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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0303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30am~07:3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자인제노 GALLERY ZEINXENO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10길 9-4 Tel. +82.2.737.5751 www.zeinxeno.com
경계에 서서 환대를 기대하기 ● 양정화의 작업을 읽어내기에 유효한 코드로 '경계'를 들 수 있다. 경계라는 것은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분간되는 한계, 지역이 구분되는 한계 또는 장소'로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것이다. 경계를 통해 나눔과 분리가 수행되며 차이와 구별을 만들어낸다. 경계는 이러한 수행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이러한 나눔과 분리를 낳은 것은 견고한 이분법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대립의 개념이 가능한 것인가 내지는 타당한 것인가를 의심하는 움직임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양정화의 작업에서도 발견된다. ● 나와 타자, 현재와 과거, 미와 추, 인성과 야성, 발언과 침묵 등을 구분 짓는 경계가 가능한 것인지? 그 경계에는 무엇이 있는지? 경계는 단지 그러한 구별만을 만들어내는 것인지? 양정화의 작업은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하며 바로 그 경계에 위치한다. 이러한 끊임없는 질문의 반복에는 작가 스스로 밝히는 강박적 성향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강박의 정체가 무엇이건 강박은 때론 작업 과정에서 작가를 능가하는 것으로 그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반복이 지속되고 있으나 강박이 그를 소멸시킬 수는 없다. 이러한 강박은 밖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작가 '안'에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그를 사로잡아 소멸시킬 듯하지만, 변형을 통해 다시 생성의 길로 들어선다.
인성과 야성의 경계 ●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인체이면서 동시에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치밀한 드로잉이 만들어내는 털의 이미지는 인체의 굴곡에 짐승의 모습을 입힌다. 짐승의 털을 두른 인체는 - 이때 인체 또한 뒤틀리고 잘리고 과장되어 온전한 모습이 아니다 - 인간의 영역에도 짐승의 영역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둘 사이를 위태롭게 배회한다. ● 인간의 장소에서는 짐승이 타자이지만 짐승의 영역에서는 인간이 타자이다. 타자는 손님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지칭될 수 있다. 인간 주체인 '나'의 장소에 들어오려는 짐승 손님이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라면 주인은 더욱더 손님을 이질적인 것으로서의 '타자'의 이름으로 주인인 '나'의 공간에서 내쫓으려는 배제의 기제를 즉각 작동시킬 것이다. 인성과 야성의 경계에 위치하면서 둘 중 어느 쪽으로도 치우지지 않는 형상들은 인성과 야성을 한 몸에 지닌 채 인간의 문명 세계에서도 짐승들의 자연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 할 것이다. 인간의 눈은 짐승의 털을 도드라진 '차이'로 발견할 것이며, 짐승의 눈은 표면을 덮은 털로도 감출 수 없는 인체 특유의 곡선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공간의 주인과 손님은 언제나 역전의 가능성을 품고 있으며, 이러한 전복의 가능성이 발생하는 지점이 '경계'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경계의 이러한 속성에 집중한다.
양정화의 눈은 바로 이 경계에 위치한다. 둘을 '차이'로 구분 짓거나 별개의 것으로 구별하여 대립시키지 않는다. 결코 초대하지 않았지만 뜻하지 않은 시각, 장소의 문턱에서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말을 거는 손님을 발견하는 것은 결국 내 '안'이기 때문에 그를 내 '밖'으로 완벽히 몰아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를 온전히 배제시키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나'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나' 아닌 것으로 구분 짓고자 했던 것들이 결국 나를 구성하는 것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내 안에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안으로 부터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질적인 타자로 배제시켰을 뿐, 내 안의 손님을 발견하는 순간 그는 타자가 아닌 것이다. 손님을 밖으로 내몰 수도, 안으로 받아들 수도 있는 문턱, 나와 타자가 겹치는 경계에서 작가의 형상들이 서성인다. 이 경계에서는 주인도 손님도 안도 밖도 정체가 불분명하며, 그 위상은 언제나 전복 가능하다. ●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졌던 여러 항들은 작가가 말하듯이 언제나 "융합의 가능성"을 지닌 동사와 같은 존재이다. 이러한 '가능태'로서의 이미지는 개념적으로 완결되어 지시하는 바를 분명하게 '재현'하는 명사와 같은 것이 아닌 것으로, 완결된 형태를 지니지 못하고 분화되는 세포와 같은 '덩어리'로 나타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 ● '오래 전부터'라는 것은 단선적인 시간의 순차를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시간의 선적 속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으나 과거, 현재, 미래의 불분명한 구분, 상호작용과 총체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학자들이 주장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양정화의 작업에서 시간과 기억은 작업을 이루는 중요한 모티브인데, 이 역시 단선적인 것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다. ● "주변의 사람이나 사물 또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문득 낯설어질 때 불안과 함께 강박적인 반복 충동을 느끼곤 한다."고 작가는 밝히고 있는데, 어떤 계기를 통해 과거의 기억이 현재로 불려와 낯선 것으로 나타날 때 작업의 동력이 된다. 그러나 그 기억은 이미 과거의 것만이 아니며, 인체가 짐승의 털을 입고 짐승이 인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현재를 등에 업고 변형되어 드러난다. 이렇게 현재로 순간적으로 소환된 과거는 작가의 선을 그러내는 손놀림, 그리는 행위의 강박적 반복을 통해 이미지로 만들어진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로 소환되는 방아쇠가 일단 한번 당겨지면 선을 그리는 반복적 행위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지속적으로 불러들인다. 이는 처음 그어진 선 위로 그 다음의 선들이 중첩되기를 반복하면서, 양피지 위에 글을 쓰고 지우고 덧쓰기를 반복하여 만들어진 문양들에서처럼 시간의 다양한 층위가 화면 위에 공존하며 시각적으로 드러난다. ● 그러나 양정화 작업에서 겹치는 시간의 범주를 과거와 현재 뿐 아니라 미래로까지 넓혀 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는 지속적으로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만,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입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시각으로 재해석되고 재구성되어 미래의 모습을 입고 도래할 것으로 드러난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선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상호 침투하며 겹쳐져 서로에게 흔적을 남긴다. 완료된 것으로서의 과거가 아닌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서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과거는 미래에 도래할 모습으로 다시 한 번 현재에 겹쳐있는 것이다. 현재의 '나'에 의해 재해석된 과거의 기억은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유산을 상속받는 것이 되며 그러기에 유산의 상속은 비단 과거의 상속이 아닌 미래를 상속 받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의 작업에서 현재는 과거, 미래와 함께 이중으로 묶여(double-binding)있다. 작가가 '융합의 가능성'을 말할 때 '가능성'이라는 것은 이미 미래를 품고 있는 것으로, 시간은 그의 작업에서 각각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면서 서로 겹쳐지는 경계에 위치하며 상호침투, 확장한다.
