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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1105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00pm
갤러리 마노 Gallery MANO 서울 서초구 서초동 1451-95번지 예전빌딩 4층 Tel. +82.2.741.6030~1 www.manogallery.com
산을 열치다 ● 조인호는 산을 그린다. 특히 지난 2007년 첫 개인전 이후 줄곧, 혹은 주로 그러하다. 산을 그리는 이유는 그야말로 산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거기란 교과서일 수도 있고 삶의 현장일 수도 있다. 전시를 앞두고 작가와 나누었던 제작 속심으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그에게 산은 삶의 생활풍경이자, 몸과 맘으로 직접 확인한 심리적 속산을 의미하고 있어 보인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관조적인 시선과 관성적인 태도로 내려다 본, 또는 산의 물리적 양괴감을 전통, 혹은 나름의 전용 준법으로 소개하려는 다분히 의도적인, 흔한 제작강박증에 사로잡힌 도식적 산은 아니다. ● 학교가 산자락에 있었고 전업으로 화단에 나와 젊은 모색을 할 때도 산은 곁에 있었다. 작업이 풀리지 않거나 미래와 삶의 당대 현실에 대한 고민이 깊을 때 즐겨 찾은 곳도 산이었다. 결혼 후 자주 찾게 된 처가 역시 독특한 화산지형을 가진 산의 자락에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산행을 즐기고 산을 일상처럼 접하다보니 산은 뭔가 그동안의 맺힌 속마음과 답답함을 하나둘 고해하듯 풀어낼 수 있었던 가족 같은 존재이자, 또한 감사의 마음으로 보듬어 안아야하는 어르신이자 스승, 친구였던 것이다. ● 오늘도 조인호는 매일처럼 산에 오른다. 몸과 맘으로 산의 내외를 만난다. 죽지와 순지 등에 모필로 떠낸다. 지필묵이라는 전통방식에 따른, 별무리 없이 펼쳐 보이는 먹그림이다. 따라서 그의 산그림은 서구의 기름그림이 주는 산의 인상과도 일정한 다름과 차이를 보인다. 분명한 물리적 울퉁불퉁함을 다투어 자랑하거나 흔한 원근법에 의해 존재의 선후를 정확하게 구분 지으려는 과장된 수이감이 없다. 그저 담백하다. 물처럼 구석구석 조용하게 산의 기운이 스미어 있어 번들거리지 않는다. 작가의 평소 성격을 닮았다.
조인호의 산그림은 보이는 대로 그린 것도 아니고 아는 대로 그린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아리스메틱(arithmetic)하게 산술적으로 풀어 놓거나 산을 밟은 순서대로 순차적으로 펼쳐 놓은 답사기록도 아니다. 담아내는 방식과 풀어내는 방식, 그 순서가 자유로이 결합된 심리적 기행(紀行)으로서의 화면이다. 각기 다른 시공과 시점에서 만났던 이야기들, 각기 다른 시공에 자리하고 있던 존재들을 랜덤하게 호출하여 한 화면에 적절한 호흡으로 병치시킨, 이른바 시각적 앗상블라주 화법(話法)으로 주고받은, 만화경 같은 심리지형이다. ● 누차의 반복된 산행에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어준, 산이라는 친구의 따스한 산심(山心)으로 물들어버린 조인호의 속심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는 형국이다. 매순간마다의 만남의 감흥이 소용돌이치듯 중첩된 그의 산수(山水/山樹)풍경은 산과 벗한 이후의 내밀한 경험과 이야기들을 반추하듯 호출해서 부려 놓은 감정의 덩어리이자 집합체에 다름 아니다. 발로 직접 밟고 몸으로 만났기에 가능한 결과물들이다. 정해진 시점, 고정된 시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적 시간과 공간, 작가의 심리적 이동시점이 적용되고 강조된 살아 꿈틀거리는 산풍경이다. 따라서 시점의 시간차와 그것이 적용되기 시작한 시발을 찾아내어 그로부터 전체지형을 이해하고 세부지형을 파악해 들어가는 식의 감상방식은, 필요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무의미할 것이다. ● 데포르마시옹(déformation)이 강조된 조인호의 독특한 심리지형은, 일견 마음으로 담은 산의 내적 기운 하나하나를 붓과 먹이라는 바늘과 실로 이어나가며 독특한 전체를 만들어나가는 파노라마형식에 다름 아니다. 