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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24시간 관람가능
스페이스 이끼 SPACE IKKI 서울 성북구 성북로23길 164 www.spaceikki.com
절대적으로 절대적인 것에 실패하기-쓰고 싶지 않지만 써야 할 말...사랑 ● "그녀는 손등으로 눈을 비벼대곤 했다. 반은 밤색, 반은 검은색,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눈. 그 수면 위로 빛 한 줄기 올라오지 않았다. 잔물결 하나 일렁이지 않았다. 그 시선은, 항상 그랬던 것 같은 시선은 내게는 심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심연이라 불렀던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동물들도 그녀 같은 눈을 가졌다. 똑바로 보는, 뒷생각이라곤 전혀 없는, 어떤 후경도 없는, 무한한, 심각한, 속일 수 없는, 곤두선, 불안에 찬, 빨아들일 것 같은 눈, 그녀는 앉기 전 무릎을 구부렸다." (파스칼 끼냐르「심연들」) ● 그 눈이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작가의 눈인지 피서라의 눈인지, 작품과 이 글을 쫓고 있는 당신의 눈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 보다 조금 더 명확한 것은 작가의 눈은 도시와 댐을 바라 봤고, 나의 눈은 댐과 더 이상 댐이 아닌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며, 당신의 눈은 도시와 댐과 더 이상 댐이 아니라고 하는 것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다. ● 최준경의 작품을 보고 나서 글렌캐년댐을 찾아보았다. 사진만으로도 그 육중한 존재감을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실제로 본다면 아마도 '육중'과 '거대'라는 단어의 참 뜻을 알 수 있으리라. 다시 작가의 작품을 마주했다. 거기에는 육중과 거대함과는 거리가 먼 무언가가 있었는데, 따뜻함이나 차가움과 같은 어떤 심상으로 표현하기에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 스스로 작가노트에서 밝히고 있듯, 그가 단순히 댐을 모사한 것이 아니었기에 받을 수 있는 인상이었을 듯싶다. ● 작가는 절대적이고 완벽한 선함의 추구를 인류의 삶에 대한 열망이라고 표현했다. 절대적이고 완벽한 선함이라…… 재밌는 표현이다. 그는 그림을 완성하는데 몇 가지 조건을 내걸었는데, 스스로 그 조건들에 실패해야 성공한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이 그것이다. 절대적으로 절대적인 것에 대해 실패할 것이라는 최종 전제가 앞선 드로잉의 조건들을 무너뜨리고 실패의 성공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왜 실패로 귀결되는 작품을 만든 것일까? 분명 전제들을 지키기 위해 쉽지 않은 선을 그었을 것이며, 들었던 붓을 여러 번 내려놓았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그림을 완성하는 내내 마지막 전제를 '절대로'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최종 전제를 염두 해 두고 그림을 완성시켜 나갔다면 앞 선 전제들은 그저 위선이 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절대성을 위해 최선의 선을 긋고, 최선의 명암과 채색을 가했을 때 작가가 직면하는 결론은 절대성에 대한 실패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 실패로 귀결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성공의 시작이며,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실패의 패기이다. 그 과정이야말로 인간의 아름다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인터넷에서 여러 장의 글렌캐년댐 사진을 보았을 때, 그것은 마치 인공물이 아닌 협곡과 함께해온 또 하나의 자연 같았다. 실제로도 콜로라도 강 상류에 이 댐을 건설하면서 파월 호가 생기게 되었다고 하니 댐은 사람들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착각할 만한 인공적인 자연을 만들어 낸 셈이다. 완전히 인공적이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자연적이지도 않은 그것은 최준경의 작품과 닿아 있다. ● 작가에 의하면 인류의 절대성을 향한 프로젝트는 언제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성공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LOVE. 갑작스런 훅이 가슴을 강타한 느낌이다. 