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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1206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30pm / 월요일 휴관
즈스위 갤러리 JE SUIS GALLERY 서울 강남구 신사동 588-1번지 Luminous B1 Tel. 070.4685.7029 www.jesuis-gallery.com
검은 흔적, 양정화의 구작과 근작들 ●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물음에서 출발한다. 양정화의 근작들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바, "목탄과 콘테, 그리고 오일바로 그린(또는 칠한) 저 '검은' 형상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질문에 답하는 첫 번째 단계는 그 검은 형상들로부터 '여자', '남자', '고양이', '개' (…) 등의 이미지를 찾아내는 단계다. 하지만 작업은 첫 번째 단계에서 중단될 수 없다. 그 독특한 형상들, 흩뿌려진 점들, 불안한 구도는 그 이미지들 이면(裏面), 또는 너머에 다른 의미 내지는 심층 의미로 지칭할만한 것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 년 전 발표한 논문에서 양정화는 그 이면에 '어떤 외상적 기억들', '자신의 과거 경험 중 특정한 하나의 사건'이 존재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전시의 제목으로 채택된 '검은 흔적들 black traces'이란 이 외상적 기억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물론 나는 양정화가 말하는 '외상적 기억', '특정한 사건'의 내용을 알지 못할뿐더러 그 내용을 세세하게 서술해 밝힐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그 '외상적 사건'의 구체적 내용보다는 그것을 이 작가가 다룬 방식에 흥미를 느낀다. 이 작가가 자신이 경험한 외상적 사건을 이미지 수준에서 표상하는 방식, 절차에 그 '검은 형상들'의 심층의미가 자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심층의미에 접근하려면 근작들을 잠시 떠나 이 작가의 예전 작업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Untitled」(2007)로 명명된 작품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기로 하자. 이 작품은 근작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검은 형상을 제시한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표현을 빌면 "여인의 하반신처럼 보이는 살덩어리가 화면 중앙에 있고 그 주변에는 몸의 일부분과 주변 환경이 융합된 채 털로 싸여 있는 형상"이다. 이것은 꽤 강렬한 이미지다. 그것은 일단 모든 에너지를 방출한 자의 '나른한', 또는 '늘어진' 상태를 보여준다. '팔'과 '다리'로 보이는 것들은 길게 축 늘어져 최소한의 견고함도 유지하지 못하는 모양새다. 어떤 의미에서 여기서는 최소한의 긴장, 아니 어쩌면 긴장 자체가 부재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몸에서 '부스스' 떨어져 나간 건조한 '작은 털들'의 이미지는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 이렇게「Untitled」(2007)는 에너지가 방출되고, 긴장이 감소되는 순간을 제시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에너지와 긴장의 감소에서 촉발되는 '쾌(快)'의 극대화를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에너지와 긴장의 감소가 '쾌(快)'를 촉발한다고 해석하는 순간 그에 반하여 비집고 들어오는 세부가 있다. 그 세부란 특이하게 또는 엉뚱하게 부풀어 올라 마치 독자적인 유기체로 보이기까지 하는 둔부와 허벅지의 이미지다. 그 부풀어 오른 것은 여전히 방출되지 못한 에너지가 존재하며 긴장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팔인지 다리인지, 아니면 몸통인지 파악되지 않는" 이 둥그런 덩어리들은「Untitled」로 명명된 다른 작품들,「Roll」(2006),「Illusion 0802」(2008)로 명명된 작품들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다. 그 기이한 형상들은 쾌와 연관된 긴장의 감소보다는 차라리 불쾌와 연관된 긴장의 증가를 유발한다. 즉 여기에는 불필요한(축적된) 것을 완전히 배출한 데서 오는 쾌(아리스토텔레스가 카타르시스라 칭했던 배설의 쾌)보다는 그것을 완전히 배출하지 못한데서 오는 어떤 찜찜함, 불쾌가 보다 두드러진다.
