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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_10:00am~05:00pm / 월,공휴일 휴관
진화랑 JEAN ART GALLERY 서울 종로구 효자로 25(통의동 7-35번지) Tel. +82.2.738.7570 www.jeanart.net
사색과 몽상의 '디즈멀랜드(Dismaland)' ● 그로테스크(grotesque)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우리는 그것의 어두운 함의(含意)들을 감지하는 동안 그것의 희극적 특색들을 비웃는다. 우리는 그것의 힘에 위협을 느끼고 거부하는 동시에 매혹당하고 끌린다. 우리는 우리의 규범(canon)들이 부정하는 진리를 일별(一瞥)하는 동시에 우리가 소유한 진리의 규범들이 부정되는 것을 경험한다. 우리는 그 판단이 선지(先知)적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직감하는 동안 우리의 관습적인 세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판단을 경험한다. (중략) 우리는 그로테스크를 독특한(sui generis) 힘, 마력을 지닌 또는 숭고한 힘으로 경험한다. 그 힘들은 우리가 그것들의 의미를 전유하는 과정에서 의존하게 되는 어둠과 빛이라는 두 개의 얼굴을 갖는다. (James Luther Adams and Wilson Yates(eds.), The Grotesque in Art and Literature: Theological Reflection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Grand Rapids, Michigan/Cambridge, UK, 1997, pp. 2-3.)
문형태의 작품은 아름답다. 그러나 잔혹하다. 문형태의 작품은 동화이다. 그러나 그저 평범한 동화가 아니다. 그것은 진부한 허구의 꿈을 깨뜨리는 잔혹 동화이다. ● 문형태의 작품은 문학적이다. 이야기가 넘쳐난다. 피노키오(Pinocchio), 마법사, 어릿광대(pierrot), 군인, 왕관을 쓴 사람들, 연인들, 고양이, 책과 안경에 이르기까지 그려진 이미지들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전하며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 문형태의 그림을 처음 마주할 때의 느낌은 안정됨과 따뜻함이다. 완벽한 시각적 균형을 이루는 화면 위의 형상들은 해피엔딩(happy ending)의 동화가 떠오르는, 마치 우리가 바라는 평범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담아내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작품 사이사이 숨겨진 기호들은 우리가 그의 그림을 단편적으로 보고 있다고 넌지시 말한다. ● 다시 한 번 그의 작품들을 둘러본다. 바닥에 놓인 「Boat」(2016)가 눈에 들어온다. 보트 위에 걸쳐진 노(櫓)가 보인다. 칼로 만든 노이다. 따뜻했던 공기는 낯설게 변한다. 노를 저어 물살을 헤쳐 나가듯 살아가는 인생에서 우리는 상처받는다. 항상 상처받는다고 말한다. 내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경우보다 상처를 받았다고 느끼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나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기에 상처받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현재의 나 자신이 '늠름한 몸뚱이를 일으켜 세우기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칼을 막아내고 또 얼마나 많은 너를 베었느냐'고. 부정할 수 없다. 상처받는 삶이다. 상처 주는 삶이다.
