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ght, the Narrative of Absence

정보영展 / JEONGBOYOUNG / 鄭寶英 / painting   2015_1104 ▶ 2015_1124 / 일, 공휴일 휴관

정보영_Another view point_캔버스에 유채_227.3×162cm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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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1104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09:30am~06:30pm / 일, 공휴일 휴관

이화익 갤러리 LEEHWAIK GALLERY 서울 종로구 율곡로3길 67(송현동 1-1번지) 1,2층 Tel. +82.2.730.7818 www.leehwaikgallery.com

빛과 부재의 서사 - 정보영 근작전 ● 정보영이 빛을 주제로 다룬 지도 십 수 년을 헤아린다. 그간 다루어온 빛은 숭고와 시간에 관한 것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그 중심에는 빛을 받아 사물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비의(秘儀)의 정황이 있는가 하면 이를 빌려 작가가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여운은 물론 서사를 잠재시키려는 충동이 깔려있다. 이는 빛을 연구하는 물리학자의 시선(looking)을 역으로 활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 일환으로 작가는 빛과 어둠을 해석하는 자신의 응시(凝視, gazing)의 동기와 심의를 내재시키려는 치열한 시도를 경주해왔다. 그간 정보영이 다루어온 빛은 현실로 존재하는 사물의 하나라는 걸 강조하기 위한 건 결코 아니었다. 그건 빛을 담아내기 위한 알베르티의 무기적 공간을 위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작가가 다룬 빛이란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하는 지를 알 수 없는, 이를테면 숭고한 미스터리의 공간, 아니면 시간의 유동성과 중첩이 만들어내는 불가사의한 세계를 그리려는 데 있었다. 그럼에도 얼핏 보기에 정보영은 마치 광학자가 빛을 실험하는 매너와 경쟁하듯 살아왔고 또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실내와 실외를 막론하고 촛불과 태양, 아니면 야광 같은 광원을 그린다든지, 열어놓은 창과 실내에 세워놓은 사다리, 수직기둥, 크고 작은 칸막이와 테이블, 벽면을 둘러싼 실내 조건들 하며, 창 너머에서 어두운 실내로 태양이 쏟아지고 옥외의 풍광이 아름다운데, 켜놓은 촛불의 크기와 위치 같은 객관적 조건들을 주요 모티프로 등장시킨 게 이러한 오해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실상 작가에게서 이 모두는 자신의 화면을 구축하기 위한 빛의 필요조건들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것들은 작가가 자신의 리얼리즘을 구축하기 위해 애지중지했던 품목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잘라 말해, 이것들은 또한 빛을 빌려 자신의 '서사'(敍事, narrative)를 말하기 위한 데 한정되어 있었다는 걸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 일환으로 정보영이 빛의 정황을 빌려 현대인이 물질사회를 살며 겪는 상실의 애환과 그들의 소비중심주의가 치러야 할 댓가로서 응당 치러야 할 '부재'(不在, absence)를 말하려는 데 있었음을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정보영_Nostalgia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5
정보영_Transparent shadow_캔버스에 유채_80.3×100cm_2015

