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URAL BEING

김근중展 / KIMKEUNJOONG / 金謹中 / painting   2016_1214 ▶ 2017_0108 / 화요일 휴관

김근중_꽃, 이전 花, 以前-Before-Flower15-10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62×130cm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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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중 홈페이지_www.kimkeunjoong.com

초대일시 / 2016_1214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화요일 휴관

통인옥션갤러리 TONG-IN Auction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32(관훈동 16번지) 통인빌딩 5층 Tel. +82.(0)2.733.4867 www.tongingallery.com

통인화랑 TONGIN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32(관훈동 16번지) 통인빌딩 B1 Tel. +82.(0)2.735.9094 www.tongingallery.com

나는 욕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나는 존재에 대해 탐구한다. 내 눈 앞에 오고가는 것들,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 나아가 그것을 바라보는 나란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묻는다." (김근중 작업노트 중) ● 방대한 역사 속에서 켜켜이 쌓여진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예술의 실천들은 때로는 이 시대 이 시점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시각과 시점이 얼마나 단편적이고 단면적인지를 무안하게 만든다. 여느 인간과 마찬가지로 시대 속 한 자리를 잡고 함께 흘러갈 뿐인 예술가에게 시대는 늘 거대한 사명과 임무를 부여하고 또 흥미롭게도 늘 그 기대에 부응해 온 예술가들에게 우리는 잔인한 명제를 떠안기기도 했다. 히포크라테스(Hippokratēs) 총서에 언급된 '인생은 짧고 의술은 길다'의 문장을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로 무심히 바꿔 예술가들에게 그리고 예술계에 과업의 돌을 던져오지 않았나. 아무튼 그 시대적 과한 요구에 초인적으로 응답하기도, 때론 국가적 사명과 전략에 요긴하게 사용되기도, 또는 너무 커다란 임무를 수행하다보니 사회 구성원들이 특별하게 구분 지어주는 소외감이 깊어 이들과 함께 하려는 눈치를 보기도 하는 예술가들은 그야말로 시대를 막론하는 열일하는 존재들이다.

김근중_꽃, 이전 花, 以前-Before-Flower15-1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30×162cm_2015

이렇게 세상을 남들과는 색다른 시선과 관점을 가지고 정신적 산물을 만들어 내는 예술가들은 한 번의 심한 홍역과 같이 자신과 세상의 존재에 관한 성찰의 시‧공간을 앓을 때가 있다. 진하게 앓은 후 더욱 진화된 작품으로 흔적이 남겨지기도, 혹은 정확한 진단 하에 정답을 찾으려하기보다 무수한 인간적인 해답들을 통해 원인 제거가 아닌 그 바이러스와 공생을 꾀하기도 한다. 작가 김근중의 작업 노트 중 위와 같은 첫 구절은 매우 중요한 듯 보이는데, 예전부터 앓아왔고 지금과 그리고 앞으로도 그가 풀어나가고 싶은 그만의 과업의 한 면을 슬쩍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근중_꽃, 이전 花, 以前-Before-Flower16-10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62×130cm_2016

작가 김근중의 작품을 보면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는 확고하고 단단한 '한국적' 전통성에 기대어 있지만 자유분방한 정신적 해방을 지향한 흔적들이 있고, 2000년도 무렵 잠시그간 시도되었던 형상을 버리는 듯 보였다가 화려한 원색의 모란들이 등장했고, 2000년 후반부터는 모란이 아닌 꽃의 형태를 입은 형상들이 화폭 안에서 꿈틀거리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거나 화폭 밖으로 무언가 말을 걸기 시작한다. 그의 작품에서 보였던 물질, 재료, 매체, 소재 등 새로운 시도와 변화에 집중해 흥미롭고 의미 있는 분석들이 많이 나왔고 전통성에 현대적 미각을 입힌 재미있는 실험적 작업에도 충분히 시선들을 머물게 했었다. 꽃의 형태를 간신히 입고는 있지만 점차 자연적 아름다움을 벗고 무너져가는 형상에서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궁금증이 유발되기도 하는 부분이었다. 작가 김근중의 근래의 작업들은 그간 고수해온 작품명을 제하고 대면했을 때 분간하기도 힘든 형상들이 부유하고 있다.

김근중_꽃, 이전 花, 以前-Before-Flower16-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62×130cm_2016

그러나 현재의 알쏭달쏭한 형태들의 작업들에 시선을 고정하고 예전의 작업들을 떠올려 보면, 작가 김근중이 일괄되게 그의 작업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 마치 퍼즐조각처럼 맞춰진다. 이는 앞서 언급한대로 매체와 소재에 있어 흥미로운 부분들이라고만 단순히 치부되어서는 안되고, 무엇보다 화폭 안에 형상들이 유기적으로 변하는 과정에서도 굳건히 그 자리를 지켰던 작품명 'Natural-Being'과 '꽃-이전, 이후(Before-Flower, After-Flower)'란 명제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보아도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없는 혼란함 속에도 늘 그 자리에 붙박여있었던 '꽃'과 '존재'라는 명제, 결국 작가 김근중이 골몰했던 그리고 드러내고자 한 것은 상징적 의미로서의 꽃이라는 기표(記標)를 가진 존재의 그 이전과 그 이후, 즉 우리가 무언가 어떤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 그 전후의 지점이라 할 수 있다.

