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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6_0728_목요일_05:00pm
작가와의 대화 / 2016_0820_토요일_02: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45-14(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128,128,128의 멜랑콜리 ● '한강 르네상스'를 꿈꿨던 전임 시장이 취임했을 무렵, 종로대로가 시작되는 초입엔 도무지 그 뜻을 짐작할 수 없는 프랑스식 이름을 붙인 건물이 한 채 지어졌다. 어떻게 봐도 그냥 시멘트 덩어리인 건물은 인근 지역이 개발되며 밀려난 음식점들을 수용하기로 합의돼 있었는데, 누군가의 작은 죄책감 때문인지 고장난 유머감각 때문인지, 나무에 한땀 한땀 아로새긴 오래된 피맛골 현판이 입구에 함께 걸리며 제법 이상한 외관을 연출해냈다. 결재권자에게 이것은 꽤 멋진 (부)조화의 풍경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순간 서울의 나이테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멋대로 구부러져 숭고에 가까운 판단유예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으니까. 한동안 모더니스트를 흉내내는데 열중했던 나는 종로를 걸을 때마다 자꾸 재채기가 나올 것 같은 강박에 시달렸지만, 오래지 않아 직선의 관찰이 불가능한 형태로 접붙여진 서울의 인공 좌표들 위에서 그것이 이 도시와 나를 유일하게 하나로 묶는 동시성임을 깨달았다.
오세경이 "기꺼이 속는 삶"(이것은 2014년 첫 번째 개인전의 타이틀이었다)을 결심했을 때 어쩌면 그도 직감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필연적으로 실패를 향해 미끄러지는 산보자임을. 오늘날 도심의 누군가를 '걷는 이'로 만들어주는 것은 포털의 로드뷰 어플리케이션이나 「마인크래프트」가 가진 마법의 권능이다. 적어도 나의 내적갈등은 우아한 근대인의 자기비판적 규범과는 거리가 있었고, 이를 자각한 페인터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다른 이외의 것들을 어떤 악의 없는 속임수라 믿어버릴 지언정. ● 나는 이런 조건에서 말미암은 오세경의 태도를 우선 '가짜 수집가적인 것'이라 부르고자 한다. 작가의 말을 성실하게 따라 그의 회화가 전통적 의미의 재현을 향해 있다고 가정하면, (2015년 그가 참여한 2인전 『성인병』의 서문이 밝히는 바처럼) "내적인 상흔이 남은 소녀의 상실감과 현재의 우리를 잇는"다거나 "불화하는 사회를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 이 작업들을 읽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몇 가지 정황을 고려할 때 나는 그가 정말 화면 속에 놓인 도상들을 "구상"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이 그림들은 정교한 맥락 안에서 특수한 의미를 엮어내는가? 무언가에 대한 지배적 표상으로서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가?
가짜 수집가는 대상을 재현하기보다는 이미 재현되어 나타난 증상들을 채집한다. 즉, 그는 동일성의 시선을 내재한 채 거리를 걷는 대신 모처의 시공에 기존재하는 시선들로부터 관음성을 탈취하는 연금술사가 되기를 택한다. 가짜 프로토콜을 구현하는 미디MIDI 화면처럼 이 가짜 수집가의 평면에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상사similitude적인 투사체들이 쌓이고 (상사와 유사의 엄정한 구분에는 약간의 수고로움이 필요할테지만) 시선은 최초의 욕망을 탈색한 채 훨씬 매스한 이물질로 접합된다. 가령 『성인병』에서 선보인 「숨바꼭질」과 「하얀 나비」의 연장에서 「짝꿍」은 세월호 참사라는 정황에 맞물려 대단히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로 독해될 수 있다. 그러나 「짝꿍」이 재현해 보여주는 것들—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인 여학생, 불타는 우산, 떠내려가는 쪽배 같은 도상들은 사실 벨기에의 시각예술가 얀 드 매샬크Jan De Maesschalck가 그의 작업 「무제 Untitled」에서 사용했던 모티브에 다른 소재들을 이어붙인 결과값이다. 마찬가지로 「8학년 여학생」(이 제목은 작업 도중 자주 틀어두었던 동명의 노래로부터 붙어졌다고 한다)은 존 브로시오John Brosio의 「CEO를 포식하는 공룡 Dinosaurs Eating CEO」을 불러온다. 한적한 도로에서 두 마리의 벨로시랩터에게 뜯어 먹히는 기업 임원의 모습은 브로시오에게 가장 미국적인 불길함을 암시하는 표상이었지만, 「8학년 여학생」에서 여고생의 시선은 포식(혹은 섭식)의 인과 바깥에서 하이에나의 시선과 뒤섞여 산만하게 병치되고 있다. (「토네이도 Tornado」 연작을 그린 브로시오는 초현실적인 회화를 통해 주로 일상의 풍경에 개입한 극적인 재난의 순간을 표현해 온 미국 작가다).