인간의 삶, 삶 속의 사건들, 그 속에서 인간이 행하는 모든 행동들에는 언제나 두 개의 얼굴이 함께 한다. 그 누구도 온전히 폭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만은 악하지 않다고, 선하다고 믿는다. 옳지 않은 것은 항상 자신의 외부로부터 자신에게 가해지는 것이라 말한다. 자신이 그러한 일을 행하게 될 경우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선과 악의 공존은 불가능하며 자신의 행위는 항상 선에 가깝다고 믿는 태도야말로 위선이고 자만이다. 공격을 위해서든, 방어를 위해서든 인간은 폭력을 행한다. 이성을 잃었든, 이성적으로 철저히 계산을 했든 간에 인간의 역사에서 폭력은 늘 존재해왔다. 폭력은 쉽게 드러나기도 하지만 사회 구조에 잠재되어 잘 드러나지 않기도 한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삶의 어두운 면을 감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의 은폐는 도리어 인간을 혼란과 갈등에 빠뜨린다. 신경쇠약적으로 줄담배를 피우며 불안해하던 우리를 비롯한 누군가의 내면은 분열되어 인간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는 우울한 파란 도깨비로 변해간다. ● 문형태는 이러한 현실을 간과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동화를 읊거나 꿈과 희망만을 노래하는 것이야말로 잔인한 행위라 말한다. 이에 작가는 세상의 상처로부터 나오는 이야기를 전달한다.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리하여 왕자와 공주는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와 같은 방식은 아니더라도-여전히 해피엔딩을 꿈꾼다. 작가는 되묻는다. 이 세상에 행복만 존재한다면 과연 그것이 행복으로 느껴질까? 언제나 평화롭다는 것은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일 수 있다. 완벽한 삶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이 언제나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인생이 언제나 슬픈 것만도 아니다. 되돌아보기가 필요하다. 인간의 자기합리화, 자만심, 자본주의 등에 의해 꾸며진 가짜 희망, 가짜 행복을 벗어나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한다.
이제 문형태는 미(美)적 위악을 발휘하여 자신만의 '디즈멀랜드(Dismaland)'를 창조한다. 그의 '디즈멀랜드'는 인간과 사회의 이면에 담긴 잔인함을 드러낸다. 「생각하는 잠수함」(2016), 「Pinocchio」(2016) 등에서 재현된 훼손되고 절단된 육체는 진부한 평화에 함몰된 동화의 내러티브를 벗어난다. 우리의 감각과 감정은 압도된다. 사실주의적인 것 같지만 형태가 일그러지고 왜곡된 문형태의 작품 속 이미지들에서 간단히 한두 개의 의미나 감정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로테스크적인 이미지들은 한 번에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불가해한 것으로서 존재한다. 그로테스크 미학은 우리가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범주를 뒤튼다. 우리의 세상을 구성하는 인식의 위계질서를 뒤집는다. 시공간은 무한히 확장되고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빠졌던 인간은 무력해진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도록 강요받는다. ●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으로까지 느껴질 정도로 낯선 잔혹함을 선사하는 문형태의 작품들은 역설과 아이러니(irony)의 현실을 담아내는 기호이다. 매혹과 폭력, 금기와 위반의 경계를 담담하게 넘나드는 작가는 인간 욕망의 음울한 현실을 통찰하여 그려내고, 여기에 상상의 자유를 첨가한다.돌연 경험하는 경이로움과 공포는 세계를 보는 시각을 확장시키는 훌륭한 전환점이 되어 숨겨진 진리뿐만 아니라 신비한 다른 세계를 체험시키고 승화된 정서적 체험을 이끌어낸다. 작가는 폭력의 세계와 타협하는 척하고, 폭력에 동참하는 것 같은 행위를 취하면서 그에 대한 자신의 분노와 비탄, 슬픔을 풀어낸다. 획일화된 세계의 규범과 관념들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사실 관점을 조금 달리하면 우리가 꿈과 희망의 상징이라고 믿는 전통적인 동화에도 이미 폭력이 숨겨져 있다. 백설공주, 신데렐라(Cinderella), 파란 수염, 인어공주와 같은 몇몇 동화들만 살펴보아도 온갖 욕망과 탐욕, 폭력이 넘쳐난다. 해피엔딩으로 끝났기에 그 모든 것들이 묵인될 뿐이다. 어디에도 우리가 생각하는 핑크빛의 동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문형태가 자신을 포함한 세상의 이야기가 반드시 비극으로 끝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삶은 폭력일 뿐이라고 단정 짓지도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긍정적이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문형태의 작품은 독설이 아니라 충고이며 폭력적 행위가 아니라 포용의 행위이다. 그의 '디즈멀랜드'는 희망을 없애기 위한 것이 아니다. 충격을 주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의 디스토피아(dystopia)는 세계와 세계 속 존재들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그것의 어두운 측면까지 받아들이는 진심어린 노력이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진정으로 다른 존재의 가치와 일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이에게 미안하다 말할 수 있다. 사랑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문형태는 상처받고 상처 주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위로한다. 마음을 편하게 먹고 기운을 내라고 어깨를 도닥여준다. 거센 삶의 파도를 막아준다. 이것이 진정 행복한 결말이다. 현실에서 가능한 해피엔딩이다. ● 그렇기에 문형태의 작품은 현실에 두 발이 닿은 몽상이다. 사실과 허구의 만남이 만들어내는 양가성과 이중성은 그가 그려내는 「Pierrot」(2016)와 「Magician」(2016)에서 더욱 강조된다. 어릿광대와 마술사에게는 무대와 일상,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다.
