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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작 홈페이지_www.bahkgyeongjak.com
초대일시 / 2015_0916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도스 GALLERY DOS 서울 종로구 삼청로 7길 37(팔판동 115-52번지) B1 Tel. +82.2.737.4678 www.gallerydos.com
암흑으로 빛나는 풍경 ● 박경작의 작품을 이루는 요소는 일견 단순하다. 그의 그림은 어둠과 빛, 물질과 비물질, 고정성과 유동성, 무기물과 유기물, 인공과 자연, 지상과 천상, 죽음과 삶, 공간과 시간 등으로 대별되는 두 계열이 대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조법은 인간의 가장 단순한 질서 감각에 호소한다. 물론 양자를 나누는 명확한 경계는 없다. 다만 하나는 다른 하나를 더욱 두드러지게 할 뿐이다. 리차드 테일러는 『형이상학』에서 양극화(polarzation)라고 일컬어지는 사고는 형이상학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물을 두 가지 배타적인 범주로 나누고 나서, 고려중인 어떤 것이 이것들 중의 한 가지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머지 다른 하나에 속해야 한다고 이루어져 있다. '이것이거나 저것'은 모든 명제가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언급되어 있는 논리학의 전제이다. 그러나 실재란 그와 같이 절대적인 구분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느슨한 사물들의 혼합체이다.
리차드 테일러는 대부분의 자연적 전이와 마찬가지로 삶에서부터 죽음으로의 전이는 점차적인 것이며, 두 존재 사이에는 경계선이 없다고 말한다. 경계선은 발명될 수 있겠지만 발견할 수는 없다. 박경작의 작품에서 구름 낀 광활한 하늘 부분은 물론, 검은 덩어리를 둘러싼 빛을 머금은 공기는 마치 고체에서 바로 기체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화면 속 육중한 무게감을 가지는 수수께끼 같은 검은 양괴는 오래된 공기 속에 푹 잠겨 있으면서 서서히 변모하고 있다. 음양으로 이루어진 풍경은 진한 밀도에서 흐린 밀도로, 더 높은 무질서로, 엔트로피의 변화가 일어난다. 거의 정지되어 있는 듯 변화는 천천히 일어나지만, 일순간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가속도를 붙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 변화가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와해가 모든 것의 끝인지 새로운 시작인지에 따라 긍정과 부정은 엇갈릴 것이다. 끝과 시작은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 그의 그림은 추상은 아니지만 서사를 이끌만한 요소가 부족하며, 지평선이나 수평선, 스카이라인 등을 확인할 수 있는 풍경이지만 구체적인 묘사가 없다. 시간도 장소도 불분명하다. '침묵의 회화(Painting of Silence)'라는 전시부제처럼, 그림은 말이 없다. 그림을 그릴 때 말이 없어지듯, 궁극적으로는 그림 앞에 선 관객의 할 말도 잊게끔 한다. 모든 것이 코드화 된 사회는 말에 잠식된 사회이기도 하다. 말이 먼저 와있는 세계는 판단과 고뇌의 필요를 덜어주는 편리와 기능의 세계이기도 하다. 현대미술도 개념화에 의해 말이 앞서는 경향도 있지만, 그림이 말로 대치될 수 있는 순간 그림은 전락하고 마침내 예언 된 바 그대로 종언을 고할 것이다. 누군가 먼저 주장한 바를 따라서 그림이 끝났다고 공언하던 이들은 자기 꼬리를 무는 전갈처럼 스스로의 모순에 봉착한다. 박경작은 학창 시절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회화의 종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작업해왔다. 그림 그리기에 방해를 받은 경우는 20대에 갑자기 닥친 불행 때문에 겪은 경제적 궁핍 외에는 없었다.