색채와 형태의 경계 ● 양정화의 지금까지의 작업에서 볼 수 있는 눈에 띄는 형식적 특징은 선의 반복과 함께 색채의 완벽한 배제였다. 그에게 있어 색은 선에 대한 완벽한 대립항, 화해할 수 없는 무엇이었던 것 같다. 연필이나 흑색 펜, 목탄, 콩테 등을 사용하여 하얀 캔버스나 종이에 검은색만으로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작가가 드로잉을 통한 형태의 구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반증해왔다. 선과 면을 만들어내는 신체적 행위를 통해 현재 느끼는 감정과 소환된 기억에 대한 반응을 즉각적으로 화면에 나나낼 수 있는 드로잉의 즉각성에 매력을 느낀다는 작가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양정화는 강박적으로 선과 형태에 집착하고 색을 배제시켜왔다. ● 그러나 이번 전시에는 색채를 사용한 작품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학창시절을 제외하고는 무채색만 고집했던 작가의 행보로서는 매우 이채로운 변화이다. 색의 사용을 철저히 외면했던 그가 색을 도입하는 방식은 매우 조심스러운데 형상이 아닌 배경에만 사용함으로써 이제까지 집중해온 드로잉을 색이 최대한 방해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어쩌면 작가는 지금까지 색은 나의 것이 아닌 것, 내 밖의 타자로 여겨왔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 안에 접혀있던 색채의 충동을 발견한 것일까? 이제 그의 작업에서 색채는 '나'의 공간에 들어올 수 없는 초대되지 않은 불청객만은 아니다. 색채와 선의 경계에 서서 서로를 초대하고 받아들이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 ● 과거의 외상적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것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내 안의 타자성에 집중했던 초기 작업, 작가를 둘러싼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성이라는 넓어진 범위로 진행되었던 행보에 색채의 도입을 더하여 조금은 따뜻한 시선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작품은 이전 작품들에 비해 기괴하고 흉측해 보이기도 하는 형상이 많이 사라졌다. 선의 반복을 통해 형태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고수하지만 이전의 작업에 비해 추상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왜곡되어 전체가 드러나던 인체는 부분으로 잘려 확대되어 보는 이는 짐작하고 상상할 뿐이다. 배경의 색채는 단순화된 형태감을 강화시켜 긴장감을 이룬다. 이러한 긴장감 속에 잘려진 신체 부분들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을 맞잡거나 포옹하며 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맞잡은 손이 닿는 경계, 끌어안은 몸통이 닿는 표면은 여전히 은근한 위태로움을 품고 있어 서로 이질적인 것들의 완벽한 화해와 환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가능한 환대를 위하여 ● 데리다에게 있어 환대는 조건적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로 나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 하는 환대는 조건적 환대이다. 무조건적 환대가 가능한가? 그는 불가능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조건적 환대를 꿈꾼다. 이러한 환대가 가능한 공간은 경계이다. 온전히 한쪽으로 치우진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경계에 서서 그곳으로 다가오는 타자, 손님이 제시하는 물음, 즉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냐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친구가 아닌 적으로서의 손님을 환대함으로 내가 소멸된다면 이 또한 환대가 아니며, 적을 환대함으로 생성의 길로 나갈 수 있을 때 무조건적 환대가 가능한 것이 되겠지만 주지하다시피 이는 불가능하다. 작가를 사로잡고 있는 강박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그의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하면서 그인 동시에 아니고, 나를 구성하는 나 아닌 것, 친구이자 적인 것들과의 화해이며, 그것들을 '무조건적으로 환대'할 수 있는 가능성의 탐구가 지금까지의 그리고 앞으로 도래할 작업의 모습이리라 짐작해 본다. ■ 김재도
Vol.20150302h | 양정화展 / YANGJUNGHWA / 梁瀞化 / painting.draw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