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검고 대지는 누르나니

박찬선展 / PARKCHANSUN / 朴贊善 / painting   2017_0517 ▶ 2017_0522

박찬선_벼1(rice)_캔버스에 유채_194×260.6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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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0517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조선일보 미술관 CHOSUNILBO ART MUSEUM 서울 중구 세종대로 135(태평로 1가 61번지) Tel. +82.(0)2.724.6322 gallery.chosun.com

박찬선 작가의 회화 세계도 어느덧 스무 개의 성상(星霜)을 견디었다. 90년대 한국미술계에서 아직 주류로 자리잡지 않았던 순수 리얼리즘의 기치(旗幟)를 들고 데뷔했고, 작가는 여전히 한치의 어그러짐 없는 리얼리즘을 움켜쥐고 있다. 천착(穿鑿)이라는 말 하나로 작가의 심정과 견해를 이해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더욱이 리얼리즘이라는 분류적 범주로써 표피적으로만 이해하지 말고 더욱 깊이 들어가보자. 보기와 같이 그림의 전면이 싱그럽고 청신(淸新)한 벼의 이미지로 가득 찬다. 어느 한 가운데 중심 이미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화면 자체가 주인공이다. 벼는 물기를 머금고 있다. 벼는 또 바람을 풀무질하여 내부에 태양의 빛을 가득 담아낸다. 싱그러운 벼의 낱알 낱알에 우주의 운영이 내재된다. 우리는 그림 속에서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 우리 할아버지들이 채택했던 철학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자. 그리고 우리는 잠시 영화의 기법도 떠올려보자. 『주역』 「계사전」에서 공자는 "근취저신(近取諸身) 원취저물(遠取諸物)"이라고 말했다. 우주에 대해서 생각하고 판단할 때, 그리고 그것의 변화를 알고자 할 때, 자기 신변 가까이에서부터 진리를 찾아야 하며 이것이 달성되면 멀리 있는 각각의 사물에 대한 진리 또한 알게 된다는 뜻이다. 내가 매일같이 먹는 일용한 쌀을 떠올려보자. 그것은 나의 육신을 이루게 해주는 기초적인 에너지이자 절대적인 에너지이기도 하다. 그것은 대지와 하늘에서 빚어졌기 때문이다. 쌀의 저변에는 대지가 있다. 대지는 대기와 빛의 순환으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주체이다. 주체는 영혼이기도 하고 마음이기도 하지만, 육체라는 질료, 즉 그릇 없이 그 마음이 담길 수는 없다. 나를 존재시켜주는 대상은 주변의 모든 관계 짓기가 아닐 수 없으며, 그 관계의 커다란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벼이다. 그것은 나의 육체이기도 하고 우주의 정신이기도 하다.

박찬선_벼2(rice)_캔버스에 유채_194×194cm_2015
박찬선_벼3(rice)_캔버스에 유채_112×194cm_2015

하늘로 계속 상승해가는 카메라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나온다. 그리고 카메라가 더 올라가면 대지가 나올 것이다. 더 올라가면 어느 곳의 지형이 보일 것이다. 그 다음 지구가 보일 것이다. 자꾸 올라가면 태양계가 보일 것이다. 더 가면 은하계가 보일 것이고 더욱 올라가면 그냥 우주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공간이 등장할 것이다. 그것을 넘나든다면 그 공간이 무엇인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다만 이 모든 우주를 운영시키는 원리만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대답하지 못한다. 그것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누군가는 태극이라고 부르며, 누군가는 도(道)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신(神)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운영시키는 주재자가 누구인지, 아니면 그 원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 무한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하며 알고 싶어서 목말라 한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이 신묘한 현상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감사하게 또 겸손하게 세상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자 할 때 모르는 그 무한의 것이 아주 쉽게 펼쳐진다. 진정 내 주변에 진실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핵심이다. 벌레 한 마리와 돌에 낀 물이끼마저도 청정한 진리이자 저 멀리 우주 밖 로고스의 구현체이다. 박찬선 작가는 가까이 자라는 벼와 붉은 꽃들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 나는 작가를 두 가지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좋은 작가이고 또 하나는 유명한 작가이다. 좋은 작가는 자기 삶을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반영시킨다. 자기의 일생을 오롯이 다 바치는 작가가 좋은 작가이다. 유명한 작가는 물론 자기의 삶을 다 바치는 작가도 있겠지만, 전략이 우수한 작가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나는 전자를 실존적 작가라고 부르고, 후자를 전략적 작가라고 부르곤 한다. (이 분류는 매우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이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진실로 믿는다.)

