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acred Time

박경작展 / BAHKGYEONGJAK / 朴耕作 / painting   2013_1113 ▶ 2013_1124 / 월요일 휴관

박경작_The Sacred Time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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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3_1113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그리다 GALLERY GRIDA 서울 종로구 창성동 108-12번지 B1 Tel. +82.2.720.6167 www.gallerygrida.com

개인전에 부쳐 ● 한창 작업을 하다 잠시 숨을 고른다. 고된 몸으로 의자에 앉으니 나즈막이 신음 소리가 새어나온다. 창밖 풍경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가을이다. 유적함이 감도는 작업실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긴다. 나의 회화는 지평을 넓히고 열겠다는 열망을 견딜 수 있을까? 회화의 영원성에의 욕망은 지속될 수 있을까? 너머로 넘어가기 위해 나는 계속 여기에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사라지기 전까지 살아있을까?

박경작_The Sacred Time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3

지나온 날들을 가만히 되돌아 본다. 크고 작은 인간사의 우여곡절, 절망감에 짓눌렸던 20대의 기억 속 편린들이 흩날린다.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아 앉을 수도 없었던 나날들, 삶이 가혹해도 그것을 원망하지는 않겠다고 가없이 되뇌었던 다짐들, 그럼에도 때로는 그저 주저 앉고 싶었고, 공허의 심연이 유혹하는 저 부드러운 품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우연들, 스쳐간 사람들, 어지러운 대화들, 그리고 그 뒤나 앞이나 옆에 있었던 사물과 풍경들... 비록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그것들은 지금도 무언가를 들려주곤 한다. 나는 그런 소리를 그런 두런거림을 들으려고 애썼다. 그 모든 우연에 어떤 의미가 깃들어 있음을, 홀로 남겨진 나와 나의 고독을 무언가가 보호하고 있다는 기이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절망 한 가운데에서 어떤 힘을 느꼈다. 이제 창 밖으로는 노을이 진다.

박경작_The Sacred Time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13

이번 전시의 주안점은 '영혼의 감성'을 환기시키는 것에 두었다. 영혼의 감성이란 말이 과연 가능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약간의 욕심을 더 부린다면 그 감성에 우아함 혹은 어떤 기품이 깃들기를 바랬다. 그레이스(grace)라는 단어에 딸린 심지어 종교적인 은총마저 깃들기를. 미학적 개념으로서의 숭고(sublime)의 변천사는 나에게 늘 주요한 참조사항이었다. 유한한 세계의 온화함이나 아늑함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욕망은 늘 숭고를 향하고 있다. 그렇기에 숭고는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죽음을 사유하고 죽음을 상상하려는 예외적 인간들이 대면하는 종교적 상황에 대한 것이다. 나는 주변 공장과 별 다를바 없는 이 겉보기에 공장같은 가끔 내게는 카타콤같은 작업실에서 회화라는 이상(理想), 낡았고 주로 팔리고 영혼과는 거의 무관해진 이 회화라는 반-시대적인 이상을 고수한다.

박경작_The Sacred Time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3

나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회화였다. 인생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추구해 온 것이기에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감성과 신체의 지난한 훈련, 기술, 지식, 사고방식 심지어 삶의 방식 마저도 회화를 잘 해내기 위한 것에 맞춰 왔으니 말이다. 내게서 회화를 뺀다면 나는 아마 거의 없었던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시대나 환경의 변화에 따라 기민하고 융통성 있게 의미와 목적을 바꿔가지 못하는 완고한 내 성격도 분명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영원성에 도달한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의심한 적은 없다. 막연한 꿈을 더 강하게 키운것은 왔다가 사라진 우연들, 사람들, 고통들이었다. 회화적 회화. 나에게 문제는 늘 그것이었다. 영혼의 감성, 시처럼 흐르고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중에 영원을 가리킬 수 있는 회화. 직관과 본능의 육체에서 만들어져 매혹시키면서도 고결함을 간직한 회화. 재현의 진부함을 떨쳐내고 언어에 의지하지 않으며 느낌과 감성에 닿을 수 있는 회화. 궁극적으로 영혼의 불멸에 대해 말하고 있는 회화. 내가 추구하는 회화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번 전시작은 「The Sacred Time」 연작으로 구성된다. 이는 세속적 일상을 이루는 균질한 시간이 사라질 때, 그 때, 서서히 제 존재를 열어보이는 이질적 시간과 그 시간이 생성시키는 공간을 다룬다. 그런데 이제와서 돌이켜보니 나는 그동안 회화라는 공간 자체를 그렇듯 아련한 성역(聖域)으로 바라봐 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박경작_The Sacred Time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3