그림은 말이 가리키는 단순한 지시대상이나 말의 대체물이 아니다. 수많은 대체수단으로 환원 불가능한 지점에서, 화가는 회화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박경작의 그림에서 말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되어야 한다. 세상과의 통로인 그림을 통해 할 말 못할 말 모조리 담고 싶은 유혹이 없지는 않겠지만, 일단 단순하고 강렬한 인터페이스만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 외의 모든 요소들은 배면에 깔아 놓는다. 빛과 어둠으로 나뉠 수 있는 두 계열에서 지상은 어둠 속에 잠겨있다. 빛은 지상의 어둠을 더욱 강조한다. 빛을 머금은 구름의 변화무쌍한 형태에 비한다면, 그 아래에 어슷하게 그어진 지(수)평선 이하는 생략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신성한 실재감으로 충만한 하늘과 달리, 그림자처럼 검은 실루엣으로만 되어 있다. 간혹 그 사이로 뚫린 길만이 하늘과 소통할 수 있는 가느다란 통로처럼 보인다. 길은 하늘과 만나는 지상의 저 끝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길은 천천히 소요하는 오솔길 또는 무한대의 속력으로 질주 할 수 있는 고속도로다.
「침묵」이라는 제목 외에 「신성한 시간」이라는 또 다른 제목은 빛과 어둠이 만나는, 또는 갈라지는 숭고한 순간의 침묵을 떠올린다. 숭고한 순간은 신비하기에 또는 놀라워서 말문이 막힌다. 칸트가 자신의 미학을 통해 정의한 바에 의하면, 아름다움은 시시콜콜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숭고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인생의 어느 한 순간 운명처럼 닥친 어떤 불행은 너무 경악할 만한 것이어서 감내하고 살아내는 것 외에 다른 말이 필요 없는 경우도 그렇다. 자연에는 없는 직선적 요소는 목전의 형태가 도시풍경임을 알려준다. 깊은 계곡을 남기며 수직으로 올라가는 불경한 형태들은 지(수)평선이 있는 풍경에 비해 더욱 묵시록적이다. 굳이 실제 상황과 비교하자면 대도시에서 일어난 대 정전 사태 같은 것? 밤도 잠도 그리고 꿈도 없이 24시간 불 밝히며 쌩쌩 돌아가는 문명이 자연의 빛 외에 의지할 것이 없다면 그것이 대파국일 것이다. ● 자연은 변화를 수용할 만한 여력이 있다. 자연이 자연을 파괴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문명이라는 촘촘하게 짜여 진 인공적 구조는 변화를 파국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문명이 빛이 꺼지는 순간에 문명이 잊고 지냈던 천상이 빛을 발할 것이다. 「신성한 시간」이란 인간들이 쌓아왔던 가짜 찬란함이 암흑 속에 잠겨 모든 것이 무분별하게 되고, 이러한 종말 이후에 갱신되는 시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지상으로부터 올라가는 도시는 각을 세우면서 하늘과 대립된다. 다양한 빛과 대기의 상태를 미묘하게 반영하는 하늘에 비해 도시는 중력에 순응하는 육중한 형태일 뿐이다. 천상 부분의 진풍경에 비한다면 그 아래는 그림자처럼 단순하다. 문명은 자연을 그림자화 시켰지만, 박경작의 작품에서 양자의 관계는 전도된다. 또는 문명이 자연화 된다. 그것은 자연에 역행해왔던 문명 또한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것일 수도 있고, 역사의 종말에서 맞는 야만으로의 퇴락일 수도 있다.