서늘하게 서스펜스를 달리다가 허무한 결론을 맞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실은 작가가 도시, 시멘트, 댐 등 인공적인 재료로 만든 거대하고 육중한 건축물에 매료된 계보를 따라가 보면 그 안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나오는 이 사랑이라는 말랑한 단어를 내가 쓸 줄은 몰랐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전혀 말랑하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은 그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대목에서 요즘 할 말이 있다. ● 며칠 사이 내게는 온갖 사건이 벌어졌다. 4살 아들의 유치원 추첨 전쟁에서 모두 실패했으며, 손자의 유치원 추첨을 기원하러 간 엄마의 교통사고와 아흔을 훌쩍 넘긴 외할머니의 죽음이 그것이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은 참으로 희한하다. 어릴 적 나는 우리엄마는 어떻게 엄마의 엄마와 떨어져 저렇게 잘 살 수 있을까, 만약 우리 엄마가 죽으면 나도 살 수 없겠지, 엄마가 죽으면 나도 옆에 같이 누워야지 하면서 그 생각을 엄마에게도 말해주곤 했다. 사랑을 확인 받는 것이다. 그런데 내게 남편이 생기고 부모가 되면서 나는 더 이상 엄마에게 사랑을 확인하지 않은 것 같다. 대신 아이의 옷을 입혀 주면서, 얼굴에 로션을 발라주면서 아들에게서 나의 사랑을 재차 확인받곤 한다. ● 엄마는 그 사고로 수술을 받게 되었고, 그 날 새벽 외할머니는 엄마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가족들은 수술 전 엄마가 쇼크를 받을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수술 후 할머니의 죽음을 전했을 때, 엄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않았다. 대신 힘겹게 손을 뻗어 단발로 싹둑 자른 내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넌 긴 머리가 예뻐, 다신 자르지 마."라고 말할 뿐이었다. 엄마는 할머니의 죽음보다 딸의 어색한 헤어스타일이 속상했고, 나는 엄마의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할머니의 부재로 한동안 어린이집에 혼자 늦게까지 남아있어야 할 아들을 생각하며 속상했다. ● 사랑 또한 절대적이지 않다. 물론 사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총량은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다. 댐도 언젠간 고여 있는 엄청난 물을 한순간에 흘러 보내는 것처럼 우리 또한 그러하다. 나는 도덕적으로 완벽하려는 콤플렉스가 있다. 그러나 나는 절대적으로 선하지 않다. 그것을 알기에 강박적으로 선해지려고 애를 쓴다. 절대적인 것에 대한 실패, 실패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 애쓰는 모든 행동들이 실은 성공인 것이다. 최준경이 말하는 실패로 마무리 하는 성공. 그의 그림을 보라, 성공인가 실패인가? ● 나는 간혹 엄청난 스케줄을 세우고, 열심히 달리다가 한 순간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져 아무 예고도 없이 그만두는 못된 습관을 발동할 때가 있다. 최준경의 작품을 보고 아래처럼 들뢰즈의 글귀에 열심히 밑줄을 쳤지만 결국은 그의 텍스트는 그대로의 것으로 남겨둘 것이다. 작가와 당신의 몫으로.
"각각의 질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른 질서들의 조건이다. 우리는 비대칭의 요소들을 갖추고 불균등한 크기의 질서들을 거느리고 있는 하나의 체계를 신호라 부른다. 그리고 그런 체계 안에서 발생하는 것, 간격 안에서 섬광처럼 번득이는 것, 불균등한 것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어떤 소통 같은 것을 기호라 부른다. 예술에 있어서의 반복. 이는 규칙성으로 이해되는 자연의 경계선에 대한 반복적인 장식 예술과 법칙과 더불어 깨질 수 있는 예술적 자유를 말한다. ● 반복이란 것은 그야말로 자신을 구성해 가는 가운데 스스로 위장하는 것, 스스로 위장함으로써만 자신을 구성하는 어떤 것이다. ● 죽음-충동은 우리가 쓰고 있는 각각의 가면에 내재하는 것으로서, 그로부터 다음 가면으로, 그리고 다시 다음 가면으로 움직이려는 충동이다. 우리는 가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다른 측면들을 다른 방식으로 다시 또 다시 연극하려는 충동 때문에 반복한다. ● 기억에 의존하는 개념들은 어떠한가? 이 개념들도 역시 봉쇄될 수 있는가? 기억에 의존하는 개념들은 원래의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 사이의 간극 때문에 봉쇄될 수 있다. 기억된 사물/사태에 대한 개념은 우리가 기억하는 유일한 단 하나의 사태에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기억이란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원래의 사태와 기억의 일치는 항상 깨지거나 막힌다. 이는 사건을 경험하는 의식과 이 의식을 기억하는 의식 사이의 차이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기억의 속성이다. 사건을 경험하는 의식의 직접성은 의식을 기억하는 의식에 의해 자유롭게 조작되기 쉬운 대상이 된다. ● 의식적인 행위는 그와 모순되는 다른 방식으로 행해지는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의식적이라기보다는 습관적인 행위를 통해 법칙을 따른다." (제임스 윌리엄스「들뢰즈의 차이와 반복-해설과 비판」) ● 어두워지면 그의 그림에서 별이 반짝일 것이다 / 시인들이 행간을 비우고 / 소설가들이 문단을 나누듯 / 그의 그림들이 / 저마다의 위치에서 / 또 하나의 의미를 생성할 것이다 / 하늘거리는 실크위로 부드럽게 표현된 그림이 / 나의 심상을 자극했다 / 댐은 이 순간 아름다웠다 ■ 피서라
