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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6_0617_금요일_06:00pm
후원 / 서울시_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7:00pm
대안공간 루프 ALTERNATIVE SPACE LOOP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29나길 20(서교동 335-11번지) Tel. +82.2.3141.1377 www.altspaceloop.com
고대 히브리 유목민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이상향,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오로지 야훼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만으로 시작도 끝도 없는 사막을 헤쳐 나갔듯이 오늘날 현대인들도 이 미로와 같은 복잡다단한 사회에서 생존해 나가야 함에는 예외일 수 없다. 그들은 출구도 입구도, 안도 밖도 알 수 없고 어떠한 탈출 경로나 좌표도 없는 미로 안에서 떠돌고 방황한다. 미로라면 일반적으로 복잡하고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어려운 상황이나 그러한 특성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현대 도시를 일컬을 때 흔히 사용된다.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는 미로를 두고 '예측 가능함과 동시에 불가능함에 대한 어떤 것을 통해 세계를 묘사한 것'으로 '불안정하면서 위험스런 통과 지점이며 두 개의 세계 사이에 터져 있는 틈바구니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즐거움과 기대감을 주는 여행이자 놀이가 되는 한편, 수많은 장애물과 막다른 길을 만나고 왕복을 거듭하며 심지어 미노타우로스와 같은 괴물이 도사리는 위험으로 다가오더라도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운명적 방랑이자 삶의 과정임에는 틀림없다. 가상현실이라는 미로에 일상적으로 포획되는 현대인들에게는 오디세우스처럼 쉼 없이 정보의 바다에서 길을 헤매며 본인의 정체성을 디지털 유목민으로 확인하려는 현상이 새삼스럽지 않다. 벤야민(Walter Benjamin)에게도 대도시는 '미로에 대한 오래된 인류의 꿈이 현실화된 것'이었다. 그에게 대도시는 안과 밖의 모호한 경계, 꿈과 깨어남, 고대 세계와 현대 세계가 서로 얽혀 혼재하는 미로처럼 나타난 것이다. 경제적인 최단 거리와 수직과 수평의 매끈함이 미덕인 시대의 획일적인 직선의 논리는 구불구불하고 혼잡하며 모호하고 불투명한 이 예측불허의 무질서한 경로로 점철되어 있는 미궁의 벽에 가로 막히기 일쑤이다. 특정한 원리와 체계에 고정되지도, 투명하고 선험적인 논리로 이해될 수도 없어 끊임없이 방황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카오스적 장소는 손경화 작가가 현대 도시라는 공간에 대한 메타포로서 상정한 곳이다. 관객 또한 물리적으로 실제 미로의 지형을 하고 있는 이 복잡한 구조 안에서 느릿한 발걸음으로 어슬렁거리는 이방인이 되어 작가가 재해석하여 상상으로 구축한 도시 공간이 소환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탐색하고 사유하는 데 동참하게 된다. ● 손경화는 파리, 시카고, 런던 등지에서 수학하고 작업을 하면서 지금까지 대부분의 삶을 이방인으로 살아왔다. 늘 새로운 도시 환경과 문화에 적응해야 했던 작가는 도시 공간에서의 구체적인 삶의 경험을 심리적이고 내면화된 풍경으로 확장시키는 작업을 해 왔다. 그는 길 잃음과 헤맴을 허용하는 미로 같은 도시에서 스스로 산보자(flâneur)가 되어 아무런 목적이나 의도도 없고 어떠한 경로나 방식도 정하지 않은 채, 친숙한 일상적인 시공간 속으로 늘 새롭게 떠나며 그럴 때마다 변화무쌍한 도시의 천의 얼굴과 마주한다. 떠나는 것을 목표로 두는 산보자는 자발적으로 헤매고 표류하는 도시의 순례자가 되는 것이다.