어릿광대에게는 다른 이의 가면을 벗기고, 개인의 가장 개인적이고 은밀한 비밀을 대중에게 드러내어 비판하고 풍자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다.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웃으면서 울고 있는 어릿광대는 유쾌하지만 슬프다. 양가적 감정의 공존은 시대와민족, 종교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해방감을 안겨주고 연대감을 느끼게 한다. 그 힘을 알기에 문형태는 스스로 어릿광대가 된다. 그리고 세상을 이야기한다. 세상의 고통을 스스로의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담아내어 우리에게 경외, 공포, 연민의 감정들을 동시에 전달한다. 가벼움은 무거움으로, 즐거움은 고통으로, 희극은 비극으로 변한다. 그리고 비극은 다시 희극으로 변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와 관람자 사이에 마법 같은 감정의 교차가 일어난다. 깊은 공감과 마음의 울림이 전달된다. ● 마술사는 어릿광대보다 더 강렬한 비현실적 경이로움인 환상을 경험시키고 우리를 압도시킨다. 작가의 말대로 '아무 사건도 안 일어나면 그것은 마술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거나 실제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아직 존재하지 않거나 또는 존재하도록 허용된 적이 없는 것, 들어보지 못한 것, 보이지 않는 것, 상상적인 것에 대해 호기심과 열망을 갖는다. 그리고 마술은 그러한 욕구를 일정 부분 만족시킨다. 그러나 환상을 통해 얻게 되는 새로운 경험과 자유가 도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환상을 경험한 후 우리는 오히려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된다. 현실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능동적인 힘을 얻는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님을 확인했기에 보다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게 되고 잃어버렸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경직되고 고정된 범주를 벗어나 이질성, 다수성, 복수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차이를 담아낼 수 있게 된다.평화와 폭력, 삶과 죽음, 현실과 환상, 비움과 채움처럼 서로 연결될 수 없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서로 손을 잡고 있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이즈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문형태의 환상이 일상에 근거한다는 사실이다. 일상은 우리가 날마다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보통의 삶이다. 우리의 일상은 사소하기도 하고 특별하기도 한 순간들의 집합이다. 반복과 변화의 순간이 함께 한다. 작가는 '익숙한 그것들이 새롭게 보이기를 원한다.' '길 위의 메모를 줍는 발견자'로서 작가는 '새 길이 아니라 모두가 걷는 헌 길' 위에서 누군가 '잃어버린 메모를 찾아 돌려주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라 믿는다. ● 문형태는 세상의 관찰자이자 형이상학적 성찰자이다. 문형태가 정의내리는 예술가는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런데 일상의 순간순간을 재발견하다보니 모든 사람의 삶에 존재하는 살아 있음과 죽음에 대한 사색은 필연적이다. 우리 모두는 다 알고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의 운명에 처해 있으며 살아있는 동안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경험한다. 우리의 모든 성취가 사라지고 존재 자체가 무(無)로 사라질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절대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도 공포를 배가시킨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성과 소멸의 인과 관계를 진리로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일상에서는 죽음을 회피한다. 그러나 문형태는 이야기한다. 죽음이 비록 인간적 사고의 단정적 범위 밖에 위치한다 하더라도 죽음을 사색하고 받아들이는 용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죽음을 가린 채 삶-일상-을 이야기할 수 없다. 삶과 죽음은 서로를 위해 필요하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 삶에 대한 태도가 나오며 죽음을 대하는 마음에서 작업을 대하는 진지한 마음이 만들어진다.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과 희망, 죽음을 뛰어넘는 고통과 절망을 느끼고 표현하는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다.
