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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5_1023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한옥 GALLERY HANOK 서울 종로구 북촌로11길 4(가회동 30-10번지) Tel. +82.(0)2.3673.3426 blog.naver.com/galleryhanok www.facebook.com/galleryHANOK @galleryhanok
그림자, 인생을 담아내는 심상(心象) ● 화가는 자신이 지각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옮겨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 화가는 자신이 마주하는 무수한 형상들 중 일부를 선택한다. 단순화하고 변형시킨다. 그리고 종국에는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상징을 창조한다. 회화는 화가가 자신의 인생에서 체득한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경험이 집성된 종합적인 결과물이다. 그것은 시각적이고 미(美)적이며 지성적인 정수(精髓)이다.
서은애는 적음(少)으로써 많음을 포함하는 회화, 본질의 원상(原狀)을 그려내는 회화를 위해 그림자(影)를 만든다. 작가의 그림자가 담아내는 것은 회화-예술-의 본질에 대한 탐구이자 인생에 대한 사유(思惟)이다. 그림자는 상징화된 의미의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심상의 세계를 형상화한다. 그림자는 추상적이다. 그것은 은유적이며 함축적이다.
빛이 투과하지 못하는 물체의 뒤편에 생기는 그늘인 그림자는 존재의 현전(presence)을 증명하지만 그림자 자체에는 물체가 실재하지 않기에 존재의 부재(absence)를 암시하는 이중성을 지닌다. 그림자는 있음인 동시에 없음(無), 비어있음(虛)이다. 따라서 그림자는 그것에 부여되는 상징적 의미와 그것이 제시되는 형식적 방법에 있어서 무한한 가능성을 갖는다. 그것은 마치 기의가 부재하거나 모호해진 기표와 같으며, 맥락에 따라 매순간 새로운 의미를 담아내는 전환사(shifters)와 같다.
실체(實體)에 바탕을 둔 허상(虛像)이라는 속성 때문에 그림자는 오래 전부터 신비로운 대상이자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탐구의 대상으로 다루어져 왔다. 특히 실체와 분리될 수 없지만 그것과 하나일 수도 없으며, 실체를 상기(想起)시킬 뿐만 아니라 새로운 본질을 무한 생성할 수 있는 그림자의 속성은 현실에 근거하지만 현실을 함축하고 은유하는 예술과 닮아 있다. 또한 그림자는 실제로 보고 만질 수 있는 현실적 지각으로부터는 유리되었지만 실재를 상기시키고 그것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기억과 매우 유사하다. 기억은 실재가 우리 머릿속에 남겨놓은 그림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억은 한 사람의 일생, 혹은 집단의 역사를 구성하는 것이다. 존재의 정체성은 기억에 근거한다. 이런 이유로 그림자는 작가 자신을 비롯한 무수한 개인들의 인생을 함축하는 훌륭한 상징이 된다. 게다가 그림자는 빛과 같은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변조되며 하나의 명확한 상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실재하는 것 같지만 만질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유동적인 허상이다. 인생 역시 그렇다. 정답을 찾을 것 같으면서도 찾지 못하고 명확한 길을 찾을 것 같으면서도 찾지 못하는 것, 존재할 것 같지만 존재하지 않는 이상과 현실이 공존하는 오묘한 무엇인가가 인생이다. 서은애는 바로 이러한 인생을 은유하기 위해 실재와 환영(illusion)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림자를 선택한 것이다.
근작에서 작가는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데에 있어 주로 실재하는 오브제(object)를 사용했다. "사물의 숨겨진 본질을 담아서 보여주는" 그림자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모든 오브제는 어떤 모습의 그림자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중점을 두고 선택되었는데, 자연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만큼 말린 식물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아래로 흐르는 넝쿨 식물은 폭포가 되고 고목은 산이 되고 들판이 된다. 잎사귀들은 나무가 된다. 서은애는 진정한 세상인 자연을 취(取)하여 자신만의 산수화를 창조한다. 그런데 이러한 '차(借)의 행위'는 단순한 빌림이 아니다. 빌려온 구체적인 자연의 직접성에서 간접성을 끌어내고, 유한(有限)에서 무한(無限)을 찾아내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을 통해 작가의 내면에서 일어난 특별한 감상(感想)과 미적 정취, 경관이 어우러져 재창조됨을 의미한다. 자연이 함축한 내적, 외적 미학을 조형화하는 것, 자연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자연을 초월하는 의경(意境)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화가의 몫이다.
자연을 빌어 자신의 마음을 술회하고 인생의 의미를 전달하는 창신(暢神)을 완성하기 위해 서은애는 스스로 산수 안으로 들어가 "심상풍경(心象風景)"을 완성한다. 말린 꽃잎과 풀잎, 나뭇가지가 만들어내는 그림자 속에서는 산수와 인물이 한 덩어리로 묶인다. 동양에서는 자연과 나(我)를 일체화시키는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지향했다. 선인(先人)들은 산수와 자신을 한 몸으로 여겼다. 자연-세계- 속의 존재로서 인간이 느끼고 체현(體現)하는 원형(原形)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작가에게도 그러한 심상(心狀)은 유효하다. 그리고 이제 산수는 작가가 머무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확장된다.
