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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 블로그_blog.naver.com/redgrace76
초대일시 / 2015_0916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한옥 GALLERY HANOK 서울 종로구 북촌로 11길 4(가회동 30-10번지) Tel. +82.2.3673.3426 galleryhanok.blog.me www.facebook.com/galleryHANOK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가다 보면 ● 플라뇌르(flâneur)란 느리게 걷는 산책자를 뜻하는 프랑스어이다. 플라뇌르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계획을 계속 수정해가며 새로운 장소와 대상이 이끄는 대로 발을 내딛는다.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는 『현대적 삶의 화가』라는 글에서 플라뇌르를 현대적 예술가의 표상으로 설명했다. 보들레르가 말한 현대성(modernity)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어떤 것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것이 공존하는 것이다. 즉, 현대적 화가는 영원성과 우연성을 동시에 표현해내야 하는데, 이 능력은 플라뇌르가 지닌 관찰력과 흡사하다. 플라뇌르는 도시를 거닐며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수많은 이미지들에서 영원한 어떤 것을 순간적으로 잡아내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작가 정은주는 19세기 플라뇌르들처럼 자유롭게 소요(逍遙)하지만 오늘날 LTE 속도가 붙은 대도시 풍경이 아닌, 시간이 멈춘 듯한 고즈넉한 숲 속을 선택하여 산책을 시작한다.
이 숲은 이 곳에 들어선 자의 시각에 따라, 드리워진 계절의 흔적에 따라, 바라보는 자의 심정에 따라, 색과 자취를 변주한다. 우리를 압도하는 「Blue Forest」의 숲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이는 사실주의의 외관 속에 비밀의 정원을 숨기고 있는 듯 하다. 「Forest 12-17」은 숲이라기에는 다소 쓸쓸한 느낌을 주지만, 연작으로 반복되면서 어느덧 무성한 숲을 이루는 생성의 과정으로 읽힌다. 특히 이 숲은 가상과 실재 사이 어느 지점에 멈추어 있는 듯한데, 이는 작가가 손가락의(digital) 힘과 손적인(manuel) 힘을 서로 종속시킬 줄 알기 때문이다. 중첩된 이미지들 너머 더 깊은 숲에는 환상과 기억이 플라뇌르의 발길을 유혹한다. 「DayDream」, 「Season of Life 1,2」의 머리는 아직 몸을 만나지 못했거나 제 몸을 잃어버린 상태인데도, 가녀린 꽃줄기 위에 살포시 앉아 미소짓고 있다. 머리 없는 신체도 몸 속에서 새롭게 자라나는 식물들과 함께 그들만의 소요를 다시 시작한다. 그들의 다음 목적지를 정하는 것은 더이상 이성의 눈이 아니다. 눈이 없어도, 눈을 감아도 산책은 계속된다. 오히려 소리 없이 날개짓하는 나비가 우리를 인도한다. 나뭇잎 하나만으로도 나무 한 그루가 되는 대유의 세계(「Life Sound」, 「Forest 10」)로, 좌우로 뻗어나가는 뿌리가 위계 없는 생성을 만들어내는 리좀(rhizome)의 세계(「Season of Life 5」)로 우리를 데려간다.
플라뇌르는 숲의 지면을 밟고 소요하며 나비들은 허공에서 자유로운 탈주선을 그린다. 그들이 그리는 탈주선을 따라가보면 「나무 창문」에서처럼 나무 속에 창문이 나타나고, 창문 너머 또다른 집으로 이동이 가능하다. 이렇게 나비와 함께 노닐다보면, 장자가 경험했던 것처럼 내가 플라뇌르인지 나비인지 분간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 사실 정은주의 세계는 모든 것의 구별이 불가능한 지대에 놓여 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가상과 실재, 인간과 자연을 가르는 경계가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 경계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이미지 위에 붓을 놓지 않는다. 이것은 어쩌면 길이 아닌 곳을 주저하지 않고 드나들 수 있는 나비 또는 플라뇌르의 힘일지도 모른다. 숲 속에 아직 나지 않은 길을 따라 시나브로 걷고 있는 작가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보들레르의 시대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예술가가 잡으려 했던 영원성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다. 경계가 나뉘어지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일탈과 변이를 용납하는 세계. 바로 이 곳에 예술이 거주하고 있다. ■ 한의정
1. 나의 숲은 나를 둘러싼 세상이다.삶을 살아내는 것은 숲을 느리게 걷는 것이다.그 숲에는 사랑했던 이와 밤새 바라본 달이 있고 청춘의 헷세의 나비가 있고 태어나 지금까지 숲이 된 전봇대들이 있다. 그리고 숨어들었던 슬픔의 숲이 있다.포근히 안아준 어머니의 숲이 있다. 세상의 숲에서 느리게 걷다가 자취가 된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다.
2. 내가 생각하는 것은 모호하지만 흔한 것들이다. 얼핏 보면 평범한 동양화나 페인팅 같은 그림이지만 들여다보면 디지털로 유닛화된 펜, 붓 터치와 이미지 데이터들의 엇나간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시의 텍스처에 종이에 생길 번짐과 펜 선이 올려져 있고 그림 같아 보이는 일부는 사진이거나 스티커이기도 하다. 이 어색한 조합이 데이터로 저장되고 이미지로 산술 되어 평범하고 흔한 페인팅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 모호하고 경계 없는 것을 거부감 없이 익숙해하는 세계에서 나는 살고 있다. 그것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며 이야기이다. 그래서 더더욱 내가 특별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감정적 교감을 원한다.그러나 그 감정적 공감대가 강요하지 않은 것이야 하고 그런 작업이 과연 매력적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난처하다.어쩌면 드로잉과 사진을 포토샵으로 조정하고 다시 프린팅 한 후 페인팅과 바니시 작업을 쌓아올라가는 것도 오류투성이인 작업을 좀 더 쉽게 풀 수 있는 최선을 행하고 있는 것뿐인데 말이다. 거창하게 레이어와 디지털 아날로그를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이런 일상의 오류들을 조정하는 삶의 이야기일 뿐일지도 모른다. ■ 정은주
Vol.20150916a | 정은주展 / JUNGEUNJU / 鄭恩朱 / painting