죽음을 삶 속에 존재하는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 후 문형태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기 전, 캔버스에 흙물을 칠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밑칠을 위해 사용되는 흙은 그가 살았거나 머물렀던 장소에서 가져왔다. 삶의 흔적을 담아내기 위해서이다. 간혹 물감을 두껍게 발라 완성된 작품에 흙의 색감이 드러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작가는 개의치 않는다. 그 행동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 작가도 죽을 것이다. 가족과 지인들이 장례식에서 그를 기리고 그리워하면서 땅에 묻을 것이다. 문형태는 궁금해졌다. '자신이 이 세상에 만들어 놓은 자신의 작품은 누가 묻어줄 것인가? 작품들과의 이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그렇다. 흙물을 바르는 행위는 작품을 미리 땅에 묻어주는 상징적 행위이다. 자신-그리고 자신의 작품-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자 자신의 죽음과 세계 속 존재들의 죽음, 그로 인한 헤어짐을 준비하는 것이다. ● 우리의 삶은 「Float」(2016)처럼 흘러가고 흘러가는 것이다. 부유하고 떠도는 것이다. 우리는 나그네이고 여행자이다. 크게 욕심낼 필요도 없다. 무언가를 가득 채우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너무 가득 채우면 흘러가지 못한다. 놓을 줄 알아야 한다. 잊을 줄도 알아야 한다. 내려놓음이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망각이 사유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더 잘 살아내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이다. 소유욕과 집착만큼 허약한 것도 없다. 그러고 보니 빈 종이상자로 만들어진 문형태의 오브제(object)들은 새로운 삶을 조형하기 위해 끝없이 비워냄을 함축하는 듯하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위한 재료들이 담겨 있던 상자들을 이용하여 형상을 만들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 상자가 빌수록 예술이 완성된다. 비워지고 채워지기를 반복하는 인생이다. 부서질 듯 나약해보이지만 단단하고 빛바래 있지만 빛이 나는 종이 오브제들, 그것이 삶이다.
문형태의 작품은 은폐된 교훈이 아니다. 진정한 고백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삶 전부를 쏟아 붓는다. 잠자는 시간까지도 아쉬워하는 작가는 진심을 다해 그리고 그린다. 만들고 만든다. 바로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감동받는 가장 큰 이유이다. 뭉클하고 울컥하는 감정의 울림이 전달되는 것, 그것은 진정한 마음 없이 불가능하다. 그의 말처럼 '작업을 해야 하는 사람이 작업을 하고, 작업을 하는 사람이 좋은 작업을 해내는 일이 당연한 것을, 적어도 작가는 이를 끊임없이 증명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 '하루 이틀의 여정으로 작업이 끝날 리 없기에' 문형태는 오늘도 작업실에 머문다. 그의 작업실은 '생각하는 잠수함'이다. 잠수함이 물속에서 유일하게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이듯 작업실은 작가가 작가로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몽상과 사색에 빠질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다. 작가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선택한 고립이다. 문형태는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마음을 다스리고, 깊이 생각하여 몰입하는 침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이제 우리가 그의 잠수함에 들어갈 차례이다. 나 자신의 삶과 세계의 삶을 진심으로 만나기 위해 잠시 그의 작품 안에 머무를 시간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생각하는 잠수함'이다. ■ 이문정
Vol.20160528d | 문형태展 / MOONHYEONGTAE / 文亨泰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