당시 양정화가 이렇게 불쾌를 유발하는 이미지를 여러 작품에서 반복해서 제시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반복강박에 대한 프로이트의 언급이 해석에 도움을 줄 것이다. 그에 의하면 쾌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반복적 표상작용이 존재한다. 불쾌한 경험의 계속적인 반복이 그것이다. 계속되는 악몽,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나쁜 기억은 그 사례들이다. 그것은 외상이 유발한 신경증의 증후다. 하지만 그 증후가 자아를 지켜준다. 다시 프로이트를 인용하면 "외상적 신경증 환자의 꿈에서 반복강박은 충격적인 경험으로 야기된 내부의 강렬한 흥분을 길들이고 완화시킴으로써 의식에 의해 수용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무의식의 기제"인 것이다. 어쩌면 참기 어려운 것은 계속적인 반복을 통해 사라지거나 완화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양정화의 예전 작업들은 자신이 '검은 흔적'으로 지칭한 외상적 기억을 자신의 몸과 연루된 특정 형상들에 반복적으로 투사하는 방식으로 그 외상적 기억의 흥분과 고통을 완화 내지는 제거하려는 제스쳐로 볼 수 있다. 그 제스쳐가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더 이상 긴장도 없고 불쾌도 없는 상태' 내지는 '마음속에 자리잡은 고통스러운 흥분의 소멸'이었을 것이다. ● 요컨대 그것이 쾌를 지향하든, 아니면 외상적 기억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든 당시 양정화에게는 긴장을 제거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런데 그 궁극의 수준, 곧 '더 이상 긴장도 없고 불쾌도 없는 상태'란 어떤 상태인가?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그것은 죽음의 상태고 그러한 상태를 추구하는 것은 '죽음 충동'이다. 그 충동을 계속해서 밀고 나가면 그것은 자기 자신(유기체)을 파괴하고 무기물의 상태(죽음)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양정화에 적용시키면 외상적 기억을 자신의 몸에 투사하는 방식으로 외상의 고통, 흥분에 맞서는 식의 작업방식은 어느 때부턴가 자아가 소멸되는 지점을 향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자아의 소멸을 피하면서 긴장을 완화, 제거하는 일이 가능한가? 한쪽에서 세포가 죽을 때 다른 쪽에서 세포가 생겨난다는 것은 생의 진리다. 즉 죽음충동이 지배적일 때 자아보존충동, 또는 삶의 충동이 반작용한다. 가능한 우회로가 있다. 이를테면 내부를 향하는 죽음(파괴)충동을 외부로 향하게 하는 것은 하나의 가능한 대안이다.「검은 흔적」에 제시된 '여자', '남자', '고양이', '개' 등의 이미지-대상들은 예전 작업에 지배적이던 작가 자신의 신체 이미지의 대체물일 수 있다. 이렇게 새롭게 등장한 이미지들은 대부분 파편으로 절단되거나 검게 뭉뚱그려져 고정된 형태를 잃고 있다. 이것은 내부로 투사되던 파괴충동이 외부대상으로 투사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사례다. 그러나 외부대상들의 이미지는 자신의 신체 이미지에 비해 항상 작가가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는 부분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는 그것을 내부에 투사할 때는 그리 중요하지 않던 현실의 대상과 현실의 제약이 보다 중요하게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작동할 것이다. 근작들에서 그러한 제약은 매우 사실적으로 재현된 갖가지 것들로 나타난다. 그렇게 죽음충동과 삶의 충동 사이에서 창출된 독특한 긴장은 예전과는 다른 독특하고 새로운 활기를 얻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이 작업들은 어떻게 변모할까? 그것은 몇 년 전에 이 작가가 언급한 바 들뢰즈가 말한 '-되기'의 선을 그리게 될까, 아니면 라캉을 따라 '대상과의 관계에서 계속 미끄러지는 순환 자체에 만족하는' 형태가 될까? 적어도 지금은 이 작품들에서 죽음충동과 삶 충동, 내부와 외부, 주체와 대상이 분리 불가능한 수준에서 상호 얽혀있으며 그러한 얽힘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한 예술적 성취라고 해야 한다. 프로이트는 플라톤의『향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데 지금의 양정화 작업에 잘 어울리는 구절이다.
피클을 만들려고 반으로 쪼개 놓은 마가목나무 열매와 같이 (이들을 둘로 가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갈라진 연후에 "인간의 두 쪽은 서로가 다른 반쪽을 갈망하면서 함께 모였고 하나가 되려는 열정으로 팔을 서로에게 휘감았다." (S. Freud, 윤희기, 박찬부 역, 「쾌락원칙을 넘어서」,『정신분석학의 기본 개념』(열린 책들, 2006), p.335) ■ 홍지석
Vol.20131207j | 양정화展 / YANGJUNGHWA / 梁瀞化 / painting.draw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