이번 개인전이 열리는 대안공간 루프의 전시장을 들어서면 지하에 위치한 추상적인 형태의 도시 축소판을 위에서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다. 아래층으로 점차 다가서면 비로소 도시를 걸으며 체험할 수 있는 시선에 이를 수 있게 되는데 여기서 "도시 시스템에 대한 걷기 행위의 관계는 언어에 대한 발화 행위의 관계와 같다"는 세르토(Michel de Certeau)의 말이 유의미하게 다가온다. 작가는 전시장의 두 층을 사이에 두고, 높은 곳에서 도시를 조망함으로써 고정된 지형으로 읽힐 수 있는 시각적인 경관을, 촉각적 실천의 장소로 순식간에 탈바꿈시킨다. 비이성적인 감각들과 신체가 능동적으로 작동하여 눈만으로 파악할 수 없는 도시 공간의 생동감을 가능하게 하는 전이의 순간을 맞게 된다. ● 손경화가 도시를 대하는 방식은 도시 풍경을 단순히 바라보는 구경꾼이나 피상적으로 즐기고 여행하는 관광객의 방식과 구분된다. 그는 대도시 현실을 지극히 개인적으로 체험함과 동시에 현대 도시인과 사물 세계와의 상호 작용에 의해 형성된 거대한 텍스트를 비평적으로 바라보며 사유하고 질문을 던진다. 작가가 마주한 현대도시는 어떻게 쓰여 졌으며 어떠한 은밀한 말들을 걸어오는가? ● 인공적인 판타스마고리아가 내뿜는 현란한 스펙터클과 파노라마적인 풍경은 대도시의 필연적인 산물이며 충격 체험을 양산한다. 이 때 작동되는, 불연속적이고 우연적이며 찰나적이고 파편화된 지각 방식은 아우라를 붕괴시키고 익숙한 것이 생소하고 낯설게 보이는 '비판적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한다. 도시에서의 '각성'을 발현시키는 변증법적 사유 또한 기존의 인식 및 판단 체계에 균열을 가하는 이러한 태도로부터 활성화될 수 있다. 의식의 심연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파편화된 흔적들이 현재성을 띠게 되면서 발현되는 '각성'은 일상적 자아에 균열이 생겨 자의식을 하는 순간, 즉 카뮈식이라면 '부조리의 순간'이며 선불교에서 말하는 '새로운 관점을 생성하는 것'이자, '각성의 갑작스러운 순간'인 '사토리(satori)'에 비견되는 것이리라. 드러나지 않고 숨겨진 것, 하찮아 주목받지 못하는 것, 우연한 것, 낡은 것에 경이로운 시선을 던지고 그것에서 새로운 것을 감지해내고 의미를 부여하는 '깨어있음'은 '전논리(前論理)', '전이지(前理知)'라고 부를 수 있는, 일반적으로 합의된 '지식 이전의 지식'일 것이다. 산보자로서 손경화는 새로운 사유를 견인하는 예술적 장치가 되어 줄 '각성'을 통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진실의 암호를 풀어줄 코드를 추적하고자 도시 탐색에 나선다. ● 도시의 거리를 서성이다 보면 여러 시간 층이 미로처럼 얽혀 새겨진, 다양한 흔적들과 마주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마들렌이 일으키는 '비자발적 기억'은 작가에게도 유사하게 적용되며 또 다른 가능성을 암시한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가까이 있는 것의 현상'인 '흔적'은 아우라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일상성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도시 표면에 가시적으로 드러나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심연 깊이 감춰져 있다가 산보자와 예기치 않은 때에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조우하면서 드러날 수도 있다. 꿈, 무의식, 기억, 추억, 공상, 상상, 습관, 감정 등 작가 개인의 심리적, 정서적 내밀함이던, 지금 여기의 잔재 혹은 다른 시대 다른 공간의 기억이던, 파편적으로 어지럽게 잠복해 있는 흔적의 몽타주는 현재의 상황과 겹쳐지면서 성좌를 이룬다. 이렇게 '각성된 의식이 돌연 출현하는 장'에서 새롭게 편성된 것은 낯선 생성을 가능하게 한다. 작가가 도시 공간에서 새롭게 지각한 내용과 더불어 시공간을 초월하는 단서들을 발견함으로써 '갇혀진 기억'에서 탈각된, 내재된 흔적과 접속하게 될 때 섬광처럼 빛나는 이미지가 변증법적으로 포섭되고 무궁무진한 의미망이 리좀처럼 뻗어나가는 것이다.
본 전시에서 손경화는 폴 오스터(Paul Auster)의 소설, 『뉴욕 3부작』에 등장하는 스틸먼(Stillman)이라는 인물을 모티프로 미궁과 같은 도시 공간을 건축하였다. 작가에게는 환등상의 유혹 너머로, 주요한 정보나 명확한 해석이 유예됨으로써 방황하게 만드는 일상 속 불확실성, 은폐된 것, 비가시적인 것의 존재, 대의들 사이의 균열과 간극, 현존과 부재의 관계가 이 도시 미궁에서 발굴해야 하는 것들이다. '산보자의 모습 속에는 이미 탐정의 모습이 예시되어 있다'는 벤야민의 말처럼,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 퀸(Quinn)이 그랬듯, 다시 탐정이 되어 쉽게 파악되지 않는 이 수수께끼 같은 존재를 추적하고 탐색해 나간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고, 현존하지만 부재하는 소설 속 스틸먼은 흡사 유령과 같은 존재이다. 유령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떠도는 무엇이며 존재하고 있기에 무(無)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실재와 비실재,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있는 것이고 그 사이의 명확한 구분이 불가능한 것이다. 데리다(Jaques Derrida)의 표현을 빌자면 '부재의 현전'이며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존재자 없는 존재'를 연상시키는 존재이다. 작가에게 스틸먼을 추적하는 여정은 도시에서 이러한 속성을 사유하는 과정이다.