박찬선_벼5(rice)_캔버스에 유채_155×300cm_2016
박찬선_벼6(rice)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17

이제 박찬선 작가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작가는 군인 아버지와 의상디자인을 전공하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께서 전후방 지휘관으로 근무지를 전근하실 때마다 작가는 어린 시절에 눈에 익혔던 황금물결의 대지를 여전히 잊지 못한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내밀하게 존재하는 삶에 대한 경이로운 순간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 영화나 미술품, 혹은 도시 미관에서 얻은 것보다 자연에서 얻은 경이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대지를 찬미한 철학자 하이데거는 대지는 문명과 반대된다고 말했던가. 하이데거는 우리가 존재의 신비를 깨어 객관의 세계로 지식을 쌓아 올릴 때, 그것은 문명이 되지만, 대지는 그 객관의 세계를 영원히 허락해주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대지는 우리의 객관세계(ontic)를 언젠가는 무화(nichtet)시키고 만다. 그리고 대지는 언제나 신비와 경탄으로 우리를 다시 초대한다. 우리는 대지에 묶여있는 것이다. 이 관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하늘과 대지와 나는 사실 하나인 것이다. ● 작가는 이러한 진실에 대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에서 배웠을 것이다. 군대는 하나의 유기체이다. 인체가 털끝만치도 서로 소통되지 못하면 우리가 불인(不仁), 즉 마비되었다고 하듯이, 군대에 한 부서라도 말썽이 생기면 전체가 타격을 입는다.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헨카이판(hen kai pan) 역시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지혜 중 하나이다. 신은 만물을 자기 안에 품고 있으므로 모든 것은 하나이면서 전체라는 사상이다. 작가는 하나를 보고 열을 알듯이,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경이가 펼쳐진다는 것을 지각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대지와의 만남이었다. 황금 물결이었다. 바람의 발자국이 지나간 자리에서 경이가 생동했다. 그것은 하나이면서 전체였고 전체였지만 낱알 하나하나까지 존재의 가치를 보장해주었다. 그 경이로운 감정은 우주 전체를 직관하게까지 했다. 풍요의 진정한 의미였다. 작가가 벼와 붉은 꽃에 매료되어 여전히 천착하는 이유이다.

박찬선_열정1(passion)_캔버스에 유채_184×208cm_2013~17
박찬선_열정2(passion)_캔버스에 유채_184×208cm_2013~17

여기서 작가의 작품이 소재 면에서 크게 두 가지로 양분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리 동양과 다르게 서양에서는 세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했다. 하나는 관조의 세계이다. 또 하나는 실천의 세계이다. 이 둘은 서로 둘이 아니지만, 굳이 그렇게 나누었다. 관조는 테오리아(theoria)라고 한다. 오늘날 이론, 즉 사유의 결과는 순수한 관조의 활동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실천은 프락시아(praxia)라고 한다. 실천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인연의 생멸을 뜻한다. 관조는 일상의 틀을 초월한 시간에서 펼쳐진다. 일상, 즉 프락시아는 수평적 시간이다. 관조, 테오리아는 초월적 시간이기에 수직적이고 고양된 시간이다. 시적 시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구에서 여섯 날은 일상을 살고 한 주의 마지막 일곱 번째 날에 관조의 날을 살라고 가르쳤다. 이 관조의 날이 바로 홀리데이이며, 우리말로 신성하다는 뜻을 지닌 날이다. 작가가 그린 벼의 세계는 프락시아이며, 작가가 그린 꽃은 테오리아의 세계이다. ● 프락시아는 오른손의 세계이며, 테오리아는 왼손의 세계이다. 작가는 왼손에 작가메모와 관찰노트를 들었으며 팔레트를 들었다. 작가의 오른손은 싱그러운 초록과 적열(炙熱)하는 붉은색을 화면에 이동시킨다. 작가는 우리세계의 주요한 국면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벼라는 프락시스에서 아버지에게 배웠던 하나이면서 전체, 전체이면서 하나가 되는 유기적 실천을 배웠다. 붉은 꽃에서 어머니의 치밀하고 정열적인 계획의 관조를 배웠다. 이렇듯 카테고리가 두 가지로 양분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삶에서 저절로 묻어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박찬선 작가가 실존에 근거한 작가라는 사실이 입증된다.

박찬선_열정3(passion)_캔버스에 유채_89.4×145.5cm_2013~17
박찬선_열정4(passion)_캔버스에 유채_97×194cm_2014~17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6세기에 주흥사(周興嗣)라는 학자가 양무제(梁武帝)의 명을 받들어 지었다는 『천자문』의 내용이 생각난다. 『천자문』은 단순히 천 개의 글자를 모은 것이 아니라, 4자씩 250구의 운문이 만나 우주의 변화와 원리를 노래한 거대 서사시이다. 하늘 • 대지 • 사람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펼쳐지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것은 무짐(無朕)으로 시작한 천지 대자연이 웅대한 변화의 과정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표현한다. 인간사의 목표에 대해서도 분명히 짚어준다. '하늘은 검고 대지는 누르나니(天地玄黃)...이 모든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공경할지어다(悚懼恐惶). 이러한 대서사시에서 한 잎의 꽃과 한 알의 볍씨가 어찌 진중하지 않겠는가. 작가가 바라보는 바로 그 지점이다. ■ 이진명

Vol.20170517f | 박찬선展 / PARKCHANSUN / 朴贊善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