세상으로부터 온 재료는 빛을 통해 그림자로 창조되어 물질에서 비(非)물질로 이어진다. 예술가 또한 그러하다. 물질에서 정신을 찾아내고, 외부와 내면을 연결시킨다. 또한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작가의 모습을 그린 작은 인물상은 서은애의 전(全) 작업이 자전적인 것이며 자신의 삶에 근거한 것임을 재확인시킨다. 그러나 그림자 속의 인간 형체로는 특별한 한 사람을 구별해낼 수 없듯이 한 예술가의 이야기는 곧 보편적 예술-삶-에 대한 것으로 전환된다. 자전적 시공간에서 '나'로 표현되던 작가의 자아는 이제 '우리'로 확장되어 보편적 자아와 인생을 성찰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는 전체로 통한다.
작가가 발췌한 한시(漢詩)로 이루어진 제목 역시 작업의 주제가 인생에 관한 것임을 명확히 한다. 인간은 누구나 삶을 구조화하고 운영하는 근원적인 자기 서사를 갖는다. 시는 그러한 서사를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며 명확함과 모호함을 넘나든다. 따라서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그림자와 같다. 작가는 살아가면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경험하고 삶을 사유하는 것은 옛 사람이나 현대인이나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실제로 한시를 읽으며 많은 감정이입의 순간을 체험한다.
이제 작가는 나그네가 되어 인생길을 떠난다. 나그네는 고향을 떠난 사람이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꿈꾸는 존재이다. 그러나 서은애가 꿈꾸는 고향이 어디인지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자연과 동화된 이상향일수도, 선험적인 근원의 세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일부러 돌아갈 목적지-고향-를 지워두었다. 마음을 비우고 발길 닿는 대로, 흐르는 대로 하염없이 걷는다. "인생이란 먼 길 가는 나그네 같아 두 발을 잠시도 멈출 수 없네, 날마다 앞을 향해 나가지만 가야 할 길은 또 얼마나 남았을까." ■ 이문정
선물 받은 소박한 꽃무더기가 책상 위의 자그마한 화병에서 서서히 시들어갔다. 처음에는 열심히 물도 갈아주었건만 어느 순간부터는 일상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고 식물들은 물기 없는 마른 화병에서 제 몸의 마지막 수분까지 쥐어짜내 한 조각 푸르름을 유지하다 서서히 말라가기 시작했다. 한 때는 더없이 화려했을 색깔들이 이제는 흐릿한 흔적으로만 남았다. ● 삶도 이러하지 않을까. ●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다. 주변의 말들은 무조건 부정하며 거부하고 싶었던 반항의 시기도 있었다. 노력만 하면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의욕이 넘쳐흘렀던 때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때는 인생이 거대한 비밀을 품은 복잡한 미로같이 느껴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겠다. 여기엔 애초부터 아무런 비밀도 숨겨져 있지 않았음을 출구가 있을 것 같았던 길들도 마치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이 없음을 그저 그 자리에 멈춤으로서 쉼을 얻을 수 있을 뿐임을 이 모든 순간들 몰아치듯 지나가고 생의 뒷자락 언저리에 덩그마니 놓이고 보니 어느새 부질없음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의 흔적을 마치 빛바랜 문신처럼 온 몸에 새긴 채 손대면 바스라질 듯 위태롭게 말라있는 화병 속 식물들에게 뭐라 설명하기 힘든 묘한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 ● 그 날 이후부터 나는 수시로 차를 몰고 교외로 나갔고 목적 없이 배회하기 시작했다.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평범한 들판을 하릴없이 걷다보면 빠른 속도로 지나칠 땐 보이지 않았던 잡초와 식물들이 눈에 들어와 박혔고 그것들을 하나 둘씩 주워 올려 바구니에 담다보면 일상생활 속에서는 쉬 경험하지 못했던 적막한 평온감이 온 몸으로 스멀스멀 번져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렇게 자연에서 수집한 마른 식물들을 가지고 또 하나의 작은 심상풍경을 만들었고 나는 스스럼없이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안에서 너른 평원 위의 작은 길을 끊임없이 걷기도 했고 꽃나무 아래에서 스산한 밤바람을 맞기도 했으며 배를 타고 강물 따라 출렁대며 정처없이 흘러가기도 했다.
세상에 살아가기 쉬운 인생이 어디 있으랴 // 길 위의 나그네 // 하염없이 걷는 이여 // 그대를 보며 나는 되뇌이네 // 이제는 아무 것도 가슴 속에 품게 되지 않기를 // 더 이상 그 무엇도 그대를 뜨겁게 데워 올리지 말아주기를 // 바로 이 순간 내딛는 그 발걸음 문득 멈추기를 ■ 서은애
Vol.20151023f | 서은애展 / SEOEUNAE / 徐恩愛 / painting.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