그림 속 도시는 역사를 넘어 거의 신화적으로 다가오지만, 그 시작은 일상이다. 그것은 그의 작업실이 있는 서울 한 동네의 창문이나 옥상에서 바라본 풍경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번전시의 작품들은 모두 그곳에서 그려졌다. 그것은 아무 생각 없이 하늘보기를 좋아한다는 작가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한 텅 빈 시선은 모든 지상적인 것에 내장된 유한함과 다른 감각을 일깨웠을 것이다. 세속적 일상을 초월하는 무한은 성스럽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철저한 세속의 시대에 무한은 무의미하고 무용하다고 간주된다. 같은 시대에 예술의 위기가 말해지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기능주의를 반영하는 사각형 건물이 대세이고, 간혹 정신을 향한 지향이 느껴지는 첨탑 구조도 눈에 띈다. 종교화의 형식을 떠올리는 삼면화의 가운데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첨탑이다. 빛과 어둠이라는 대조적 장치 속에서 색은 더욱 섬세하게 드러난다. 삶에 대한 서사를 밑그림에 깔듯이, 블랙과 화이트 외의 것도 미묘한 색조를 창조하는데 필수적이다. 캔버스 위에서 감각적으로 그때그때 조합되는 색은 연금술적 과정을 떠올린다. 화가에게 색의 조합은 화학식처럼 보편화될 수 없는 것이다. ● 브라운, 옐로, 블루 등이 중간 겹으로 깔리는 색이다. 박경작의 모노톤의 작품들은 다섯 가지 미만의 색으로 구성된다. 몇 개 안되는 건반으로 수많은 선율이 탄생할 수 있듯이, 간단한 팔렛트는 한계가 될 수 없다. 눈부시게 밝아지는 효과를 위해서 어둠에서 차츰 밝게 진행되며, 많게는 수십 겹도 올라간다. 유화물감을 희석해서 여러 겹 바르는 글레이징 기법은 화면에서 직접 조합되면서 색의 깊이를 창출한다. 작가는 '기술적인 접근에 있어서는 르네상스의 기원을 가지는 그러나 독자적인 글레이징 기법을 주로 사용해 왔는데, 층층이 쌓인 물감의 표면에서 빛에 의해 일어나는 미묘한 난반사 그리고 그로인해 생기는 미묘한 깊이감과 환영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작업실에서 본, 아직 완성이 되지 않은 그의 작품에서 광택이 없이 처리된 검은 기하학적 형태는 건물이 아니라, 자연의 세계에 난입한 추상적인 검은 사각형처럼 보인다.
'검은 사각형'은 르네상스 이래 확립되어왔던 재현주의를 끝장내고자 했던 말레비치의 승부수였으며, 현대의 화가인 박경작 역시 이러한 과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그려왔던 그에게 재현 이후의 단계는 절실했다. 광택 보정이 된 작품이든 아니든, 그의 그림은 이러한 미묘한 채색 방식으로 비슷한 소재와 구도를 가지는 듯한 그의 그림은 단조로운 반복을 벗어나 차이의 유희로 넘어가게 된다. 박경작은 특히 색채 면에서 어느 한 항목으로 환원할 수 없는 미묘한 차이를 중시하지만, 대체로 블랙이 주조색인 것은 확실하다. 완전히 추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종의 풍경에서 블랙이라는 주조색에서 발생하는 어두운 느낌이 있다. 그것은 비극이나 종말론까지 연상되는 검은 풍경으로 다가온다. 19세기에 '검은 그림(pinturas negras)'(고야)이 있었듯이 검은 풍경도 있을 수 있다. 존 하비는 『블랙 패션의 문화사』에서 문학에서 선취된 검은 풍경의 예를 든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소설가 디킨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검은 집을 보았다. ● 21세기의 화가에게는 검은 빌딩에 해당된다. 존 하비에 의하면, 디킨스의 작품에서 '어두운', '검은'이라는 단어는 부두, 철도, 공장, 사무실, 교회, 감옥을 묘사할 때 계속 등장한다. 런던의 연기 가득한 매연은 검은색을 연상시켰으며, 그것은 '어둡고 쓸쓸한 거리', '검은 흙과 썩은 물이 가득한'이라는 표현을 낳았다. 디킨스는 『황폐한 집』에서 런던은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거대 도시지만, 여전히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더럽고 어두운 거리를 지니고 있으며', 『위대한 유산』에서 런던의 건물들은 '검댕과 매연으로 곰팡내 나는 상복'을 입고 있다. 도시가 검댕을 입은 것은 19세기에 석탄 난방기 사용이 엄청나게 늘어서였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여명기, 즉 산업혁명기의 도시가 가진 슬픈 영혼의 이미지이기도 했다. 한국은 산업 혁명기의 모순을 또 다른 저개발 국가에게 떠넘기고 겉으로는 말쑥한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이 도시를 계통 발생하듯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숯검댕이 아닐까.