이는 작가에게 손에 잡히지도 않고 하나의 규정으로 환원되지도 않으며 확정적이지도 않고 불투명하여 기표에 의해 포획되지 않는, 항상 모호한 것으로서 실재계와 맞닿아 있는 지점이다. 이것은 상징계의 그물망에 포획되지 않기에 언어와 담론의 체계로 재현될 수 없는 것이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이 균열과 간극, 이 미끄러지는 지점에서 결핍이 생긴다. '미끄러짐'의 요체인 도시는 결핍과 균열이 집적된 대표적인 '욕망의 집결지'이다. 자본이던 쾌락이던 그 어떤 욕망이던 도시의 변화의 기저에는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타자, 즉 도시를 작동하는 시스템이 욕망하는 것을 그대로 욕망한다. 도시는 충족 불가능한 욕망의 또 다른 이름, 결핍과 불완전함을 감추기 위해 환상을 만들어내고 욕망을 부추기는 환상은 또 다른 결핍과 부재를 낳을 뿐이다. 욕망을 기만적으로 충족시켜 주는 이 환영은 가상을 실제인양 투영시키는 스크린이다.
손경화는 이러한 상징계적 스크린을 전복시키고 나의 시선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보여주는 '응시(gaze)'가 거주하는 지점을 통해 실재계적인 미지의 것을 찾고 사라진 진리의 차원에 접근하고자 한다. 전시장에 설치된 커튼 형태의 작업에서 이런 이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다. 도시라는 무대에서 앞으로 펼쳐질 사건의 서막을 알리는 듯한 이 거대 커튼은 도시적 맥락을 담지하는 손 작가의 작업에서 여러 의미가 중첩되어 읽힌다. 균질하지 않은 주름들 사이로 흐르는 빛과 공기의 미세한 변화에 늘 일정하거나 동일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커튼은 예기치 않은 공간에서 불쑥 나타나 순간적인 '정지(caesura)' 상황을 맞게 하여 공간의 연속적인 맥락에 어긋남과 낯섦을 부여한다. 이는 복잡하고 무질서한 비정형의 도시 공간에 대한 지각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이 화려하고 매혹적인 장막은 벽에 그린 파라시오스(Parrhasios)의 베일을 연상시킨다. 제욱시스(Zeuxis)가 진짜처럼 보고 속아 넘어간 이 베일은 걷으면 무언가 나올 것 같은 환상을 심어둔 덫이고 그 뒤에는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 있을 뿐이다. 작가는 존재하지도 않는 베일 뒤편의 그림에서 눈속임 그림으로 시각이 전환되는 순간, 다시 말해, 길들여지고 익숙한 기호체계로 사물을 인식하는 확정적인 사유방식에서 벗어났을 때, 지금까지 인식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와 조우하는 사태 자체를 주목했을지 모른다. 거기로부터 라캉이 말한 '시선의 유희'가 발생함을 잊지 않고서 말이다.
나가며 ● 손경화에게 도시는 단순한 경관이나 일상적인 삶의 공간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각을 자극하는 사건 그 자체이며 그것을 추리하고 탐구하는 과정에서 여러 단서들을 수집, 추출, 분석할 수 있는 거대한 텍스트이다. 확정적인 현실 너머 은폐된 채 잔류하는 다양한 결들의 틈새를 포착하고 사유하게 하는 현장인 이 역동적인 공간은 대도시 현실의 구체적인 경험을 관통하여 구축되는 그의 심리적 내면 구조를 작동시키는 기제인 것이다. 폭주하는 일상 속에서 한가로움과 태연함을 채택하고 우회하기를 선호하는 '배회자의 귀환'을 스스로 증거하면서 견고하게 코드화되어 있는 현실 속에 함몰되지 않고 유연한 메타 현실을 추구하며 확언의 상징적 질서에서 탈락되고 배제된 미지의 대상을 되찾고자 한다. 영혼의 심연 아래, 인식할 수 없는 무언가가 도시 표면으로 부상할 때 도시에 대한 눈먼 사유에서 좀더 쉽게 벗어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 ■ 이정아
Vol.20160617i | 손경화展 / SHONKYUNGHWA / 孫慶花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