또는 물과 기름의 반발 특성을 활용한 일종의 마블링(marbling)기법으로 떠낸 듯한 산의 형상과 그 여백의 생동감을 눈앞에서 보는 듯하다.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리저리 서로 얽히고설키지만 각각의 성결은 간직한 복잡한 형세다. 속세인의 적응과 부적응심리가 양립하는 착잡한 기운을 그때그때마다의 심리적 산세를 통해 달래고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조인호의 산그림에는 화자(畵者)로서의 자신과 점경인물로 타자(他者)화된 모습 그리고 산의 속살이라는 자연이 조우한다. 각기 따로 작동하거나 충돌하기보다는 하나된 열린 풍경으로 어우러진다. 휘어지듯 힘 있게 펼쳐진 산그림. 이는 작가의 고정되지 않은, 움직이는 심경(心景)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오늘도 그는 닫혀 있는 산과 산수풍경을 몸과 맘으로 힘껏 열친다. 태고(太古)적, 나아가 천지창조 당시의 고요하고 힘찬 느낌이랄까. 무언가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형국이다. 질풍과 고요가 공존하는 풍경이다. ● 골과 뫼의 결을 파고드는, 마치 갯바위에 부딪는 파도의 느낌과 질감, 소리가 전해지는 듯하다. 결이 눈으로 만져지고 이들의 소리가 메아리치는 살아 있는 산풍경이다. 혹은 바람소리, 혹은 산이 우는 소리일 수도 있다. 무언가가 바위와 나무 사이사이를 짐짓 파고들며 울리는 다양한 장단고저가 들린다. 화면 구석구석을 맴돌며 공명한다. 진동음이 가득하다. 골짜기마다 깊숙이 스며들었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한다. 불협화음을 애써 배제하지는 않는다. 모노톤의 장중한 느낌으로 밀려갔다 밀려오는 원초적 욕망과 금욕적 의지의 비(非)물질적 기운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다. ● 심히 휘어진 산수풍경, 그것은 전통의 신성한 기운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맹목적 굴광(屈光)이라기보다는 서로가 하나 되는 과정에서 빚어내는 다양한 협화음과 불협화음, 자연스런 공존에의 지향을 인정하는 지성적 기운일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조인호의 화면에는 부감을 중심으로 한 고원, 심원, 평원의 각기 다른 시점이 매력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산의 복합적인, 그러나 분명한 공존에의 지향은 방향을 알 수 없는 광대한 파노라마식 화면으로 펼쳐지거나, 마치 오랜 시간 묶어 놓았던 기억 속 희로애락의 두루마리를 이리저리 풀어 펼친 듯 마냥 자유롭기만 하다. ● 조인호의 산은 일견 어지러워 보이지만 평범하다. 올려다봐도 내려다봐도, 가까이 있던 멀리 있던 그의 산그림은 그가 만난 삶의 일반적 풍경에 다름 아니다. 잘난 사람 잘난 대로,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제각기 살아가듯 화면 속 지형들은 각기의 생김새를 자랑하며 꿈틀거리고 있다. 작가는 온몸으로 산을 열어 제치면서 조우한 이런저런 감정을 솔직하게 풀어 놓았다. 이러구러 살아가는 삶의 순환구조를 담백한 농담으로, 흡사 조물주의 호흡으로 펼쳐 놓았다. 때론 휘어지고 말리고, 풀어지듯 접히면서 꿈틀거린다. 변형된 방식에 주목하기보다는 심리적/물리적 재구성의 동인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다. 산은 항상 모두에게 열려 있었다. 어쩌면 그것을 보는 사람이 마음을 닫고 지내온 것뿐이다. 산을 밟고 또 밟으며 돌고 돌아가며 이렇듯 세우고 비워낸, 그리하여 서로의 속살을 활짝 열쳐낸 조인호의 산그림이 반가운 이유다. ■ 박천남
Vol.20151106f | 조인호展 / CHOINHO / 趙寅浩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