빛없는 검은 양괴들은 검은 색이 그러하듯, 다른 많은 색을 포함하고 있지만 현실화되지 않는다. 빛과 접하는 검은 경계면은 도시인을 짓누르는 답답한 물질적 덩어리를 강조한다. 여기에서 블랙이 오염, 질병, 고통, 절망, 우울, 죽음을 떠올려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메카에 있는 유명한 검은 성물 '카바(Kabba)'의 예를 든다. 카바는 건물 전체가 검은 비단으로 싸여 있다고 한다. 카바의 검은 돌은 먼 옛날에는 흰색이었지만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검정이 되었다고 한다. 에바 헬러는 종말론적 사고에서도 블랙을 발견하는데, 그에 의하면 세상이 몰락하는 날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고 태양이 하늘을 태우고 나면 빛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지옥도는 그러한 파국의 시기를 상상적으로 재현하곤 한다. 존 하비에 의하면, 악마들은 검은 부리, 검은 발톱, 검은 꼬리를 지니며, 검은 색을 배경으로 밝게 빛나거나 불이나 폐허 속의 검은 건물들을 통해 나타난다.
그러나 희망도 있다. 창공에 편재하는 빛은 극적인 대결구도를 형성한다. 에바 헬러는 블랙이 낮과 밤의 차이를 만들고 그를 통해 선과 악의 차이를 만든다고 말한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을 때 제일 먼저 '빛이 있으라!'고 명령했듯이, 블랙과 대조되는 영역은 새로운 시작, 또는 아직 누구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영역을 예시한다. 21세기의 그림에서 중세적 종말론을 떠올리는 것은 시대착오적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블랙이라는 주조색은 고립된 개인의 무정부주의적인 욕망을 감추는 금욕주의와 관료주의에도 선명하다. 부조리에 가득한 카프카적 세계를 색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바로 블랙일 것이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대적 이상으로 구축된 문명은 여전히 암흑이다. 진보를 위한 진보를 동력으로 뜨겁게 돌아가는 문명은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인간의 열정과 이상을 포함한 모든 것을, 그리고 시간마저도. 박경작의 그림에서 검은 사각형들 위로 피어오르는 영기(aura)는 비극 또는 카타르시스로 다가올 총체적 연소의 흔적 같다.
칠흙같은 어둠은 시간의 폐기를 말한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영원회귀의 시간; 원형과 반복』에서 모든 재생의 수단들이 지향하는 목표는 우주 창조행위의 반복, 즉 아득한 때로의 끊임없는 회귀를 통하여 지나간 시간을 무효화시키는 것, 즉 역사를 폐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이 위협받을 때마다, 그리고 자신들이 보기에 우주가 소진되어 텅 빌 때마다 사람들은 근원으로 회귀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시간의 폐기란 특히 세속적인 시간의 폐기를 말한다. 「신성한 시간」을 알리는 빛은 어둠 속에서 현현(epiphany)한다. 박경작의 작품에서 어둠과 빛의 대조는 그것이 갈라졌던 최초의 지점으로 회귀시킨다. 그것은 혼돈으로부터 세계의 창조가 일어나는 순간을 재연함으로서 노회해진 시공간을 갱신하려는 제의적인 몸짓이다. 이때 예술은 사라진 종교의 대역을 맡는다. 그러한 기조 속에 잠겨있는 박경작의 작품은 가짜 진보와 새로움을 초월하는 실재와 조우하고픈 인간의 근본적 욕망을 표현한다. ■ 이선영
Vol.20150916b | 박경작展 / BAHKGYEONGJAK / 朴耕作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