Ⅰ. 절대적이고 완벽한 선함의 추구는 우리 인간사에서는 무모한 시도인지 모른다. 신의 경지와도 같이 세상을 창조하고 완벽함에 이르려 하지만 창조도, 완벽도 인간의 영역이 아닌 까닭이다. 저 도시를 보라. 인간이 꾸민 다리, 도로, 백화점, 아파트들을. 모든게 절대적으로 선하다거나 악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절대성을 추구하려는 욕망과 살고자 하는 욕망들이 충돌한 부산물들은 한강줄기를 따라 말없이 흐른다. 그것을 나는 보았다. ● Ⅱ. 작년부터 나는 댐을 그리고 싶었다. 도시 풍경속에서 여러 인간상을 포착하려던 지난 작품의 다음 선상에서 나는 오로지 댐을 그리고 싶었다. 사실 이전부터 내게 댐은 기억속에 아련히 존재하는 먼 조상같은 존재였다. 그 연유는 어릴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홉살 때 쯤이었나, 토목건축가이셨던 아버지는 댐 공사를 감독하시러 가족을 서울에 남겨두시고 지방으로 떠나셨다. '댐 따위를 대체 왜 지어야 할까?'어린 마음에 가족이 한데 모여 살지 못하는 슬픔에 애꿎은 댐만 미워했다. 하지만 몇년이 지난 어느날 전주로 내려가 아버지가 감독하셨다는 댐을 보게 되었고, 나는 평생 간직할만큼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거대한 시멘트의 육중한 질량이 주는 위대한 광활함은 존경 그 자체를 내게 가르쳐주었다. '존경: 자연과 그 자연을 다루는 인간, 아버지, 시멘트의 엄청난 질량, 도면을 현실로 만드는 현대 기술, 수많은 장비, 노동자들의 인내, 집념, 토목의 신비로움, 댐 안에 덮힌 알수없는 그 무엇 등등...' ● 그러던 중 작년에 나는 미국 아리조나주의 글렌 캐년 댐(Glen Canyon Dam) 앞에 설 기회를 갖게 되었고 어릴적의 그 감정이 생생히 떠올랐다. 이 한개의 댐 속에 투입된 시멘트의 질량은 경부고속도로의 그것과 맞먹는단 설명에 놀랐고,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 대담히 자리잡은 댐의 그 우아한 자태란... 붉은빛 사이로 시간도 잊게 만드는 거대한 송전탑 행렬 마저 라스베가스를 밝혀야 하는 댐의 임무를 마지막까지 수행하는 전사들 같았다. 몇겁을 우두커니 버텨온 저 바위보다 더 굳건하게 둥지를 틀고 그 안에 물을 품은 댐... 이렇듯 20여년만의 댐의 속살과 조우하게 된 순간, 나만 아는 존경 가득한 환희로, 또 은밀한 의식 저편의 숭배의 감정으로 댐을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존경과 찬사가 그저 댐 하나만의 가치 때문은 아닐 것 같았다. 거듭 스스로 물어 거대한 감정의 파장의 진원지를 찾고자 하였다. 나의 그림은 그것에 대한 모호성을 동반한 질문이자 대답이리라. ● Ⅲ. 도시와 댐을 화폭에 표현하기 위해 내게는 몇가지 스스로 내건 조건이 있었다. 1.절대적으로 선한 구도와 형태를 추구할것. / 2.절대적으로 완벽한 이분적 구도를 추구할것. / 3.절대적인 진실 속에서 타자와의 관계성을 고려할것. / 4.그리고 절대적으로 '절대적'인 데 대해 실패할것. ● 이처럼 절대성의 그림을 실패로 마무리하며 성공하는 것이다. 그림은 때때로 기쁨으로- 슬픔으로, 빛으로-어둠으로, 시끄러움으로- 고요함으로, 채운 곳으로- 빈 곳으로 끊임없이 순환하고 대화하며 순간순간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모든것이 성공지향적이고 완결을 위한 상태라면 지금 이순간 내가 움직이고 창작하는 기쁨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 Ⅳ. 인류가 세대를 내려오며 절대성에 관해 단하나 성공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불완전한 인간이 하는 완전한 사랑이다. 부모-자식간의 사랑, 희생을 감내하면서도 할수밖에 없는 사랑, 원수마저 마침내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랑이란 것을 할때 인간은 감히 신의 절대성의 수준에 이를수 있다는 것이다.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멀리 떨어져 도시를 밝히는 댐의 구조에서도 어떠한 절대적 사랑의 흔적를 발견하는 것 같다. ● 다시말해, 우리는 결코 언제나 늘 실패하지는 않았다. 갈등과 대립속에도 대를 내려오며 축적된 사랑 에너지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존재하고 우리를 감싸 안는지 모른다. 사랑이 물질로서 증명되지 않듯이, 그림 속 무표정한 풍경 어딘가에도 사랑이 존재하기를... 넉넉한 할머니의 사랑처럼 댐이 품은 물에서 그 흔적이 아스라이 피어나기를, 나는 소망해본다. ■ 최준경
Vol.20151130f | 최준경展 / Joon K Choi / 崔埈京 / installation.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