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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2 Gallery2 서울 강남구 선릉로157길 33 Tel. +82.2.3448.2112 www.gallery2.co.kr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는 주인공 크레이그가 우연히 영화배우 존 말코비치의 몸으로 들어가는 사각형 캐비닛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캐비닛 안으로 들어가면 두 개의 구멍이 보인다. 바로 존 말코비치의 눈이다. 15분간 그의 어두운 뇌 안에서 원형의 프레임을 통해 (존 말코비치가 보는) 세상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떠오르는 질문. 인간의 정신과 몸은 하나인가 분리된 영역인가. 『존 말코비치 되기』와 심아빈의 작품은 다른 차원의 세계로 연결해주는 사각형과 원형의 프레임, 근원적인 질문 던지기, 그리고 아이러니하고 위트 있는 상황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접점을 이룬다.
인류에게 던져진 인간과 삶에 관한 난해한 질문을 도형의 단순하고 절제된 이미지로 표현하는 심아빈의 개인전 『동그라미 세모 네모』가 갤러리2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동그랗고 세모나고 네모난 3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동그라미』는 높이 1.9m의 원기둥이다. 사다리에 올라 원통의 맨 윗면을 내려다보면 낚싯바늘이 관람자를 맞이한다. 마치 미끼를 물기 직전의 물고기가 세상을 보는 시선과 같다. 심아빈의 작품에 있어서 낚시는 인간에게 닥친 현실을 은유한다. 낚싯바늘을 물면 바다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밖은 언제나 위험하다. 이것은 기회인가 위기인가. (본의 아니게) 낚싯바늘을 덥석 물고 세상에 나온 우리는 기회를 누리고 있는가. 위기의 국면을 맞고 있는가. ● 삼각기둥의 구멍으로 머리를 집어넣는 작품 「세모」는 구멍 안 맞은편 거울을 통해 관람자가 자신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모든 인간은 '문(혹은 구멍)'을 통해 출생했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작은 구멍에 머리를 밀어내는 자신의 탄생 순간을 목도한다. 맞은편의 거울과 인조잔디가 깔린 바닥이 만나는 곳에는 작은 구멍이 있다. 이것은 골프장을 연상시킨다. 심아빈에겐 어머니로서의 대자연(Mother Nature) 안에서, 아주 작은 구멍을 향해 공을 전진시키는 골프가 인간의 탄생 과정과 유사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런데 맞은편의 작은 구멍은 사실 반원의 형태다. 거울을 통해 원형으로 보일 뿐이다. 가상의 원형은 탄생과 죽음의 순간을 암시한다. 누구나 경험했고, 경험하게 될 순간이지만, 기억하거나 증언할 수 없는 허구와 다르지 않다. ● 마지막 작품 「네모」에선 사각기둥과 그 위에 매달려있는 거울을 보게 된다. 이 거울이 사각기둥의 윗면을 비췰 것 같지만, 사실 거울을 통해 투사되는 것은 윗면이 아닌 사각기둥의 바닥면 이미지이다.
심아빈의 작품에서 낚는 자와 낚이는 자, 삶과 죽음, 시작과 끝, 위와 아래는 대립이 아닌 순환의 과정으로 점철된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삶의 복잡함과 감정의 기복을 제거하고 외부와의 거리 두기를 통해 얻어낸 대답이다. 그러한 정제된 사고는 심아빈의 작품에서 주로 사용되는 기하학적인 도형과 닮았다. 인간은 '직선'을 발견했다. '직선'은 세상의 질서를 의미한다. 한 열로 날아가는 새의 무리, 일정한 계절과 변화, 탄생과 죽음과 같은 변화의 궤적은 인간에게 '직선'을 인지하게 했다. 그리고 직선은 사각형, 삼각형, 원형을 만들어 낸다. 고대 중국의 우주관인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은 하늘은 원, 땅은 사각형 등 세상의 질서를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환원시킨 것이다. 이미 고대인들은 알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이나 질서는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을 통해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을.
주제와 이미지가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혼란스럽다. 재현할 수 없는 것에 이미지를 부여할 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형상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어떤 형상이 선택되든 그 형상이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도 분명하다. 예술가를 영매자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특수한 능력을 발휘해서 부재하는 것을 눈앞에 환생시키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심아빈 작품의 기하학적인 도형은 '이해'가 아닌 '사유'를 요한다. 이해는 '앎'을 바탕으로 한다. '앎'은 주제와 이미지의 유사성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사유는 '앎'의 결여로부터 나온다. 작가로서의 기술적인 능력을 드러내지도, 사건을 재현하지도, 부재한 것을 이미지로 소환하지도 않는 그의 작품은 보편적인 앎의 결여와 억제를 통해 사유를 유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론을 침략하고 관습을 마비시켜야 한다. 심아빈의 이번 전시를 통한 공감과 성찰은 작가가 아닌 관람자의 몫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존 말코비치의 몸을 체험한 크레이그의 부인 로테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었어!"라는 그녀의 말은 그래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 갤러리2
Vol.20160428i | 심아빈展 / SHIMAHBIN / 沈雅彬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