'부재의 서사'(narratives of absences)는 오늘날 물질사회가 포장하고 있는 속살이자 그 실상이다. 일갈해서, 우리 모두가 속물주의적 탐욕에 빠져 초래한 아이러니와 역설을 에둘러 비판하는 21세기 리얼리즘의 최대의 화두라 할 수 있다. 이는 현실적으로만 존재하는 것들을 서술하고자 하는 이전의 낡은 리얼리즘이 다루었던 것과는 대척의 것이다. 부재의 서사는 '현존의 서사'(narratives of existences)에 대해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고 잘라 말할 수 있다. 이는 소비사회의 제 증상들을 서술하는 혁명적 개념이 아닐 수 없다. 소비사회에서 소비란 말 그대로 실재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무화하는 활동의 이름이다. 이 활동을 리얼리즘을 빌려 서술하기 위한 데서 부재의 서사가 요청된다. 요청(要請, demand)으로서 부재의 서사는 현대 리얼리즘이 과거의 낡은 리얼리즘으로부터 차별화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다. 이는 생산자본주의 시대의 중심개념인 실재를 대치할 '시뮬라크르'(simulacres, '모상')와 한 짝패를 이룬다. 아니, 이 경우 어김없이 등장하는 화두가 부재이자 부재의 서사다. 부재가 실재를 압도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상사가 되고 있는 현실을 앞에 하고, 일찍이 장 보드리야르는 실재가 장열하게 죽었음을 극적으로 말한 바 있다. 그는 앤디 워홀의 「마리린의 입술」을 지칭해서 그녀가 이미 죽었음을 애도한 바 있다. 이에 고무된 그는 진솔한 리얼리스트들이라면 그는 자신의 존재이유의 필요중분조건으로서 부재의 서사를 말함으로써만 오늘의 리얼리스트로 자부할 수 있다는 걸 강조했다. 여기서, 부재와 부재의 서사는 실재를 보상하기 위한 대안으로서의 등장하였다. 정보영은 일찍이 2005년 이 정황을 '촛불은 빛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만 이를 위해 자신을 둘러싼 어둠의 깊이를 감당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건축물 바닥에 드리운 부재의 얼룩들을 드러낼 수 있다. 이렇게 하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만큼의 어둠을 감싸 안아야 한다'(「노트」 2005에서 번안)고 썼다. 이 때부터 지금까지 작가가 그려온 빛은 그녀가 소비사회를 다루기 위한 촉매였고 이 때문에 실재로서의 빛(촛불)이 아니라 시뮬라크르로서의 빛을 그리는 데 올인 할 수 있었다.

정보영_Transparent shadow_캔버스에 유채_80.3×116.8cm_2015
정보영_Transparent shadow_캔버스에 유채_112×194cm_2015

정보영의 회화에서 빛(광원)은 다시 말하거니와 실재하는 빛이 아니다. 이 빛은 그녀의 서사적 맥락 안에서만 생명력을 갖는, 요컨대 시뮬라크르로서의 빛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녀가 또 다른 차원의 빛의 서사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다. 근자의 「작업노트」 (2015)가 적고 있는 건 부재의 서사는 이를 보다 더 치열화하고 있다. 이번 개인전에서 정보영이 추가하고 있는 빛의 시뮬라크르는 크게 두 가지다. 유리구(球)와 유리병(甁)이 그 한 무리라면, 의자와 사다리와 계단은 다른 한 무리다. 먼저 유리구와 유리병은 빛의 투과와 산란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대리물로 차용되었다. 작가는 이를 현대 사회의 부조리(absurdity)를 서사화하기 위한 알레고리로서 등장시켰다. 유리구와 병을 알레고리로 해서 「투명한 그림자」로 명명하고 있는 근작들은 작가가 현재를 살면서 겪는 분열증적 사회병리 현상들을 서사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 보이기 위해 작가는 우리의 삶을 정각(正角)으로 규격화하고 있는 무생명한 실내 공간을 상징적으로 해체하는 데 착수한다. 빛이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고 파상상태를 야기하는 유리구와 병을 의도적으로 작품에 도입한 건 이 때문이다. 이는 현대사회의 끊임없는 유전과 변전을 앞에 하고 부재의 서사를 발하기 위한 시뮬라크르의 전략의 일환이 아닐 수 없다. 이를 말하기 위해 작가는 병과 유리구를 등장시켰다. 「투명한 그림자」의 연작 7점이 이를 말해준다. 구체적으로 말해, 이 작품들에서 작가가 힘주어 말하는 건 "유리구를 등장시켜 유리구가 야기하는 빛의 불규칙한 반사와 산란의 유희다. 이는 직선으로만 존재했던 빛과는 다른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응시를 허용한다. 모든 빛이 하나도 빠짐없이 작은 유리구에 포획되고 응집되었다가는 파상적으로 반사하는 빛 무리는 우리가 소홀히 했던 또다른 시선을 자극한다"(「노트」 2015에서 번안)고 하는 말이 이를 시사한다. 작가는 이를 빌려 고단한 현대인이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조직의 힘 안으로 빨려들다가는 이내 밖으로 퇴출되는 사회적 비극을 서사화한다. 이른 바, 현대인이 겪는 시간의 덧 없음을 유리구와 병의 시뮬라크르를 빌려 이야기한다는 거다. 이 시도는 「또 다른 시선」에서 두 개의 의자로 대치되어 재등장한다. 하나는 테이블 위에 유리병을 두어 그 뒤의 거울이나 그림의 관계로 치환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시선의 장소에 의자를 둠으로써 앞서의 시선을 무화시키는 데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우리 시대의 사회적 결어긋남과 충돌이 야기하는 부재의 실상을 서사화한다. 다른 한편, 사다리와 계단은 종래의 것과 연장선상에서 발전 변형시킨 시뮬라크르들이다. 이는 빛의 어긋남을 또다른 면에서 이야기한다. 작가는 이를 두고 "수평적 시간에 익숙한 시대상을 비판함으로써 수직적 시간, 아니 과거와 미래를 잇는 시간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계단 아래에 있는 흰색 말의 역동적 움직임은 잃어버린 수직적 시간을 향한 강한 제스처라 볼 수 있다"(「노트」 2015)고 말함으로써 시간의 고정화된 패턴에 복종하는 현대인의 왜곡된 시간의식을 비판한다. 이 계보의 근작들은 「수직적 시간」, 「향수」, 「또 다른 시선」과 「스며들다」를 연작으로 하는 세 점과 「세우다」, 「바라보다」, 「어떤조망」과 같은 앞서 와는 또 다른 세 점을 빌려 형상화한다.