개념어 만들기를 좋아하는 프랑스인들의 표현을 몇 개 빌려보자. 인간은 어쨌거나 진리—정체성에 대한 지침을 필요로 하고 그것은 상징이 비스듬히 기울어진("완만"해진) 공란에 주어의 의지를 도달시킴으로써 성취된다. 적어도 현대인에게 실재와의 조우란 그런 식으로 성립한다. (이 문장은 역순으로 읽혀야 한다, ~식으로 성립하는 것을 우리는 현대인이라 부른다). 소멸의 의식이 거행된 회화/평면은 현실원칙이 특정할 수 없는 회색의 영점이다. 이곳에선 비로소 하나의 사건이 출현하고, 아마 그저, 다시 그 다음의 사건이 예비될 것이다. 나는 오세경의 작업이 드러내는 특징을 임의의 범주 속에서 패스티시라는 편리한 진술로 뭉뚱그리고 싶지는 않다. 패스티시가 동일성의 끝자락에서 발생한 조증이라면 오히려 그의 가짜 수집 행위는 (무)의식적인 페티시를 일종의 잠재성으로 발현시키는 멜랑콜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건축적으로 불투명하게 쌓여 올려지는 캔버스와 오일 페인트의 조합 대신 아크릴과 에어브러시로 장지를 서서히 '먹이'는 독특한 채색은 이런 정서를 반영하는 듯 하다. 역시 브로시오의 잔상이 남겨진 지난 작업 「지배자」나 회화작가 문경의를 빌려온 「아나키스트」, 맥 OS 배경화면을 연상시키는 듯한 텍사스 우주망원경의 구글 이미지를 차용한 「접속」 등에서 비슷한 공통점이 찾아질 것이다. ● 개인전 『기꺼이 속는 삶』과 『성인병』 이후 오세경의 작업에서는 몇 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감지된다. 먼저 야생 하이에나, 부서진 탱크, 거대한 공룡 화석처럼 제한적인 상상으로 체험되던 이미지가 길고양이나 병아리(「동병상련」), 디즈니 캐릭터(「환상」) 같은 친숙한 재료로 대치되는 현상이다. 극단적인 폭력의 묘사(「번식」)는 아주 흐릿한 성적 암시(「무정란」)로 전환되었다. 인물의 측면에서는 여전히 여고생이 주요한 소재로 사용되는데, 다만 이제 그는 사건이라 부를 만한 개연성이 모호해진 장면 내부에서 의도적인 양면성을 만들어내는데 더욱 주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8학년 여학생」으로 출발해 「접속」과 「환상」, 「기러기」를 거쳐 설치를 겸하는 한 쌍의 작업 「이별」/「이별 상자」로 이어지는 전시의 동선을 꼼꼼히 살필 때 변화의 낙차는 더욱 크게 체감될 것이다.
종로를 조금 더 걸어 광화문에 진입하면 서울을 응시하는 인상은 윤리적인 차원에서 보다 근본적인 고립감을 환기한다. 이제는 마치 투명한 벽지가 된 것처럼 느껴지는 5호선 역사 안의 장애등급제 폐지 투쟁을 지나, 세련된 포스터가 걸린 재벌 언론사의 사립미술관 앞에서 힙스터들의 긴 줄과 가라앉은 아이들에 대한 각기 다른 서명운동을 한 번의 시야에 뒤섞고, 확성기를 든 노인과 형광색 해조류처럼 부유하는 대사관 앞의 경찰들을 돌파하며, 누구라도 이상한 부채감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폐허는 에폭시가 듬뿍 발린 노출 콘크리트 위에서가 아니라 증상이 임계를 초과하는 순간 보풀처럼 번지는 우울증과 함께 비로소 자각된다. 한때 지배적이라 믿었던 것들이 더 이상 세계를 설명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릴 때, 내가 무엇일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은 결국 열병처럼 남겨진 무채색의 멜랑콜리다. 그곳에서 이미지는 회색의 온도로 무언가의 부재를 증명하려 한다. ■ 윤율리
Vol.20160727i | 오세경展 / OHSEKYUNG / 吳世莖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