으로 조각의 덩어리를 가시화한다. 이러한 양방향의 균형은 의미와 형식(또는 물성)의 관계에서도 관찰 가능하다. 즉 이름을 갖는 스펀지의 형상들(때때로 스펀지는 동물의 형상, 또는 문자(단어)들의 형태로 절단된다)은 하나의 틀 속에서 구겨지고 뭉쳐져서 그 이름이 가리키는 형태를 상실하고 덩어리를 이루는 요소들로 환원되기도 한다. 그러나 물론 잘 살펴보면 거기에는 여전히 동물의 형상이나 단어들이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건주의 조각은 아주 지독할 정도로 철저하게 양방향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구축됨과 아울러 해체된다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 나는 카오스모스의 시학을 말했는데 그의 작업이 철저하게 조각적으로 그 시학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그것을 "카오스모스의 조각학"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 홍지석
간극은 찰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의 작업에서 간극은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기초이며, 열림과 닫힘의 순간들을 포착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변화의 순간들이 또 다른 새로움을 드러낼 수 있는 여백이라고 생각해서 일 것이다. 그 간극과 여백이 내가 작업에서 찾고자 하는 무대이자 유연함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다. 그간 선보여왔던 일련의 "Moving" 연작들은 유연성이나 유동성을 기반으로 하여 간극을 찾아내고 변화를 투영하는 작업들이었다. 언어와 관념의 간극, 현실과 환상의 균열, 물질과 비물질의 틈, 살아있음과 죽음의 경계 등을 포함한 경계를 드러내고자 한 연구의 결과물인 것이다. 나는 지속적으로 그 유연한 간극의 연장선에서 낯선 새로움을 찾고자 한다. 나의 작업은 소프트한 스펀지를 절단하고, 접고, 끼우고, 구기는 변화의 과정을 지나 어느 순간 하나씩 핀이 박혀 잠시 멈추어진 상태로 놓이게 된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유연함은, 연장선이 흐려지는 드로잉 같은 느낌과 함께 잠시 멈추어진 형태로 또 다른 공간 안에서 새로운 유영을 꿈꾸게 된다. 이런 유연한 움직임을 고정하는 행위를 통해서 내가 보고자 한 낯섦의 간극과 조우한다. 『유연한 간극』은 순간의 모습들이다. 멈추어진 현재와 움직임의 흐릿한 경계, 그 간극의 긴장감과 여운들이 나의 시각적 에너지를 깨우며 긴장을 유도한다. 이런 충돌의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내가 만나고자 하는 새로운 관점의 접근 가능성이 열리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다. ■ 김건주
Vol.20170606g | 김건주展 / KIMKUNJU / 金鍵柱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