김근중_존재내세계 存在內世界-Natural Being16-16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16

작가 김근중의 작업노트에서는 처음부터 선(善)과 악(惡)이 구분되어 존재해왔던 것이 아니라 단지 선과 악을 인간의 작위적인 기준으로 판단해 언어(기표)를 만들어 구분함으로 고정관념이 생기고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언급한다. 고정관념으로 가두어놓은 우리의 무의식은 뒤틀린 욕망덩어리로 꿈틀대고 강압적으로 억압할수록 오히려 제어하기 힘든 힘을 가진 채 무의식 속 더 깊이 숨어들어간다고 한다. 충동이라는 발화가 되면 언제든 치고 나올 준비를 하면서. ● 성경 속 선악과에 의해 분열된 선과 악,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해 상상치도 못한 인간의 잔인한 욕망이 표출된 사실은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그리고 이미 작위적인 기표들에 의해 파편화되고 분리되었던 욕망의 개념들을 이제 막 세상에 딛은 우리는 그 기표들을 학습하면서 내 안의 욕망들을 간신히 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호기심 어린 유아기적 순수함으로 하나씩 하나씩 헤아리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자크 라캉(J. Lacan)의 욕망에 관한 연구는 작가 김근중의 작업관념에 좀 더 힘을 더해줄 수 있다.

김근중_꽃, 이전 花, 以前-Before-Flower15-7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62×260cm_2015

라캉은 욕망의 개념을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딛고 더욱 발전시킨다. 즉 움츠려 있던 무의식 속 결핍 있는 욕망-엄마에게 욕구를 요구하지만 결코 온전히 채워질 수 없는-은 엄마인 타자의 결핍 역시 온전히 자신에게 향해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그 지점, 그리고 그 지점에서의 분리와 체념이 생성되어 만족될 수 없는 욕망으로 인정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결국 주체와는 상관없는 욕망이-해소되지 않은 채-무의식 속에 존재하고 작가 김근중은 이 지점에 집중하고 있다. ● 사실 그간 숱한 예술가들에 의해 재현되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의 크로노스(Cronus)신의 끔직한 모습-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식들까지도 먹어치우며 없애버리는-은 인간의 밑바닥에 꿈틀거리는 욕망을 최대한 가감 없이 반증해보였다. 풀리지도 않거니와 보이지도 않고 또한 예측하기도 힘든 욕망의 묘한 실체는 많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그토록 두렵지만 큰 호기심을 갖고 접근하게끔 유혹했을 것이다. ● 선과 악이 처음부터 구별되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고, 선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악은 그 대상이 사라진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닌 또 다른 대상으로 계속 대체된다. 선에 의한 구분으로써, 선으로부터 분리해 놓으려는 기준(기표)으로써. 이 같은 이분법에 대한 거부감이 작가 김근중의 작품에 녹아있다. 욕망을 자신만의 포지티브적 방식으로 소환해 위로와 화해를 하려는 시도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홍역처럼 진하게 한 번 치르고 지나가버리면 없어졌다고 안심이 되는 바이러스가 아닌 이 마저도 본인의 것이라 인정하고 품으려는 것이다.

김근중_존재내세계 新瀟湘八景圖-Natural Being16-17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16

라캉과 프로이트는 인간의 욕망과 결핍은 결코 만족되거나 채워질 수 없는 부분이거니와 이마저도 온전히 정확하지 않다고 보았다. 즉 상대방에게 자신의 욕망과 결핍을 진실되게 말하고 표현하는 그 순간에도 어쩔 수 없는 가공-상대에게 보이고 싶은 나의 모습-이 있고 이는 우리의 존재가 있기 훨씬 전부터 수많은 파편화된 욕망과 결핍의 매뉴얼이 있었기에 그것을 학습한 후 가장 자신에 알맞은 루트로 표현되는 것뿐이다. ●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관객이 있는 한, 작가 김근중의 욕망은 작품으로 계속 표출될 것이고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걸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욕망, 결핍, 정체성을 찾기 위해 작가 김근중은 우리의 결핍을 또한 집요하게 타진할 것이다. 그의 욕망이 관객의 욕망과 동일시되기를 바라면서. ● 다만 우리가 작가 김근중에게 최대한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의 작품에 적극적인 참여자로서의 관객 입장이 아닌 소극적인 관찰자의 역할은 아닐까. 진짜 그의 모습, 욕망이 발현되는 그 지점은 그가 스스로 욕망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 그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욕망하는 것을 표현한다기보다 욕망을 읊조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작품을 통해 또한 관찰자로서의 관객은 본인의 순수한 욕망과 결핍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김근중_꽃, 이전 花, 以前-Before-Flower15-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15

작가 김근중의 이분법적인 것을 최대한 피하고자 지극한 노력을 한 결과 관찰자인 우리는 불안하다고 생각되어지는 그 구조 안에 놓여진다. 작가 김근중에게 관찰자의 역할로서의 관객이란 작가에겐 존재하지 않는 듯하지만 분명하게 존재해야 하는 그 지점인 것이다. 이토록 가능하면 가공된 욕망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어찌 보면 작가 김근중에게 바라는 또한 과한 욕망은 아닐까. 관객이 위치해 있어야 하는 이 같은 불편한 입장만큼이나 매우 난감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결국 욕망은 작가 김근중에 의해 온전하게 표현될 수 없을 것이고 잡히지도 않을 것이기에 끊임없이 마음 놓고 그는 그-욕망-를 쫓아다니며 작가 김근중만의 형상화된 언어로 재현할 것이다. 그리고 이 끝나지 않을 추격전은 우리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결핍이 있는 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게임으로 지속될 것이다. ● 그래서인가. 알 수 없는 불편함으로 다가온 작가 김근중의 작품 속 형상들이 서서히 또 변하고 있다. 아마도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욕망과 결핍, 예측하기 어려워 두려웠던 그 실체와 화해하려는 마음이 든 순간 알 수 없는 고요한 평안함으로 큰 위안이 깃들고 있는 것이다. (2016. 12) ■ 고연수

Vol.20161214c | 김근중展 / KIMKEUNJOONG / 金謹中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