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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6_0507_토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7:00pm / 일요일 휴관
길담서원:한뼘미술관 서울 종로구 옥인동 19-17번지(종로보건소 옆) Tel. +82.2.730.9949 cafe.naver.com/gildam
류준화 그림의 원시성 ● 류준화 그림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무서웠다. 무언가를 강하게 발산하고 있는 소녀들이 두려웠다. 소녀들이 지닌 원시적이고 야생적인, 그래서 순수하면서도 난폭함이 느껴지는 그림들은 불편했고 거부하고 싶었다. 우리가 보이고 싶지 않은 내면의 그 무엇을 소녀가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까? 우리는 그 무엇을 직시하는 게 두려워서 의식의 심연 속에 가라앉혀 두고자 하는데 류준화는 그것을 표면으로 불러내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좌절된 여성의 원초적 욕망을. ● 류준화 그림의 원점에는 경북 안동이라는 깊은 내륙지방이 갖는 원시성과 풍산류(柳)씨 집안에 시집와 안동 고유의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딸만 넷을 낳은, 그럼에도 그 딸 넷을 모두 대학까지 보낸 엄마의 희생과 저항의 역사가 있다.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 세대까지만 해도 자기 욕망을 밖으로 표출하기가 어려웠다. 드러냄과 동시에 쏟아져 내릴 핍박을 각오하지 않는 한 그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억눌리고 좌절된 욕망은 몸의 언어로 각인된 채 유전되었다. 좌절된 여성의 욕망want은 생리적인 욕구desire와는 달리 정신의 욕망이고 허기이다. 생리적 욕구마저 충족되지 못한 채, 두려움 가운데 자기희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할머니와 어머니 세대 여성들 대부분의 삶이었다. ● 류준화는 이러한 욕망의 좌절을 소녀, 물, 새, 꽃 등으로 치환한다. 소녀는 물속에서 검고 긴 머리를 하고 무언가를 골똘히 사색하는 눈을 갖고 있다. 몸에서는 꽃이 피거나 지느러미가 나거나 날개가 돋아난다. 또는 새를 타고 날거나 발 없는 새를 옆구리에 끼고 유영한다. 그 무서운 새는 권력을 쥔 다른 성일 수 있고 돈일 수도 있으니 그것과 싸워야하는 소녀가 마냥 아름다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욕망을 표현하고 실현시키고자 시도했던 소녀들은 마을로부터 퇴출당했거나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착취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류준화의 새는 무섭고, 꽃은 아름다우나 희생당한 꽃이고 핏덩어리이다. 그의 그림은 이렇게 아름다움과 무서움이 그로테스크하게 균형을 이룬다.
류준화의 초기 작품들에서는 물속에서 유영하는 소녀들이 대부분 옷을 안 입었거나 아주 가볍게 입고 있다. 그는 소녀들의 탄생의 맥락에서 원시적인 신성을 표현하기 위해 옷을 안 입히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했지만, 섹슈얼리티의 눈으로 소녀를 보는 시선들에 늘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안에, 모든 만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소녀들에게 옷을 입혔다. ● 이번 길담서원:한뼘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에 대하여 류준화는 이렇게 말한다. "세월호 참사이후, 나도 내 그림을 보기가 힘들었어요. 내가 누구를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나? 누구를 위한 그림을 그려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기 시작했어요. 나의 이전 그림을 좋아하는 분들은 내가 변했다고 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나의 그림에도 변화가 필요한 시간이 아닌가 싶어요." 감정적으로도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물속에 유영하는 소녀들을 더 이상 그리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그래서 세월호 이후의 그의 그림들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있거나 뭍에 서있거나 모두 옷을 입고 있다. 그리고 연령대가 다양한 여자들과 남자들이 무리지어 등장한다.
"저는 공동체와 연대의 의미를 담아 보려고 했어요. 점점 성장이 멈춘 시대, 사람이 별로 필요 없는 시대로 가고 있는데 그럴수록 더 사람에게, 사람의 가치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요." ● 이번 전시의 주인공들은 그의 말처럼 소녀가 아닌 사람들이다. 물의 원초적인 카오스의 세계, 신화적인 세계가 아닌, 남녀노소가 온전한 옷을 입고 있는 현실 세계이다. 카오스의 물로부터 뭍의 세계로 나온 소녀들은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어른과 아이와 남자와 여자의 몸에서는 꽃 한 송이씩 피어나 있다. 그들의 몸은 여전히 신화적인 몸인 것이다. 그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 있다. 슬며시 옆 친구와 마주잡은 손, 맞닿은 어깨와 어깨 사이로 수런거리는 말들이 돌아다닌다. 불온한 말들이 그림으로부터 꽃송이처럼 솟아오른다. 지금도 수많은 바리데기들은 수장된 물속에서, 정의가 익사당한 사회에 대고 기원한다. 혁명이라는 신화의 도래를!
류준화는 누군가가 '그 그림 좋다.' '예쁘다.'라고 하면 그렇게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근대화된 사회를 살아가면서 스스로 상실하거나 순치당할 수 있는, 예술가가 가지는 자기만의 고유성을 이렇게 지켜온 것이다. 나는 그 부분이 바로 그의 '그림이 젊다'라고 평가 받는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이 들면 원만해지면서 그런 까칠함을 잃게 되는데, 온전한 옷을 갖춰 입은 사람들의 그림에서도 그의 저항정신은 부드러운 가운데 팽팽하다. ● 그리하여, 류준화의 그림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알레고리다. 앞으로도 류준화의 자궁은 아름다움과 무서움이 가파르게 균형을 이룬 신화적 내러티브를 다채로운 변주로 출산할 것이다. ■ 이재성
Vol.20160410c | 류준화展 / RYUJUNHWA / 柳俊華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