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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화 블로그_blog.naver.com/mooono
초대일시 / 2016_0213_토요일_03: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_10:00am~05:00pm / 월,공휴일 휴관
진화랑 JEAN ART GALLERY 서울 종로구 효자로 25(통의동 7-35번지) Tel. +82.2.738.7570 www.jeanart.net
Titled. Untitled. ● 몸의 일부가 그려진 흑백의 캔버스가 시선을 끈다. 토르소(torso)인 듯하다. 손 같기도 하고 얼굴 같기도 하다. 한편에는 동물의 이미지가 교차한다. 이번에는 사물의 형상이다. 이미지의 사이사이 만 레이(Man Ray)의 레이요그램(rayogram)을 연상시키는 흰 공간이 눈에 띤다. 친절함을 가장한, 그러나 매우 불친절한, 클로즈업(close up)된 이미지들은 선명한 지각(知覺)과 판단을 방해한다. 이미지의 실타래는 풀고 풀어도 엉켜 있을 뿐이다. 인체, 동물, 사물의 부분들이 결합된 이미지들의 미로에 빠진 존재들, 사건들, 그리고 세계들, 그것들에게 둘러싸인 우리들. 쉬워 보이면서도 쉽지 않은 퍼즐, 종착점은 보이지만 여정이 보이지 않는 미로. ● 양정화는 틈새를 찾아내는 작가이다. 보는 것과 실재하는 것, 현실과 환상, 진실과 거짓 사이에 존재하는 메울 수 없는 간격, 틈-Interval-에 대한 연구, 그것이 양정화의 작업이다. 구상적인 동시에 상징적인 이미지들은 모방이라기보다는 창조에 가까우며, 재현이라기보다는 표현에 가깝다. 그녀의 작업에서 명확한 경계는 흐려지고, 사라지는 경계는 또렷해진다.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 뒤섞인 채로 나긋나긋하게 귓속말을 하는 것 같은, 순수하면서도 위악적인 작업들은 몽환적이고 모호하다. 그러나 동시에 명확하다. 체계적이면서도 즉흥적이고, 치밀하면서도 본능적이다. 시각적인 동시에 촉각적이고 청각적이다. ● 공감각적 시(詩)와 같은 작업이다. 작가가 선보이는 하나하나의 캔버스는 시어가 되고, 오브제는 시구(詩句)가 된다. 그리고 하나의 시가 완성된다. 캔버스 가득한 흑백의 색채는 시적 함축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작가는 대학 시절부터 흑과 백이 주가 되는 무채색을 많이 사용했다. 경계의 줄다리기를 위해서이다. 작가가 느끼기에 유채색은 지나치게 설명적이고 구체적이어서 작품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한다. 물감은 흥건하게 넘쳐흘러 감정을 구구절절 열거한다. 그러나 무채색은 덤덤하고 어렴풋하다. 모든 색을 내포하고 모든 빛을 암시하기에 함축적이다. 여러 개의 열린 결말을 원하는 작가에게는 숨바꼭질하듯 의미를 숨기고 있는 무채색이 제격이다.
흑백을 선호하다보니 양정화가 사용하는 주된 매체는 자연스럽게 소묘-드로잉-재료인 오일 스틱(oil stick), 목탄, 콩테(conté) 등으로 한정된다. 그러나 소묘 재료를 선택한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는 행위 자체에 조금 더 집중하기 위한 선택인 동시에 촉각성을 전달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작가에 따르면 대부분의 드로잉 재료는 직접적이다. 팔을 크게 움직이면서 드로잉에 집중하면 캔버스와 작가 사이의 모든 것은 사라진다. 작업이 끝날 때까지 물감을 섞을 필요도, 붓을 헹굴 필요도 없다.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캔버스와 작가는 순수한 관계를 맺는다. 불필요한 모든 존재는 일시적으로 사라지고 작가는 무아지경에 빠져든다.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접점에 머무른다. ● 경계를 오고가길 원하는 작가는 그렇게 눈으로 만지는 그림을 그린다. 작가는 작업 과정에서 종이와 재료를 통해 촉각적 교감을 나눈다. 촉각은 시각보다 비밀스럽고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캔버스에 쌓여가는 드로잉 재료의 감성은 풍부한 모호함을 전달한다. ● 우리는 일반적으로 대상을 가까이에서 보면 더 정확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멀리에서 볼 때 놓치는 것들을 다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가까워질수록 전체는 사라지고 부분만 남는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수면 위에 떠오른 조각만으로는 빙산의 전체를 가늠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보았다고 하여 모든 것을 아는 것도 아니다. 이에 양정화는 전체와 부분뿐만 아니라 그림과 그리지 않음 사이를 넘나든다. 비움과 채움 사이의 경계에 머무른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그려지지 않은 영역은 사실 무한한 넓이와 깊이를 갖는다. '무제(Untitled)'는 수백, 수천가지의 제목을 함축한다. 그 안에 온 세계가 머무른다. ● 현실인지, 비현실인지를 명확히 판단한 수 없는 양정화의 작업은 환상에 가깝다. 환상은 바로 현실과 비현실의 간극, 결정과 망설임이 교차되는 모호한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실이라고 판명되는 순간 환상은 사라지고 비현실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환상은 그 생명을 잃는다. 로즈메리 잭슨(Rosemary Jackson)은 환상의 영역이 실재적인 것과 비실재적인 것 사이에 불확정적으로 위치한다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환상은 현실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이 존재하기에 그것에 대비되는 환상의 공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자꾸 망각한다. 현실을 근간으로 하는 친밀함이 낯섦으로 바뀌는 것, 인간적이고 한정적인 한계를 벗어나 시선과 의미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 그것이 환상이다.