창작을 해 오면서 중점을 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수면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고요한 수면은 떨어지는 물방울과 함께 조금의 늦음도 빠름도 없이, 과함도 덜함도 없이, 하지만 반드시 물방울과 만나는 그 순간 정확히 물방울에 상응하는 힘으로 또한 최선의 방식으로 반응한다. 모든 물방울은 다르기에 수면은 떨어지는 물방울에 맞춰 다양한 모양으로 튀고, 소리내며, 출렁이고, 퍼져나간다.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은 무수한 빗줄기로 바뀌어 수면 위에서 부서진다. 물방울을 연주하는 수면의 독주는 협주로 오케스트라로 때로는 군무로 그렇게 환희를 이끌어낸다. 이러한 수면이 되기 위해 나는 나를, 인격을, 사고를 지운다. 희미하게 사라지는 내가 완전한 투명함에 이를 때까지. 스스로를 의식하며 머뭇거리는 일 없이, 일말의 주저함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으로, 신성한 부름에 이끌리듯 어떤 불가피한 필연성 속에서 돌아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에 내 모든 것을 소진하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그림 그리기란 이렇듯 분출하는 수면의 울림이며, 이것이 내가 해내야 하는 것이다. 고도로 유연한 각성 상태를 유지한 채 생성의 시간 속 그림이 요구하는 것에 귀 기울이며 최선의 방법으로 대응하기. 이러한 상태를 어디까지 유지할 수 있는지가 이번 작업의 최대 관건이었다. 나는 늘 작품의 최종 이미지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창작을 진행해 오곤 했는데, 이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작품은 종종 시작과는 전혀 다른 길로 나를 이끌기도 했다. 창작에서 종종 마주하게 되는 공허한 침묵은 창작을 한층 막연하고 곤혹스러운 일로 만들곤 했다. 그럼에도 믿음을 가지고 인내해 나갔다.

박경작_The Sacred Time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3

텅빈 극장의 어둠 속에서 홀로 리허설에 열심인 배우의 독백같은 문장은 이 정도로 줄일까 한다. 작가된 입장에서 작품이 스스로 말하고 관객과 어울리는 기쁨을 빼앗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작품이 세상에 나가 제 관객을 찾고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자 이제 여러분의 시간이다. 당신의 영혼의 감성이 무상한 시간속을 흐르다 문득 너머를 가구하는 은총의 순간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중 한 구절인 '취하라'로 건배사를 대신하며 이만 물러난다. ■ 박경작

박경작_The Sacred Time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3

취하라 항상 취하라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절실한 것은 없다. 시간의 끔찍한 중압이 네 어깨를 짓누르면서 너를 이 지상으로 궤멸시키는 것을 느끼지 않으려거든 끊임없이 취하라. 무엇으로 취할 것인가. 술로 , 시로 , 사랑으로, 구름으로, 덕으로 네가 원하는 어떤 것으로든 좋다. 다만 끊임없이 취하라. 그러다가 궁전의 계단에서나 도랑의 푸른 물 위에서나 당신만의 음침한 고독 속에서 당신이 깨어나 이미 취기가 덜하거나 가셨거든 물어보라 바람에게, 물결에게, 별에게, 새에게, 시계에게, 지나가는 모든 것에게, 굴러가는 모든 것에게 노래하는 모든 것에게, 말하는 모든 것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바람이, 물결이, 별이, 새가 시계가 대답해 줄 것이다. 취하라.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항상 취해 있으라. 술이건, 시이건, 미덕이건 당신 뜻대로 보들레르

Vol.20131113g | 박경작展 / BAHKGYEONGJAK / 朴耕作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