정보영_Transparent shadow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5
정보영_Vertical time_캔버스에 유채_130.3×194cm_2015

근작전의 절반을 상회하는 이 작품들은 사회 속의 기억이나 회상을 이야기하는 데 할애된다. 이 경우, 수직의 밝은 빛의 빔에다 흰 말과 유리구를 포함시키고 가파른 사다리를 추가하는 건 관조자의 시선의 어긋남을 빌려 소통의 부재를 이야기하려는 데 뜻이 있다. 특히 「스며들다」의 세 점은 상광(上光)을 빌려 방안의 수평 바닥에 떨어진 빛의 빔과 교착을 암시하는 서사를 다루는 게 그것이다. 나아가 「어떤 조망」에서처럼, 천정과 바닥 벽면의 좌우상하에 걸쳐 빛의 빔을 세우고 이것들을 겹겹이 겹쳐놓은 건 빛의 두께를 빌려 빛 간의 거리와 틈새를 빌려 부재를 말하려는 데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 시대의 사회상이 서로의 융합을 도모하면서도 허다한 틈새를 야기하는 불협화음의 서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모든 예에서 작가는 부재의 서사를 말하고 연출하려는 데서 근작전을 펼친다. 이는 빛의 이합집산 만큼 복잡다사한 시대상의 괴리를 폭로하는 데 목적이 있음을 말해준다. 근작전은 최종 우리가 사는 소비시대, 소비사회에서 물질적 이해가 충돌하고 소멸로 이어져 종국에는 실재가 시뮬라크르로 종지부를 찍는 걸 공들여 암시한다. 그럼으로써 근작들은 우리가 빛의 정련된 세계를 되찾아야 할 것을 촉구한다. 이야 말로 작가가 빛을 그려야 했던 이유가 아닐 수 없다. 이는 빛과 부재의 서사를 빌려 시대의 정신적 상황을 다루어온 십여 년의 탐구사가 마침내 그 하나의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정보영은 자신이 집념으로 천착하고 있는 부재의 리얼리즘을 오늘의 리얼리즘으로 되살려내고 이를 과시할 뿐 아니라 그 가능성을 구구절절이 확인시킨다. ■ 김복영

Vol.20151104g | 정보영展 / JEONGBOYOUNG / 鄭寶英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