작가에게 환상은 진부한 현실을 전도시키는 힘이다. 양정화는 의식으로 지각되는 현실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의식의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삶의 일부분이라 본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평행적인 세계를 창조한다. 지각된 것들을 통해 객관적 진리에 도달하고자 함은 불가능한 꿈이다. 지나친 낙관론이다. 그것은 단지 세계를 알아가는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그것만으로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자만이고, 오산이요, 무지함이다. 따라서 사실적인 형상들에서 환상을 만들어내는 양정화의 작업은 작가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보기 위한 노력이자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상상력의 발현이다. ● 예술은 이미 그 자체로 환상적이다. 그것은 실재하는 세계에 근거하면서도 그것 바깥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예술가가 창조하는 세계는 현실 속에 현존하지 않지만, 예술가의 내면 혹은 작품 속에 존재하는 세계이기에 부재하는 것도 아니다. 한편 모호한 이미지들은 작가의 기억과 기억이 쌓여 만들어지는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에 따르면 인간과 동물, 그리고 사물의 형상을 오고가는 변형된 이미지들은 인간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이 모여 형성되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 질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기억이 객관적 사실이라 믿지만 캔버스 위의 이미지들처럼 기억은 머릿속에서 진화 혹은 퇴화를 거듭하고 변형된다. 잘려 나가고 새롭게 창조되기도 한다. 왜곡되기도 하고 변조되기도 하며 의도적으로 망각되기도 한다. 따라서 기억은 주체에게 익숙한 것인 동시에 낯선 것이며, 우리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확언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목탄이나 콩테처럼 분말로 이루어진 매체는 모래성처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세계, 잡고 싶지만 잡을 수 없는 기억을 은유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캐스팅된 손 위에 수북이 쌓인, 작은 바람에도 날아가 희미한 흔적만을 남기는 목탄 가루는 우리가 진실이라 믿는 모든 것들,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 모든 유형, 무형의 것들이 언젠가 사라질 것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 양정화의 작업은 추상적이지 않다. 사변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실주의를 표명하는 것도 아니며 무언가를 지시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그것은 현실인 동시에 환상이다. 이런 작가에게 미술 장르의 경계 역시 유동적이다. '회화와 조각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보다 내적이고 은밀한 수준에서 닮아 있다. 그 모두는 작가와 세계를 교감하게 해주고, 소통하게 해주는 매개라는 점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그렇기에 양정화의 작업은 주제, 형식 모두에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여 있다. 꿈꾸는 것 같은 불분명함은 객관적 세계가 제거한 전(前) 언어적 세계를 복원시킨다. 그리고 문명이 정의내리지 못한, 혹은 정의내리지 않은 세계를 가시화시킨다. 그것은 우리가 인지하는 현실보다 더 생생한 실존의 세계이다. ● 궁극적으로 양정화는 미술이 침묵의 시와 같음을 증명한다. 그것은 무언의 행위로 의미를 전달한다. 작가가 이 세상에서 선택한 특별한 이미지들은 무한대의 의미를 전달한다. 작업이 진행될수록 의미의 층들이 끝없이 쌓여간다. 그 의미의 층이 쌓여갈수록 작가와 세계, 세계 속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울림이 깊어진다. ■ 이문정
Vol.20160213c | 양정화展 / YANGJUNGHWA / 梁瀞化 / painting.draw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